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피아니스트 김순열 선생 / 음악춘추 2014년 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4. 4. 10.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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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피아니스트 김순열 선생
진취적인 학구열로 노력한 피아노 음악계의 선각자

 

서울대 음대 출범과 동시에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38년여간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피아니스트 김순열(1920. 8. 2∼2012. 3. 20) 선생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흥 영생고보에서 수학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인의 꿈을 키운 데 이어 동경고등음악학원에서 즈치가와 마사히로 선생을 사사하였다.
1943년에 귀국하여 한국음악협회가 개최한 춘기 대연주회에서 국내 첫 데뷔 연주를 통해 그 실력을 인정받은 선생은 이후 1948년부터 1950년까지 5인 음악회(김원복, 정훈모, 박민종, 김창락, 김순열)를 합심하여 마련한 바 있는데, 당시로서는 학구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음악회로서 연주자들의 기량과 연주의 내용 면에서 신선하고 자극이 되는 무대로 평가받았다.
또한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음악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시간을 가진 선생은 1968년 베토벤 시리즈의 첫 번째 연주회를 열게 되는데, 이는 정년 퇴임까지 베토벤 소나타 32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한국음악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연주 계획으로서 음악에 대한 선생의 마음 자세와 의지를 엿볼 수 있었으나 비록 그의 피아노 아카데미즘은 최종 목표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이는 당시 우리나라 피아노 연주계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1993년 ‘전봉초의 첼로 독주회’에서 반주를 맡은 것을 끝으로 연주 생활을 마친 김순열 선생은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70), 대한민국예술원상(1976), 보관문화훈장(1983), 국민훈장 모란장(1985)을 수여 받은 바 있다.

 

일시: 2014년 1월 14일(화) 오전 10시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주소창(김순열 선생 부인)
       이상만(음악평론가)
       서계숙(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김경숙(김순열 선생 딸)
       한방원(성신여대 음대 교수)
       이은영(이화여대 초빙 교수)
    
김순열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오늘 음악춘추 인물탐구에서는 피아니스트 김순열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저 또한 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곧은 인격에 감동을 받으며 음악인으로서 성장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성품 외에도 여러 공적들이 많을 것으로 짐작되며, 특히 김 선생님을 제일 잘 알고 계시는 사모님께서 직접 발걸음을 해주셔서 더욱 기대가 됩니다. 물론 오늘 김순열 선생님의 업적이 모두 거론되지는 못하겠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좋은 말씀들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먼저 오랜 기간 함께 하신 사모님께서 김순열 선생님의 성장 과정과 음악의 출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주소창_ 저의 시아버지께서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캐나다 선교사들과의 관계가 친밀하다 보니 이를 통해서 음악에 눈을 뜨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김순열 선생님의 형제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혹시 형제분들 중 음악과 관련된  분이 계시는지요?

 

주소창_ 남편의 형제는 8남매이십니다. 목사님의 자제분들이어서인지 음악은 다들 좋아하셨는데 피아노를 전공한 것은 남편뿐이었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따님이신 김경숙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의 음악의 출발에 대해서 알고 계신 바가 있는지요?

 

김경숙_ 그 시대가 음악 공부를 쉽게 허락해 주셨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할아버지께서 의사가 되라고 고집하시는 바람에 저희 아버지께서는 참 힘들게 음악을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피아노를 치우시면 다시 등에 업고 가져다 놓았을 정도로 음악이 너무 하고 싶으셨다고 해요. 하지만 네 분의 고모님들께서 “동생 순열이는 꼭 음악을 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할아버지를 설득시켜 주셔서 결국 그 덕분으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북에 계신 누님들을 못 뵙게 된 것을 참으로 통한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이용일_ 결국은 김순열 선생님의 누님들께서도 음악을 좋아하시면서 음악적인 소양이 있으셨던 것이지요.

 

주소창_ 음악에 심취하시다 보니까 여름에 피아노를 칠 때면 모기가 물어도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에서 유학을 갈 때도 집에서 의대를 가지 않으면 등록금을 내주지 않겠다고 하시니까 당신께서 직접 1년간 등록금을 모아 일본으로 떠나셨을 정도니 그분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말로 다 못할 정도였지요.

