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월호
피아니스트 정정식 선생
피아니스트 정정식 선생은 1921년 2월 12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8년 서울 교동소학교, 서울 이화고녀를 거쳐 1938년 이화여자 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하여 1941년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였다(이화여전 제 16회 졸업). 졸업 후 이화고녀, 배화고녀의 음악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이화여대 피아노과 교수가 된 후에는 후진양성에 더욱 힘썼다. 1958년부터 4년여 동안 오스트리아 비엔나 음악원에 유학하면서 피아노최고연주자 디플롬(Diplom)을 취득하기도 한 그는 1963년 이화여대 중강당에서 귀국피아노 독주회를 가졌다. 1964년부터 약 5년간 KBS, CBS의 라디오방송국 음악해설 프로를 진행하였으며, 1971년에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소재 칼 오르프음악원에서 오르프 리듬교육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에는 이화여대 음악대학 피아노과 학과장을 역임하였고, 다수의 국내 피아노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독주회와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아노교수법 교재집필, 오르프 교육교재집필, 다수의 피아노교수법 관련 논문발표 및 공개강좌를 하였고, 1986년 2월 40여 년 동안의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 교수직을 뒤로 하고 정년퇴임하였다. 대한민국 동백장을 수훈한 바 있는 그는 1987년부터 2년간 일본 오카야마 청심여자대학교의 피아노전공 촉탁교수를 역임하였다. 2015년 10월 30일 향년 95세로 작고하였다.
일 시 : 2015년 12월 1일(화) 오전 10시 30분
장 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 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 널 :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김재원(딸, 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학 학장)
김선자(제자, 전남대 명예교수)
유순희(제자, 이화여대 강사 역임)
유현진(제자, 대전과학기술대 피아노과 교수)
1. 정정식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정정식 선생과의 첫 만남
3. 정정식 선생의 음악세계
4. 정정식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정정식 선생님은 세상을 너무 조용하게 사셨고 활동을 크게 안하셨습니다. 정정식 선생님에게 좋은 일뿐만 아니라 역경도 있었겠지만 현재 음악사에 나와 있지 않은 이야기, 후학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따님 김재원 선생님께서 정정식 선생님의 가족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김재원_ 저의 가족은 극적인 스토리를 많이 지닌 가족입니다. 외할아버님(정세권 선생)께서는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굉장히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계셨고 이른 나이에 면장을 하셨기에 경남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그 작은 벼슬을 한다해서 이겨낼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오셔서 일본사람과 대항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이상의 주권을 찬탈당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울의 땅을 일본사람들이 많이 잠식해 가고 있었던 현실이었습니다. 외할아버님은 이것을 우리가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고 그래서 돈을 버시는 대로 일본사람들과 땅을 놓고 싸우셨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물론 부를 많이 축적하셨지만 가족들의 희생도 많았을 테지요... 또한 외할아버님께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매우 크셨던 것 같습니다. 음악과에 저의 어머님이 입학하셨다니까 굉장히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 입학소식을 듣자마자 화신백화점으로 가셔서 그 당시로써는 제일 좋은 피아노를 저의 어머님께 선물하셨다고 합니다. 딸이 피아노를 친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우셔서 피아노를 대청마루에 놓으셨는데, 저의 어머님은 아주 성실하신 분이셨기에 늘 피아노 연습을 하시니까 집에는 항상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손님이 오시면 “피아노를 멈춰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외할아버님은 절대 그러시지 않으시고 사랑방에서 손님과 소곤소곤 말씀을 나누실 정도로 저의 어머님의 열정을 높이 사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용일_ 정 선생님의 형제는 어떻게 되나요?
김재원_ 모두 8분이세요.
이용일_ 그 가운데 음악을 하신 분은요?
김재원_ 없으십니다.
이상만_ 정 선생님의 본관은 어디인가요?
김재원_ 진양 정씨입니다.
이상만_ 경상도 토박이시네요.
김재원_ 저의 어머니는 이화고녀를 다니시는 동안에 수학과 물리학을 굉장히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물리학, 수학선생님이 일본분이셨는데요, 그 분들이 “너는 졸업하자마자 일본 동경으로 가서 물리학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의 어머님은 학교를 다니시면서 풍금을 배우셨는데 찬송가 반주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보시고는 성함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화고녀의 당시 교장이시던 미국인 선생님께서 저의 어머님을 보시고는 “자네는 정말 피아노를 해야 할 사람이다. 음악과를 가야한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어머님이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아노시험을 보러 가셨는데 시험장에 들어가신 어머님은 악보가 생각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쳐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생각을 가다듬어 그 자리에서 작곡을 해서 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합격하여 학교에 다니시는데, 심사위원으로 오셨던 선생님께서 “얘가 작곡하던 그 아이지?”하고 웃으셨다고 합니다.
