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유한철[劉漢徹] 선생
한국 음악계의 지평을 넓혀준
평론가 유한철 선생(1927~1980)은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료계에 종사하다가 6.25 동란 중 서울 수복 후 안양 촬영소 창립과 운영에 협조하면서 시나리오 수업 및 영화 평론 수업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시나리오 작품은 1957년의 「잃어버린 청춘」, 1959년의 「낭만열차(浪漫列車)」, 1960년의 「재생(再生)」(이광수 원작)·「어머니의 힘」(이서구 원작)·「아들의 심판」(이서구 원작) 등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음악에 취미를 가졌다. 1934년 개성의 송도고보(松都高普)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醫專)으로 진학해 졸업 후 의사가 되었다. 송도고보 재학 시절 당시 정사인 선생이 이끄는 브라스 밴드로 활동해 음악부장을 맡았고 1932년 현제명 박사를 도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하는 제1회 전조선중등음악경연대회(全朝鮮中等音樂競演大會)를 마련하였다. 이 경연대회에서 정사인 선생이 작곡한 「추풍(秋風)」으로 우승하였다. 세브란스 재학시절 만돌린 독주와 세브란스 4중창단의 멤버로 활약했으며, 해방 전부터 음악평론가로 활동하였다. 1976년도 이성삼·유신·양일용 등과 함께 월간지에 평론을 발표했고, 1977년 박용구·김형주·이상만 등과 함께 일간지를 통해 평론활동을 폈다. 1979년 『월간음악』·『음악세계』에 음악평론을 발표하였다. 또한 다양한 신문사에서도 활발히 기고 활동을 하였는데 1970년대 경향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그가 쓴 음악평론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영화평론·음악평론·무용평론·체육평론·시사평론까지 겸한 다재다능한 성격에 분망한 생활을 누렸으며, 낙천주의적인 생활관 때문에 주위에 친구가 많았다. 한편 체육계의 임원으로써 체육발전에도 영향력이 컸고, 전문학교시절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하였던 전력을 살려 이 방면의 선수육성에 이바지하였다
일 시 2016년 3월 8일 오전 11시
장 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 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 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1. 유한철 선생의 성장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유한철 선생과의 첫 만남
3. 유한철 선생의 음악세계
4. 유한철 선생님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 오늘은 우리 음악계의 대단한 비평가이신 유한철 선생님을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유한철 선생님은 의사이시면서 영화, 음악, 무용까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셨는데 음악계에도 많은 공헌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 오늘 좌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삶을 보면 원래 직업이 의사이시지만 예술 쪽에도 큰 업적을 남기셨는데요, 유한철 선생님이 어떻게 음악을 즐기게 되었는지 김형주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김형주 / 음악을 즐기게 된 계기는 잘 알 수 없지만, 비전공자가 음악 평론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유한철 선생님은 의사 출신이지만 예술계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고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다양한 인생살이를 하신 분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팔방미인 이라고 부릅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의료 활동 보다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나 체육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셨습니다. 특히, 체육계의 임원으로써 대한 체육회 이사와 대한아이스하키 협회 회장을 역임하셨으며 현재까지도 ‘유한철배(盃) 아이스하키’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또한, 매년 미스코리아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으셨습니다. 이렇듯 한 인물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각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특이하다고 느껴집니다.
이용일 / 이상만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상만 / 유한철 선생님은 개성의 부유한 집의 자손으로 개성의 명문 송도고보에서 공부를 마치셨습니다. 송도고보 시절, 이왕직 양악대 출신 교사인 정사인 선생님이 이끄는 브라스 밴드에서 활동하며 코넷을 시작으로 호른까지 섭렵하셨습니다. 송도고보 브라스 밴드는 정사인 선생님이 작곡한 「추풍」이라는 작품을 연주해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주최하던 경연대회에서 연전연승을 했습니다. 유한철 선생님은 송도보고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 의전에 진학해서 세브란스 4중창단과 함께 아마추어 음악활동을 계속 하셨고 선생님의 누이인 유부용 선생님은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였습니다. 선생님의 성품이 사교적이시고 머리가 좋으시다 보니 다방면에 관심을 가져 세브란스 의전시절에 는 아이스하키 선수로도 활동하시며 주장을 맡으셨습니다. 세브란스 의전 졸업 후에는 신설동에서 의사로 개업하셔서 6.25전까지 의료 활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6.25 사변 중 피난을 가지 못하여 공산당 치하에 조금 협조를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으로 가시게 됩니다. 일본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며 영화 관계자들을 만나셨고 외국 영화를 일본을 통해 수입하는 길을 여시면서 영화계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셨습니다. 6.25의 상황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 살기 힘드셨던 상황이셨는데 선생님의 매부이신 원용덕 헌병사령관의 도움과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하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김형주 선생님께서도 팔방미인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디에 가든지 사람들과 잘 사귀고 교우의 폭이 굉장히 넓으셨습니다.
이용일 / 저는 유한철 선생님 한 번 뵌 적이 있는데요. 그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대단한 집중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또한 70년대 선생님의 기사를 보니 요즘 음악 평론과는 다르게 연주조건과 음악 자체의 배경을 쓰신 것을 보고 음악의 깊이보다는 세상의 깊이를 가지고 모든 것을 정리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형주 / 선생님은 학창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하셔 취미생활로 즐기셨으며 사회에 나와서도 의사인 본업보다 음악에 전념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비평은 음악에 대한 깊은 비평이 아닌 음악을 애호하는 차원에서의 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음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고 보이며 값있게 평가해야 합니다.
