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6월호
피아니스트 김하경 선생
충정지역 음악문화의 발전에 초석을 닦은
교육자로서 37년간 흔들림 없이 외길을 걸은 피아니스트 김하경 선생(1926. 3. 6. ∼ 1994. 1. 1. )은 충북 청원군 오창 출신으로 청주사범학교와 서울대 음대에서 우에노 안치, 이호섭, 김원복 교수를 사사하면서 모교를 대표하여 다수의 연주회를 가졌으며, 그 중 1955년 기독교 방송(K.Y)주최의 바흐 탄생 기념 연주회와 명동 시공관에서의 불우 청소년을 위한 연주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 바 있다.
또한 국내외에서 실내악 및 반주에도 두각을 나타냄과 동시에 작곡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선생은 민요 「충북 보은 대추타령」, 「충북 찬가」, 「이별의 노래」 등을 창작하였으며, 이러한 활동과 연결된 피아노와의 인연을 쌓았다.
그리고 당시 음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음악교육학과 교수에 이어 청주대 사범대학의 학장직을 맡아 봉직한 김하경 선생은 서울대 음대 등의 출강을 비롯해 한국음악학회 창립 멤버로서 부회장(충청지구), 후에 회장직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일시: 2014년 4월 30일(수) 오후 2시
장소: 청주대학교 사범대 학장실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오동일(전 강원대 교수)
채완병(청주교육대 명예교수)
김태훈(청주대 사범대 교수)
이래근(현 청주대 사범대 학장)
김화숙(현 수원대 음대 학장)
김하경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지금까지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이어져 온 『음악춘추』의 인물탐구는 우리나라 근대 음악사에 소중한 자료로 남을 것입니다. 현제명, 김자경 선생님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클래식 음악인들을 기리며 현재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1세대 음악인들을 재조명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참석해 주신 분들께서는 근대 음악사에 중요한 일을 하셨던 선대 음악인이 이 자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후학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사명감으로 좋은 말씀들을 전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먼저 김하경 선생님의 따님이신 김화숙 선생님께서 부친의 성장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김화숙_ 네. 저희 아버지께서는 다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시고 유년시절을 보내던 중 우연히 피아노를 접하시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연주자의 길을 걷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어릴 적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저희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피아노 앞에 앉아 계셨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새벽까지 연습을 하셨을 정도인데, 피아노 방이 제 옆방이다 보니 사실 저는 아버지께서 연습을 하실 때면 새벽 4시까지 연습을 하시는 통에 불평을 늘어 놓기도 하였지요(웃음). 그만큼 연습을 늘 생활화하시고, 평생 동안 피아노를 사랑하셨습니다.
더불어 저희 자식들에게는 항상 엄격한 아버지이셨지만, 제자들에게만큼은 인자한 스승이셨지요. 그렇게 일생을 피아노와 음악교육, 특히 충청도 음악의 발전을 위해 애쓰시던 중 1994년 1월 1일, 새벽 기도회의 참석을 알리는 어머니의 손길을 끝내 모른 체 하시고 주무시듯 소천하셨고, 자식된 입장에서는 좀 더 우리의 곁에 머물러 주셨더라면 좋았었겠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당신께서 너무도 편안하게 눈을 감으셔서 저 세상에서도 저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시고 있을 것 같아요.
이용일_ 그럼 다른 형제분들이나 가족들 중 음악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이 계시는지요?
김화숙_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많이 계시지만, 유일하게 저희 아버지께서만 음악을 전공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몇몇 자녀들은 음악계에 종사하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역할을 다하며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 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최고의 내조자이셨던 어머니(이영순 여사)와의 사이에 1남 5녀를 두셨는데, 그 중 사위 권흥준(바리톤·그리스도대 교수)과 저의 자매인 김은숙(음악대학 강사 역임), 김미숙(전 음악교사) 등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동일_ 덧붙여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김하경 선생님의 부친께서는 소문난 명필이셨습니다. 현재까지도 청주에 위치한 용화사를 방문해 보면 그분의 친필을 볼 수 있는데요. 이는 당시 스님과의 친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김하경 선생님의 가족분들께는 소중한 유산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용일_ 채완병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김하경 선생님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오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께서 어떻게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에 대해 전해 주시겠습니까?