김선자_ 서울대의 한 교수님이 현재 20세기 초 조선의 건축에 관해서 논문을 쓰시고 계십니다. 정정식 선생님의 아버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하시고 조선어학회를 후원하셨고, 조선물산장려회의 재정이사로 재직하면서 도움을 주셨는데 이때가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후원을 하시면서 큰 결과를 냈는데 이런 분이 잊혀져서야 되겠느냐 해서 요즘 정정식 선생님의 아버님이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김재원_ 보충해서 설명드리면 저의 외할아버님께서는 면장시절 일본인의 명령을 어겼었기 때문에, 그리고 조선어학회를 후원하셨던 것이 화근이 되어 두 번에 걸쳐 옥고를 치루셨다고 들었습니다. 외할아버님께서는 가회동의 북촌한옥마을에 처음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외할아버님께서는 늘 저녁진지를 드시고 나면 앉으셔서 구상하시는 게 많으셨고 그것을 가족들과 계속 얘기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한 구상을 기반으로 가회동과 계동에는 중산층 정도의 조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주택으로 동네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다보니 부자만 상대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낙원동주변에 작은 한옥들을 지어 저소득층 조선인 마을이 형성되도록 하셨고, 이 지역에 낙후한 작은 한옥들이 아직 남아있는데 서울시에서 개발하려고 하니까 이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서울대 김경민 교수님이 글을 쓰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작은 집들은 서울시가 10년간 투자하면 북촌 못지않은 곳이 되고 그 작은 집들을 보존해 놓으면 그 부가가치가 훨씬 올라갈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죠. 그 한옥지역은 보존되도록 정책이 수정되었다고 합니다. 저의 외할아버님께서는 그 당시 단순한 집장사꾼이 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로 정말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경성을 개발하고 일본사람들의 세력으로부터 조선의 전통이나 조선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뜻이 컸었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특히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용일_ 이렇게 대단한 공헌을 하셨는데 독립유공자에서 빠져있다니 안타깝습니다. 또한 그러한 가정에서 정 선생님이 자라셨기 때문에 피아노를 하셨겠지요. 정 선생님은 기독교셨나요?
김재원_ 사실 저의 외할아버님은 돌아가신 후에 독립유공자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어머님은 어린 시절에는 가회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또 철저하게 파고드시는 성품이 있으신데 한 회장님과 신학적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잘 모르겠으니 천주교 신부님을 찾아가서 물어보면 어떻겠느냐”는 대답을 들으셨답니다. 그리고 김활란 총장님이 저의 어머님을 계속 길러보시려고 애를 많이 쓰셨던 것 같습니다. 졸업하신 후에 어느 날 갑자기 명동성당에서 “지금 합창단 반주자가 급하게 필요하니 와서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으셨답니다. 그래서 어머님은 도와드릴 테지만 가톨릭신자가 되라는 말만은 말아달라는 당부를 드리고 도와드렸답니다. 그곳에서 점점 가톨릭을 알게 되어 교리에 대한 궁금증도 풀리게 되었고,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시게 된 것입니다. 김활란 총장님께서는 저의 어머님의 개종소식에 매우 섭섭함을 드러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일_ 우리나라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교회에서 성장하며 음악을 했습니다. 정 선생님도 교회에서 성장하면서 음악을 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김재원_ 그건 아니셨습니다.
이용일_ 이상만 선생님은 정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언제이신가요?
이상만_ 1956년에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경기여고에서 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정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인상은 예술가 같지 않고 학자 같았습니다. 여러 가지 여쭤봤더니 교동소학교를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교동소학교는 그 당시 최초의 초등학교거든요. 현재 북촌이라고 하는 가회동, 계동 사람들이 주로 다녔고 명문초등학교였습니다. 또 그 곳은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학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다른 이야기는 못 들었고 아버지가 굉장한 부자라고만 전해 들었습니다. 유학을 갈 적에도 저와 의논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용일_ 그럼 김선자 선생님은 정 선생님을 이화여대에 들어가서 처음 뵌 건가요?
김선자_ 네, 정정식 선생님은 제가 대학교 2학년 1학기에 다닐 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학장선생님이 청음시간에 눈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한 학생이 맨 앞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그 학생을 잘 맡아서 키워보라고 그러셨답니다. 그렇게 해서 정정식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유순희_ 고등학교 때 저를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이 정정식 선생님의 제자이셨는데, 대학입시 전에 저를 정정식 선생님께 소개해 주셨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입시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주의 긴장감을 체험하는 연습을 시켜주셨고, 저도 그 제자 그룹에 합류해서 같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정식 선생님은 그 당시 제자가 아주 많으셨고, 저는 선생님께 오랜 지도를 받지 않았음에도 대학 입학 후 선생님께서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과 1965년에 처음 만났고, 올해 선생님과의 인연을 맺은 지 50년이 되었습니다.