 

이용일_ 저 또한 몇십 년간을 집안에서 음악하는 것을 반대하여 힘들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사정으로서는 김순열 선생님의 부모님께서 원하셨던 말씀이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그렇다면 이상만 선생님께서 이를 토대로 덧붙여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만_ 함경남도 원산이라는 지역은 일찍이 기독교가 자리를 잡으면서 캐나다 선교사들이 많이 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역적으로 보아도 함경도에 속하지만 경원선 철도가 들어서면서 서울과의 관계가 밀접하기도 하여 서울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면서 말씨도 서울과 비슷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식이 깨어 있다 보니 그 곳에서 유명 음악가들이 여럿 배출되는데, 특히 이흥렬 선생님께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신 분이 바로 김순열 선생님이셨습니다. 더불어 선생님께서는 성흥 영생고보에서 수학하시면서 본격적인 음악인의 꿈을 키워나가셨는데, 이 학교는 음악 과목의 선생님이 따로 있었던 몇 안 되는 학교 중 하나였었지요.
그리고 다섯 분의 여자 형제가 있으셨는데, 음악을 전공하기 어려운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누님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목사님이셨던 부친께서는 당시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시대였으니 음악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반대를 하셨겠지요.

 

김순열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그렇다면 이번에는 김순열 선생님과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볼까 합니다. 먼저 서계숙 선생님을 비롯한 제자 분들께서 이를 전해 주시지요.

 

서계숙_ 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레슨을 통해 김순열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실 저는 성함만 듣고 여자 선생님인 줄 알았었는데, 초여름에 모시 적삼 한복을 입고 나오시니까 깜짝 놀랐었지요(웃음). 저희 제자들에게 레슨 때면 “곡이 무르익도록 열심히 연습하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는데, 이 밖에도 여러 좋은 말씀들을 전해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방원_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김순열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그 때 아마 기악과장을 하셨던 것 같고, 아직까지도 제게 하늘같은 선생님으로 기억됩니다.
또한 선생님을 떠올리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녹음 장치가 흔치 않았을 당시에 스튜디오 한 켠에 꼭 녹음기를 틀어 놓고 저희가 배우는 곡을 손수 다 녹음을 하셔서 테이프를 만들어 주셨던 일입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서도 본인이 사용할 것들을 일일이 만들기 번거로운데, 학생들이 새롭게 곡을 배울 때마다 그렇게 매번 녹음하여 집으로 돌아가 들으면서 연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절에 이러한 선생님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거든요.

 

이은영_ 네, 맞습니다. 제가 오늘 가장 제일 막내로 참석하였는데, 저 또한 그 모습이 기억에 남거든요. 어떤 한 곡을 공부하게 되면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모아서 녹음해 저희 제자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너무나 좋았고, 더불어 정성스럽게 손수 만드신 녹음 테이프를 받을 때면 선물을 받는 것과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분들보다는 조금 늦게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처음 김순열 선생님을 만나 뵐 수 있었는데요. 굉장히 순수하고 열정적인 레슨을 받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여기에 피아노를 연주함에 있어 보다 입체적으로 넓은 전체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눈을 많이 길러주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이는 여담이긴 하지만 김순열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어떻게 처음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주소창_ 김순애, 김원복 선생님을 통해 남편과는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도 음악, 그 중에서도 노래를 너무나 좋아해서 김순애 선생님께서 합창을 지휘할 때면 앞 열에 세워주실 정도였기 때문에 김순열 선생님과 통하는 부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김순열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이어서 음악평론가로서 이상만 선생님께서는 김순열 선생님의 음악적인 행보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이상만_ 저는 사실 처음 뵙기 이전부터 김 선생님의 성함을 익히 들었었습니다. 해방 직전,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한 유명 피아니스트로 세 분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바로 윤기선, 이인형, 김순열 선생님이셨고, 당시 일본에서도 실기가 우수한 알아주는 피아니스트들이었습니다. 당시 성악 분야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기악 부문은 아무래도 일본보다는 낮게 평가되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이분들의 활약이 빛났지요.
그 바탕에는 김순열 선생님께서 다니셨던 동경고등음악학원에서 당대 독일의 최고 베토벤 해석자로 이름을 날린 아르투르 슈나벨의 제자인 즈치가와 마사히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는데,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김 선생님께서는 아르투르 슈나벨 선생의 전통적인 연주 방법을 한국인 최초로 이어 받은 연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르투르 슈나벨 선생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한 분이다 보니 이러한 영향으로 김순열 선생님께서 베토벤 전곡 시리즈에 도전하게 되신 것이지 않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김원복, 김영애, 이원복, 이흥렬 선생님 등, 여러 1세대 분들을 주축으로 피아노계를 형성해 갔지만 해방 후에는 기교가 뛰어난 훌륭한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 중에서 특히 김순열 선생님께서는 이북에서 내려오신 후 지금 기억으로는 배제학교에서 처음으로 바리톤 이경팔이 부른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반주를 맡으셨고, 그 다음으로 정훈모 선생님의 독일 가곡 반주를 세 차례 이어 나가시게 됩니다. 그 외에도 여러 행보를 통해 김 선생님께서는 반주자로서는 독보적인 연주자가 되셨고, 그 때 박용구 선생님께서는 『음악과 현실』이란 책을 통해 김순열 선생님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김경숙 선생님께서는 아버지를 어떤 분으로 기억하고 계시나요?