채완병_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청주사범학교 재학 시절, ‘밤 도깨비’라는 별명을 얻으셨을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아노 연습에 매진하셨습니다. 당시 청주사범학교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딱 1대가 있었는데, 그 피아노를 독점하다시피 하여 한 겨울 추위에도 담요 한 장만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우면서 피아노를 공부하셨다고 해요. 그 때 음악교사로 이호섭 선생님께서 재직하고 계셨기 때문에 아마 그 영향으로 피아노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셨지 않을까 생각되고, 청주사범학교가 6년제였던 것으로 말미암아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때부터 피아노 음악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을까 짐작해 봅니다.
김하경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다음으로 여기 계신 선생님들과 김하경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그럼 오동일 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오동일_ 김하경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돌이켜보면, 제가 1954년에 대학에 입학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으로 기억됩니다. 김 선생님의 첫 인상은 교양 과목 선생님을 연상시키는 단정한 옷매무새의 한복을 입으셨고, 꼭 선비와 같은 모습이셨어요. 우연히 연습실을 지나던 중 피아노를 가르치고 계신 김 선생님을 보고는 “교양 과목이 아닌 피아노과 선생님이셨구나!”라고 알았었지요. 그후로는 쭉 왕래를 갖지 않았다가 청주대에 부임하게 되면서 김하경 선생님과 조우하게 되었고, 김 선생님께서는 저보다 7, 8년 위셨지만 만나면 먼저 악수를 청하시거나 반가운 마음에 포옹도 서슴치 않으셨을 정도로 정이 많으셨습니다.
채완병_ 김하경 선생님과 저와의 인연을 이야기하자면 저희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서울에서 한의원을 하셨던 저희 조부께서는 6·25 전쟁으로 인해 고향인 청주로 돌아와 개업을 하시게 되셨고, 그 때 김하경 선생님의 부모님과는 담도 없는 공동 우물을 함께 사용했던 막역한 옆집 이웃사촌간이셨다고 해요. 여기에 한문관련 분야에 교직을 맡으셨던 김하경 선생님의 부친(아호: 청석(聽石))과 한의원을 하시는 저희 조부께서는 아마 한학으로서 교분을 쌓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저희 조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피란 때 가지고 왔던 약장을 김하경 선생님의 부친께 물려주셨을 만큼 친분이 두터우셨다고 합니다. 이에 더해져 청주사범학교 12회 졸업생인 저와 1회 졸업생인 김하경 선생님은 학교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고요.
이용일_ 그렇다면 김태훈, 이래근 선생님께서는 스승의 첫 인상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김태훈_ 제가 서울대 음대 재학 시절에 김하경 선생님께서 저희 학교에 출강을 하셔서 그 때 처음 뵈었습니다. 그후 공부를 마친 제가 1983년부터 청주대에 부임하면서 김하경 선생님을 모시고 생활하게 되었고요.