유현진_ 제가 서울예고에 다닐 때 저의 은사님이 김혜자 선생님이십니다. 레슨을 받고 있는데 우연히 정정식 선생님께서 놀러오셨습니다. 같이 비엔나 국립음대를 다니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정식 선생님께서 한 번 쳐보라고 하시고는 어느 학교에 들어가고 싶으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당시 저희는 특정 학교를 정하지 않고 본고사 곡을 여러개 같이 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쭉 제 곡을 들으시더니 이화여대에 들어오면 맞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제가 “선생님 저 들어가게 되면 받아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내가 지금 학과장으로 있는데 너 잘 치면 어떻게 들어와서 보자”이러셨거든요. 정말 합격을 했고 선생님께서는 바쁘신 데도 저를 받아주셔서 6년 동안 잘 배웠지요.
이용일_ 정정식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어떠셨나요?
이상만_ 우리나라의 비엔나 유학의 붐을 일으키신 분이 정 선생님입니다. 제일먼저 그곳에서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정정식 선생님이 가니까 사람들은 비엔나가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뒤에 간 사람이 정진우 선생님입니다. 그 당시 이화여대 출신들은 너무 실기 중점으로 하고 있었고 이론을 중점으로 하시는 분이 별로 안계셨습니다. 정정식 선생님의 선배되시는 민원득 교수님이라고 계셨는데 그 분이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에 대해서 논문을 쓰셨고 그 부분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지원하신 분이 정정식 선생님입니다. 음악을 실기위주로만 하지 않고 이론적인 것을 함께 가르치셨죠. 어떻게 보면 선구자시죠. 음악학자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정정식 선생님이 음악을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깊었습니다. 음악의 역사적, 이론적 측면에서의 교육을 거의 최초로 시도하신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선자_ 정정식 선생님은 연주전반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특별히 강조하신 점은 ‘톤’이었습니다. 악상 표현에 있어서 템포의 변화로써 보다는 톤 칼라의 변화로써가 훨씬 중요한 몫을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모차르트 곡의 연주에서는 “배(과일)를 칼로 자를 때의 느낌”으로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톤이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톤 교육은 우리 제자들 모두가 일생을 통하여 크게 영향을 받은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유순희_ 선생님은 대학 시절 연습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도록 지도해 주신 분입니다. 연습을 통해 테크닉에 자유로울 수 있어야 내면의 음악에 집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즐기면서 연주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지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방학 기간 동안 암보하는 것을 목표로 성실히 연습을 했습니다. 또한 시험곡이나 과제곡에 더하여 몇 개의 곡들을 더 준비하라고 하셨고, 그 중 저에게 맞는 곡을 선택해서 연주하도록 하셨지요.
유현진_ 정정식 선생님은 피아노 교수법을 잘 강의하시는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이 될 때만 해도 피아노 교수법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선생님이 베스틴 시리즈라고 미국피아노교수법 교재의 번역하시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보니까 베스틴 시리즈는 너무나 선풍적인, 인기있는 교재였습니다.“선생님이 이렇게 빠르시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후에 베스틴 저, 정정식 역이라고 되어있는 선생님의 책을 미국에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화로 선생님께 책 나와서 너무 축하드리고, 이 수업을 하게 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에 가서 이 책으로 꼭 할게요라고 말씀드렸지요. 아직도 그 책으로 강의하고 있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정정식 선생님이 피아노 교수법을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용일_ 정 선생님께서 현대음악은 안 하셨나요?
유순희_ 사실 현대음악을 많이 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칼 오르프 음악원에서 수학하신 리듬교육으로 제자들에게 리듬에 대한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정말 다른 분들이 안 하셨던 역할을 하신거죠.
김선자_ 칼 오르프 음악원에서 배우신 리듬교육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신 점은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정식 선생님과 칼 오르프의 리듬교육에 대한 기록은 각종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김재원_ 저의 어머님께 ‘최초’라는 수식어가 적용되는 경우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음악도로서 최초로 비엔나로 공부하러 가셨고, 최고연주자 디플롬도 최초로 취득하셨고, 칼 오르프음악원에 가셔서 리듬교육에 관한 공부를 하고 오셔서 오르프 리듬교육이념도 최초로 도입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상만_ 우리나라가 칼 오르프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입니다. 정 선생님이 칼 오르프 음악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민족적인 의식이 강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 선생님도 철저하게 서양식 교육을 받았지만 민족의식이 강하셔서 칼 오르프뿐만 아니라 코다이, 바르톡에도 관심이 굉장히 많으셨습니다. 또한 한국 사람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데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김재원_ 제가 듣기로는 잘츠부르크의 칼 오르프 음악원에 다니실 때 칼 오르프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리듬교육에서 그들이 제시하는 악기를 꼭 써야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리듬교육에 응용할 수 있는 한국의 악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이 개발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굉장히 인상 깊게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대문, 남대문시장을 돌아다니시면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악기들을 많이 모으셨습니다.