이용일 / 이상만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이상만 / 유한철 선생님은 부지런한 성품을 가지셔서 글을 빨리 쓰셨으며 교우관계가 좋으셨기 때문에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과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때문에, 신문사에서 추켜올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비평을 유한철 선생님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은 비평적인 시각보다는 음악가를 장려하는 글이 많이 있습니다. 앞선, 김형주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음악평단에서의 중요한 평은 실리지 않았습니다만 사교범위가 넓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음악가들을 뒤에서 돕는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용일 / 반대로, 선생님의 성격이 외향적이고 주위에 사람이 많아서 낯선 사람들은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을 거 같은데요. 당시 음악가들과의 교류는 어떠셨나요?
이상만 / 음악가들과는 폭넓은 교류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주로 교류 하셨습니다.
김형주 / 음악가들과의 교류는 많이 없었지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서는 성품이셨습니다. 또한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어서 다재다능하신 분이셨습니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 작가로 위촉을 받으면 바로 호텔에 들어가서 그날 밤을 새서 하룻밤 사이에 시나리오 한 편을 쓰셨습니다. 그만큼 능력이 뛰어 나신 분이셨습니다. 해방 직후에 「낭만열차(浪漫列車)」, 「잃어버린 청춘」, 「재생(再生)」, 「어머니의 힘」 등 여러 작품이 영화로 제작이 되었고 공연도 제작되어 시나리오 작가로도 널리 알려지신 분입니다.
이상만 / 제일 많이 알려진 작품이 「낭만열차(浪漫列車)」입니다. 영화계에도 깊이 관여하신 분이십니다.
이용일 /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서울대학교 미학과 명예교수인 김문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님을 음악 평론가로 높이 샀습니다. 미학자 쪽에서 음악학자로 인정해 주었다는 것을 보면서 이 대담을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고 음악계에서 꼭 조명해야 할 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또한, 대담을 준비하면서 유한철 선생님의 업적이 엄청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유한철 선생님의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셨나요?
이상만 / 일찍이 부인 없이 혼자 사셨습니다.
김형주 / 유한철 선생님은 호탕한 스타일이셔서 다양한 사람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생활양식이 다양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용일 / 이상만 선생님 보태서 말씀해주신다면요?
이상만 / 저는 유한철 선생님과 가까운 관계이었습니다. 그분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술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선생님과 술자리에서 많이 어울렸습니다. 선생님은 술자리에서도 과음을 하지 않으셨고 새벽4시가 되면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활동하셨습니다. 작품을 쓸 때에도 글을 빨리 쓰셨기 때문에 영화사에서도 가장 빨리 작품을 쓰시는 분입니다. 또한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셨기 때문에 사회적 정보가 많으셨고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모든 신문사에 기고를 하실 정도로 글을 많이 쓰신 분입니다. 음악 평론가로써의 시간은 짧을지 모르지만 활동량이 많으신 분입니다.
이용일 / 사실 당시 신문에 음악 평론이 들어갔다는 자체가 유한철 선생님의 업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상만 / 네 그렇습니다. 음악을 사회화시킨 것이 선생님의 업적이지요.
김형주 /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로 음악 평론가로써의 시간은 짧지만 비중 있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음악 평론가부터 시나리오 작가, 체육회 간부,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의사까지 1인 5역을 하며 다양한 인생살이를 하신 분입니다.
이용일 / 선생님의 성품이 호탕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 역할을 다 감당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한 집념이 대단하시다고 생각이 됩니다.
김형주 / 선생님은 인간성이 좋으시고 어두운 면이 없어 언제나 밝고 전진적이셨습니다. 만인이 좋아할만한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이용일 / 그렇다면, 선생님의 다른 면모는 없었나요?
이상만 / 여러 가지 일을 하시다 보니 회의에 가면 늘 졸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깨어나셨습니다. 워낙 체력이 좋으신 분이셔서 송도고보 시절부터 아이스하키 선수로도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송도고보는 선교사들이 세운 명문학교인데 선생님께서는 그 곳에서 어린 시절 좋은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이용일 / 유한철 선생님 같은 분이 나오신 것은 송도고보에서의 좋은 교육 덕분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가장 중요한 중고등학교 과정을 인성교육이나 예술교육 없이 단편적인 지식을 채우는 것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이 걱정이 됩니다. 선생님의 삶을 조명하면서 우리 사회가 깨우치길 바랍니다. 유한철 선생님에 대해서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이상만 / 유한철 선생님은 기억력이 매우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저하고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제가 KBS에 있을 때 열린 정사인 선생님의 1주년 기념 음악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친구들의 대소사를 열심히 챙기시고 사람들을 많이 배려하셨기 때문에 넓은 지평에서 활동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통사고로 인해 비명에 돌아가셨고 그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용일 / 우리들에게 한 때 희망을 주고 여러 가지 말씀을 많이 주셨던 분이신데 마지막이 안타깝다니 매우 아쉽습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4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진 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월간 음악춘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세토오페라단 단장 강화자, 소프라노 김희선 / 음악춘추 2016년 5월호 (0) | 2017.01.02 |
---|---|
피아니스트 오상은 / 음악춘추 2016년 5월호 (0) | 2017.01.02 |
도봉구립여성합창단 / 음악춘추 2016년 4월호 (0) | 2017.01.02 |
도봉구청장 이동진 / 음악춘추 2016년 4월호 (0) | 2017.01.02 |
첼리스트 최경은 / 음악춘추 2016년 4월호 (0) | 2017.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