 

김경숙_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집으로 제자 분들이 와서 피아노를 치시면 그 음악이 너무 좋아서 옆에서 감상을 하기도 하고 혼자서 연습도 해보기도 하였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런 저를 지켜보시면서 음악을 하라는 말씀은 안 하시더라고요. 그러던 중 제가 학교 대표로 시민회관에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시더니 “네가 진정으로 음악이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렇게 음악이 좋다면 해도 좋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 아버지 밑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저와 다르게 아버지께서는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 딸이 공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셔서 서울대 음대에는 원서를 내지 못하게 하셨고, 더불어 제게 한 번도 레슨을 해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밖에도 종교적으로 믿음이 워낙 강하셔서인지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것을 못 보셨는데, 그 정도가 심할 때는 종종 다른 방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어요. 하지만 결코 당신의 소신을 꺾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서계숙_ 제가 뵈었던 것으로 보아도 김경숙 선생 말씀처럼 조금만 융통성이 있으셨더라면 당신께서 좀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으셨을 텐데도 항상 정해 놓은 원칙에 벗어나면 안 되는 분이셨습니다. 그럴 때면 옆에서 뵙기에 “왜 저렇게 고달프게 사실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요.

 

이용일_ 저는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따님을 신재덕 선생님께 제자로 보낸 것은 아마 당신께서 생각하신 최고의 대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면서도 우회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최선의 정도를 택해 주신 것이라 이해할 수 있지요.
세상이 이렇게 순리적으로만 돌아가 준다면 싸울 일도 없을 터인데, 자기 자신이 다 껴안고 해결하려다 보니까 트러블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김경숙_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사실 어떤 면에서는 불만스럽기도 하고, 당신의 삶을 좀 더 융통성 있게 사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옛날 이야기를 부쩍 자주 하셨던 것들을 들어보면 당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최선의 선택이었고, 그렇게 아버지의 방법대로가 아닌 현실에 타협하면서 다른 의견들이 첨가가 되었다면 많은 후회를 하고 떠나지 않으셨을까 하는 마음에 한결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용일_ 저는 김순열 선생님께 부전공으로 피아노를 배운 인연이 있는데, 평소 뵐 때면 흔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나도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레슨 시에 불필요한 말씀이 한 마디도 없으셨지요.

 

서계숙_ 저희 제자들이 뵙기에도 참 곧게 사셨어요. 그리고 은퇴하시고는 성경책을 깊게 탐독하셨는데, 제게 한 번은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미운 사람이 하나도 없어.”라고 하시더라고요. 참 신앙적으로도 아주 열심히 사신 분이셨습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주소창(김순열 선생 부인)

서계숙(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한방원(성신여대 음대 교수)

김경숙(김순열 선생 딸)

이은영(이화여대 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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