이래근_ 제 경우는 김하경 교수님이 1973년도 청주대에 음악교육과를 만드신 후 제가 2회 입학생이 되면서부터 선생님과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학교 정기 연주회가 끝나면 다같이 기분 좋게 술 한 잔을 나눈 뒤 김하경 선생님 댁을 찾아갈 만큼 제자들과 가깝게 지내셨고, 평소에도 종종 선생님을 뵈러 갈 때면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용일_ 김화숙 선생님께서 ‘아버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화숙_ 아버지를 생각하면 음악 소리가 늘 들렸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늘 음악, 피아노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던 제가 태어난 해에는 집에 돈이 없어 아버지께서 당신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게에서 외상으로 숯과 쌀, 미역을 사셨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태어남으로 집안이 점점 일어섰다고 말씀해 주셔서 다행스러우면서도 얼마나 힘들게 음악을 공부하셨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김하경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그간 인물탐구에서 여러 번 소개되었다시피 소위 1세대 음악인이라 일컬어지는 분들 중 특히 기악, 피아노 공부를 하셨던 분들은 공부를 이어 감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학업을 마쳤어도 금새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고, 허허벌판과 다름없던 음악계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음악교육과 연주 활동을 병행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동일_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현제명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중고 피아노 4∼50대를 수입해 오셨었거든요. 그 전에는 피아노가 학교에 한두 대밖에 없었고요. 그렇게 다들 어렵게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화숙_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이면 피아노를 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는 일과를 가볍고 계획성 있게 출발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얼마나 연습을 생활화하셨는지에 대해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면, 저희 부모님 신혼 첫날, 아버지께서 감쪽같이 사라지셔서 저희 어머니께서는 깜짝 놀라셨다고 해요. 그런데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피아노 악보를 한쪽 옆구리에 끼고 나타나서는 너무도 태연하게 “연습하고 오는 길이야.”라고 하셨답니다.
채완병_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실내악에도 흥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노익장을 과시하여 실내악 운동을 펴는 등 연주의 영역을 넓히는데도 힘쓰셨고요. 대표적으로 서울피아노트리오로서 첼로 전봉초, 바이올린의 박민종, 백운창 선생님과 여러 회의 연주를 가지셨지요.
이용일_ 가만히 현실에 안주해 있기보다는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신 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면서도 음악을 통해 인생을 즐기고자 하셨으니 얼마나 고단하셨을까요.
김태훈_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한 번 크게 고생하신 적이 있으셨어요. 학장의 직책을 맡으셔서 여러 가지로 고된 업무를 수행하시던 중 갑작스레 학교에서 쓰러지셨었지요. 다행히도 무사히 치료를 마쳤지만 한동안 건강을 회복함에 있어 고생하셨습니다.
김하경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아무래도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청주대 사범대에 오랜 시간 동안 몸담으셨던 만큼 교육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 짐작되는데요.
이래근_ 네, 맞습니다. 김하경 선생님께서 처음 청주대에 오셨을 때에는 제가 알기론 성악과와 피아노과만이 개설되어 있었는데, 제가 입학하였던 2회 때부터는 관현악과와 작곡 전공을 추가해 입학 정원 또한 늘리셨습니다.
아무래도 김하경 선생님과 저는 전공이 다르다 보니 클래스 강의는 하지 않으셨던 김 선생님의 수업을 수강한 적은 없었지만, 동기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피아노 레슨 때에 연습을 해오지 않았을 시에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하더라고요.
김태훈_ 그랬던 김하경 선생님에게는 또다른 면모도 있으셨어요. 제가 김 선생님의 곁에서 함께 생활했던 터라 몇 가지 일화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제가 레슨 때에 학생들에게 언성이 높아지려 하면 옆방에 계셨던 김하경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김태훈 선생, 잠깐 내 방으로 와봐. 할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가 보면 “자, 이 차 마시고 진정해. 학생들한테 그렇게 다그친다고 해서 금방 실력이 느는 것도 아냐. 천천히 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청년 시절에는 열정으로 가득 차 학생들에게 화도 내고 무섭게 역정을 내기도 하셨겠지만, 연세가 드시면서는 인자하시면서 원숙한 분위기가 있으셨어요.