이용일_ 제가 생각할 때 정 선생님은 지적인 분이셨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하셨습니다. 새로 나온 방법을 본인이 강구하시고 또 일일이 얘기 해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조용히 계신 것 같지만 많은 파장을 일으키신 작업을 했다고 봅니다.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상만 선생님 먼저 말씀해주세요.
이상만_ 정 선생님이 피아노 교수지만 음악가들의 정신세계에도 조용하게 영향을 주었고 어떻게 보면 한국 사람의 심성에 맞는 피아노교육을 시켜야겠다는 주장을 하신 분이 정정식 선생님인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바이엘 후에 우리나라의 피아노계에 베스틴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시고 이는 혁명적인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피아노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연 분이죠.
이용일_ 정 선생님은 독주회나 오케스트라 협연은 어떻게 하셨나요.
이상만_ 정 선생님의 첫 독주회를 1963년에 이화여대 중강당에서 들었습니다. 정말 과장하나 없는 진지하고 착실한 우등생이었습니다. 그 때 옆에서 참관하셨던 김영의 선생님이 “정 교수 진국이야”라고 표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김활란 선생님이 참관하셨는데 그 당시 김활란 선생님이 졸업생들 독주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듣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정 선생님이 상당히 조용하지만 파장은 굉장히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그러니까 정정식 선생님은 학생들의 연주를 지도하고 연주가를 만들기보다는 음악이 뭔지 알려주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계적인 피아니스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피아니스트 만드셨죠.
김선자_ 제자들에게는 엄격하고 무서우신 선생님이셨지만 자기의 생각만을 강요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제가 언제인가 모차르트곡을 레슨 받을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번 좀 더 빠른 템포로 연주하기를 원하셨지만 저는 여전히 내 나름대로의 템포로만 치고 있었습니다. 제 감정에 빠져서요. 그 때 선생님은 “네 감정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다. 그대로 치렴.”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용일_ 바로 그것이 우리 피아노 교수들의 안내자로서의 방향입니다. 즉, 가는 길이 맞다 틀리다, 이러한 방법도 있다고 방향제시를 해주는 것이 선생입니다. 학생이 스스로 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줘야 하는데 그런 쪽에서 선생님이 굉장히 자유롭고 표현이 학생의 개성에 맞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유순희_ 선생님은 은퇴 후 2년 동안 일본 청심여자대학교 피아노과에 특임교수로 재직하셨는데, 그 당시 소규모 연주회를 경험하셨던 것이 국내에서도 작은 음악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작은 연주홀이 많지만, 당시에는 연주홀이 많지 않았고 큰 홀에서 연주할 수밖에 없는 부담감도 컸지요. 그 때 선생님은 가족음악회와 같은 작은 음악회를 해보자고 제안하셔서, 제자들이 카페나 볼룸을 빌려 소규모 음악회장을 만들어서 연주했습니다. 무대가 아닌 홀 바닥에 피아노를 놓고 청중과 가까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회여서 서로에게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상만_ 지정된 장소가 아닌 가정이나 사회에 음악을 많이 확산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죠.
김재원_ 어머님께 들었던 말씀으로는 클래식 애호가들이 비싼 돈을 내고 음악회에서 연주를 들을 수도 있지만 클래식음악의 생활화를 위해서는 유럽의 살롱음악회처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김선자_ 1960년대에 이미 작은 음악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용일_ 사실 음악사를 보면 옛날부터 유럽에서는 작은 음악회는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큰 홀부터 만들었지요. 작은 홀부터 시작했어야 하는데 거꾸로 간 거죠.
김재원_ 어머님은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과장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 하셨습니다. 솔직 담백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김선자_ 선생님의 성품처럼 과장이 없는 진지한 음악을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유순희_ 선생님이 60세 되신 해에 선생님의 호“영인”을 따서 “영인회”라는 제자 모임을 만들어 35년 동안 매월 모임을 가졌습니다. 주로 서울에 있는 제자들이 매월 모여서 음악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경조사도 나누고, 친목을 도모하였고, 지방에 있는 제자들 역시 특별한 이벤트나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이 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하셨고, 이 모임을 굉장히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지요.
이용일_ 대단한 제자들이네요.
정리_ 김수현 기자. 사진_ 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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