월간 음악춘추

카잘스 페스티벌 인 코리아 류재준 예술감독 / 음악춘추 2013년 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2. 25. 16:26

카잘스 페스티벌 인 코리아
음악과 자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다

 

“나는 민주국가들이 에스파냐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그런 나라에서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나는 프라드로 돌아왔습니다. 말하자면 두 번째 망명인 셈이지요. 나는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항의를 표하기 위해 프라드의 피난처로 돌아왔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예술가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뒤의 긴 세월 동안 정말 스스로를 고립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음악회의 무대에서는 내 악기소리가 울리지 않았지만 악기와 여전히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나를 만나러 프라드로 오고 다른 나라에서 편지를 보내 지속적으로 나를 벗해주었습니다.
1947년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알렉산더 슈나이더가 며칠간 나를 방문했었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내 오랜 친구인 호르쇼프스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호르쇼프스키가 낸 어떤 제안에 대해 굉장히 흥분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호르쇼프스키의 제안이란 프라드에서 나의 감독 아래 바흐 축제를 열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샤(슈나이더)의 주장에 의하면 이 일은 내가 프라드로 물러난다는 항의 표시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주저했어요. 슈나이더에게 보내는 답장에 이 축제에 내가 참여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다고 썼습니다. 사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예술에게 완전한 침묵 속에 남아 있으라는 형벌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 대중 앞에서 연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동료 음악가들이 온 세계에서 프라드로 와서 당신과 함께 연주하는 기회까지 박탈할 겁니까? 그렇게 하더라도 당신이 항거하는 의미가 약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나도 축제를 여는 데 동의했습니다. 특히 그 일을 통해 내 동포들을 도울 방법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아주 기뻤습니다.
바흐 축제는 1950년 6월 프라드에서 열렸습니다. 바흐 축제에 대한 반응은 정말 금방 나타났고 열광적이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프라드에서 음악축제를 계속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글_배주영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