김화숙_ 또한 저희 자녀들과 제자들에게 자주 해주셨던 말씀이 있는데요. 제가 서울대에 입학했을 당시 아버지께서는 청주대 교수님으로도 계셨었지만 서울대에도 출강을 하셔서 제 친구들이 저희 아버지께 레슨을 받았었지요. 그럴 때면 “연습이 너희를 먹여 살리는데 국내에서 우수한 실력을 가졌다는 학생들이 이렇게 연습들을 게을리 하면 되겠느냐.”며 호되게 야단을 치셨던 것이 새삼 떠오르네요. 또 당신께서는 과거 일본인 선생님께 손가락도 맞아가며 피나는 연습을 했었는데, 요즘의 학생들은 좋은 환경을 가졌음에도 왜 이렇게 안일하게 공부를 하냐며 늘 불만스러워 하셨습니다.
이래근_ 음악을 하는 제자들에게 “약속의 엄수”, “하면 된다”라는 말씀을 평소 입버릇처럼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음악에 혼신을 다한 정열이 투자되어야만이 예술 특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근원적인 김하경 선생님의 교육신념 때문이었지요.
김화숙_ 네. 그리고 한 평생을 두고 배워도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는 말이 있듯, 항상 배운다는 입장에 서는 것이 교육자의 정도라고 말씀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더불어 그러한 의미에서 꾸준한 연습은 최고의 방법이며, 연습만이 자신을 내적으로 성숙시켜 개성이 뚜렷한 음악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이용일_ 과거에도 그렇지만 현재도 마찬가지로 선생님들께서는 흔히 서울 소재 대학교로 자리를 옮기셨었는데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충분히 능력이 되심에도 청주로 발걸음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뿌리인 고향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으셨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김하경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외유내강의 풍모를 지니셨던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모두가 선망하는 서울에서 충분히 교육자로 살아가실 수 있음에도 고향에 정착하여 애쓰신 것으로 보아 충청북도 서양 음악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김하경 선생님께서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동일 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오동일_ 김하경 선생님께서는 음악의 불모지와 같았던 학교에 처음 부임해 오셔서 여러 공을 세우신 것을 비롯해 전국대학 음악교육학과 교수협의회를 조직하고 이후 개편된 한국음악학회장을 역임하기까지 끈질긴 추진력으로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채완병_ 네, 맞습니다. 또한 처음 음악학회가 생기기 이전에는 한강이남 지역에 위치한 각 대학들에 음악과보다도 음악교육학과가 먼저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보니 이에 발맞춰 청주대도 1973년도에 음악교육학과가 개설 되었고, 그 이후로 충남을 비롯해서 전라도, 호남, 영남 등지의 대학들에 음악교육학과가 점차 개설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공통적인 학과 성향이 있으므로 음악교육학회를 만들고자 하여 청주대에서 발족을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회장직도 김하경 선생님께서 맡으시면서 저는 간사로서 일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던 것을 토대로 발전적으로 나아가고자 음악학회로 학회명을 바꾸며 전국단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동일_ 당시 초대 학회 회장은 박민종 선생님이셨으며, 그후부터는 김하경 선생님께서 쭉 이어서 회장직을 수행하셨지요.
이용일_ 사실 음악학회가 이렇게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김하경 선생님과 같은 인격자가 중심에 계셨기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의 친화력과 모든 부분에서 양보하고자 했던 노고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태훈_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청주대에 음악교육학과가 생기면서 청주시향이 창단되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채완병_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청주시향의 모체인 청주관현악단이 1973년에 창단되었습니다. 그 때 김하경 선생님께서 오케스트라의 운영위원장으로, 제가 부위원장으로 업무를 맡았었지요.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케스트라를 키워 가고자 동분서주하셔서 자금조달에 전력을 다하시며 운영위원장으로서 상당한 역할을 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려움이 많았는데요. 오케스트라 창단 초기, 작곡가 김동진 선생님을 객원 지휘자로 모셔 온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립이다 보니 자금이 부족해 운영위원들 몇 사람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김동진 선생님께서 청주에 오시는 날에는 책임지고 왕복 차비, 식사, 숙박 등을 맡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용일_ 결과적으로 김하경 선생님의 대표적인 업적은 청주대에 음악교육과를 개설하셨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청주시향의 시발점에도 함께 하셨다는 것이겠네요.
채완병_ 물론입니다. 그리고 1973년도에 음악교육과가 처음 개설될 때에는 전임교수가 김하경 선생님 딱 한 분이셨고, 전부 강사 선생님으로 운영되던 와중에 2회 입학생부터는 관현악 전공자들을 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졸업 후에 진로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한 의미에서라도 오케스트라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오케스트라를 만드는데 일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청주대 음악교육학과를 운영하시면서 그러한 생각을 하셨던 거군요.
채완병_ 그 당시에는 청주에 관현악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 보니 연주 인력이 매우 부족했었습니다. 주부, 직장인, 학생 등 너나할것없이 연주에 참여했었지요.
이용일_ 그렇다면 이어서 이래근 선생님께서 청주대 재학시절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전해주시겠습니까?
이래근_ 네. 저는 청주대에 오보에 전공으로 입학하였는데, 오보에가 특수 악기이다 보니 강사 선생님이 부족해 호른 선생님께 레슨을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다른 특수 악기들 전부가 한 선생님께 레슨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불만이 쌓여 김하경 선생님께 찾아가 “오보에 전공 학생을 뽑았으면 전공에 맞는 선생님을 배정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으니, 김 선생님께서는 “초창기 때 서울대도 다 그렇게 시작했어.”라고 하시며 저를 다독이셨습니다. 결국 저는 작곡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웃지 못할 해프닝도 여럿 있었습니다.
이용일_ 네, 맞습니다. 서울대 음대도 초창기에는 비올라 이재옥 선생님께서 모든 특수 악기를 레슨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는 관악기 스케일도 몰랐을 때이니 이러한 부분들이 당연하게 느껴졌고, 청주대도 이와 같은 고충을 겪었었군요. 그럼 끝으로 김하경 선생님에 대한 자유로운 추억들을 꺼내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태훈_ 저는 김하경 선생님을 떠올리면 너무나 편하고 인자하신 분으로 기억됩니다. 사랑방처럼 김하경 선생님 댁을 자주 찾아갔던 일들도 생각나고, 채완병 선생님 댁과도 가까우니까 마치 청주 음악인들이 모이는 아지트와 같았었지요. 그리고 학생들을 따스한 스승으로 감싸 안으셨고, 마치 충청도의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으로 청주 음악인들 모두에게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김화숙_ 아버지께서는 청주에서 이 곳 출신의 저희 어머니를 처음 만나셔서 어렵게 데이트하셨던 이야기를 종종 해주셨습니다. 마음속에 청주를 고향으로 일생동안 품으셨던 것 같고, 그러한 청주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어요.
김태훈_ 저희 제자들 모두가 그 때 정말 안타까워했었습니다. 엄동설한의 겨울이었음에도 선생님의 온후한 성품만큼이나 봄날같이 따뜻했던 날, 김하경 선생님을 보내드릴 수 있어서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었지요.
김화숙_ 또한 아버지께서는 특히 딸들한테는 굉장히 엄한 분이셨습니다. 혹시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항상 염려를 하셨지요. 이와 더불어 여대에 출강하시면서도 항상 학생들을 마치 딸과 같이 챙겨주셨는데, 그 덕분에 학생들과의 관계도 너무나 좋으셨고, 학생들이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 교육 때문에 본가가 서울에 있다 보니 청주에는 항상 월요일에 내려가셔서 금요일에 서울에 올라오셨는데, 그럼에도 돌아가시기 전 새벽까지 연습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셨기에 생전 당신께서도 외국에 나가서 오랜 기간 공부를 하면 좋았었겠다고 아쉬움을 보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유학을 결정했을 때 아버지께서 많은 응원을 보내주시고 자랑스러워 해주셔서 감사드렸었습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6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오동일(전 강원대 교수)
채완병(청주교육대 명예교수)
김태훈(청주대 사범대 교수)
김화숙(현 수원대 음대 학장)
이래근(현 청주대 사범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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