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테너 홍진표 선생 / 음악춘추 2016년 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6. 8. 9. 17:25
300x250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2월호

테너 홍진표 선생


한국성악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테너 홍진표 선생(1927 ~ 1977)은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1955년 5월 18일 해군정훈음악대(海軍政訓音樂隊)의 제30회 연주회, 그리고 11월 비제의‘카르멘’, 1956년 6월 6일 해군교향악단 제38회 공연, 그리고 7월 10일 윤용하 작품발표회, 1957년 5월 6~13일 베르디의 오페라‘춘희’, 11월 27일 베르디의 오페라‘리골레토’, 1958년 2월 14일 윤수철 작곡발표회, 7월 현제명의 창작오페라‘춘향전’, 10월 11 ~ 18일 푸치니의‘토스카’, 그리고 11월 25 ~ 26일 베르디의‘레퀴엠’대연주회에 출연하였다. 1962년 당시 경희대 음악과 조교수였으며 1963년에 국립오페라단의 제2대 단장으로 취임, 그 해 5월 베르디의‘가면무도회’, 1964년 6월 도니체티의‘람메르무어의 루치아’, 1974년 4월 푸치니의‘토스카’, 1975년 11월 마스카니의‘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및 레온카발로의‘팔리아치’공연 등을 연출하였다. 이러하듯이 홍진표 성악가는 테너로서 그리고 오페라의 연출로 활동하면서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온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일시: 2016년 1월 8일(금) 오전 11:00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안형일(서울대 음악대학 명예교수)

      최영섭(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준일(중앙대학교 명예교수)


1. 홍진표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홍진표 선생과의 첫 만남

3. 홍진표 선생의 음악세계

4. 홍진표 선생의 교육관

5. 홍진표 선생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홍진표 선생님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지만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획을 그으신 분이기에 이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홍진표 선생님 하면 아리아를 드라마틱하게 잘 부르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안형일_ 개성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이태리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이용일_ 이태리에서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경희대로 바로 들어가셨나요?  


안형일_ 그렇습니다.


이용일_ 홍진표 선생님이 우리나라에 등단하기 전을 생각해보면 안형일 선생님과는 친구이지만 선생님보다는 홍진표 선생님이 선배였죠?


안형일_ 맞습니다. 나이는 저와 동갑인데 홍진표 선생은 서울대학교 1회 졸업생이고 전 3회 졸업생입니다. 홍진표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목소리가 좋고 미남자였습니다. 저와 함께 오페라‘리골레토’,‘람메르무어의 루치아’,‘카르멘에도 출연했습니다. 고음을 조금 힘들어했지만 굉장히 좋은 소리였습니다. 


이용일_ 김형주 선생님은 언제 처음 뵈었나요?


김형주_ 홍진표 선생이 이태리에 다녀와서 저보고 한 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때가 처음입니다. 지금이야 유학은 일반화가 되어있지만 그때만 해도 유학 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태리에 다녀온다는 것은 굉장히 화젯거리였습니다. 홍진표 선생은 이태리에서 있었던 일, 어떻게 공부했고 이태리의 음악계와 오페라 공연에 많이 출연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귀국독주회에 가기도 했으며 음악회는 빠짐없이 갔습니다. 가창력도 뛰어나서 성악계에서는 상당히 기대가 되는 테너였습니다. 


이용일_ 혹시 이상만 선생님, 홍진표 선생님이 성악을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들으신 적 있나요?


이상만_ 개성에는 유명한 송도중학교가 있었습니다. 송도중학교는 선교사들이 세웠습니다. 거기에서 음악을 잘 가르쳤습니다. 특히 정사인 씨가 브라스 밴드 교사로 있었는데 늘 송도중학교가 전국 브라스 밴드 경연에서 1등을 했습니다. 음악활동이 아주 활발했습니다. 홍진표 선생님은 소학교 다닐 때부터 노래를 잘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저는 해군정훈음악대 때부터 홍진표 선생님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용일_ 안형일 선생님은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뵌 건가요?


안형일_ 네, 저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봤습니다. 서울대에 들어가서 홍진표 선생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나 소리가 좋던지 제가 부러워했지요. 


최영섭_ 일주일이 7일인데 저는 하루도 안 빼고 하루 더 보태서 8일을 만났다고 할 정도로 홍진표 선생님을 자주 만났습니다. 만나면 눈 마주치고 30분 후부터 11시 50분경까지 맥주를 마셨죠. 그만큼 홍진표 선생님이 약주를 즐겼습니다. 홍진표 선생님을 생각하면 우선‘미남테너’,‘미성테너’그리고 다정다감하셨죠. 목소리도 좋았고 오페라의 주연으로 잘 발탁되었죠. 제가 경복중학교 5학년 때 홍진표 선생님을 처음 봤습니다. 그 당시 오현명, 홍진표, 조상현 선배 그리고 6.25 때 볼 수 없게 된 테너 정익하, 그 네 분이 남성사중창단을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학교를 순회하면서 강당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거의 봉사로 학생들의 정서교육에 도움이 되게 하고 싶다고 자발적으로 하셨습니다. 제가 다니던 경복중학교에도 오셨는데 첫 인상은 인물이 훤하고 느릿느릿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연주의 메인 레퍼토리는‘새벽 동산 너머로’라는 곡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유독 홍진표 선생님의 목소리가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홍진표 선생님은 초등학교의 교원생활을 잠시 했고 후에 서울음악전문학교로 가셨습니다. 또한 음악가 중에서 영어를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도 영어를 꽤 하는데 깜짝 놀랐었습니다. 

그리고 집안이 어려워서 요즘말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습니다. 훗날 부인의 어머니인 국악인 김정연 씨는 딸 하나 공부를 잘 시키려고 선생님을 찾던 중 홍진표 선생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홍진표 선생님을 가정교사를 모셨죠. 좋은 방을 내주고 하루에 1시간이나 1시간 반 정도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김정연 씨는 딸의 가정교사가 아니라 사위로 삼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고 김정연 씨의 노력으로 딸은 홍진표 선생님이 서울음악전문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결혼했고 두 자녀를 두었죠.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총각으로 알았을 정도로 인물도 좋고 다정다감하고 목소리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이용일_ 그리고 홍진표 선생님이 약주를 많이 즐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최영섭_ 그렇습니다. 홍진표 선생님은 육류를 좋아하고 식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와 식성이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강화도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생선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맥주 안주로도 따로 따로 주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태리에 계실 때부터 당뇨가 있으셨는데 의사가“술을 많이 즐긴다면 조금 줄이십시오”라고 말했지만 좋지 않은 맥주와 고기안주를 먹으니까 당뇨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래도 병원에 열심히 다녀서 병세를 유지했습니다. 

1977년 4월 봄, 그때는 홍진표 선생님의 집이 홍익대학교 옆에 있는 창전동에 있었습니다. 경희대 교수로도 지냈기에 경제적으로도 아주 윤택한 삶과 집에도 야마하 피아노를 놓고 잘 사셨습니다. 아무리 집이 좋고 그 당시에 잘 살았어도 겨울에 난방은 연탄이었습니다. 어느 날 일이 일어났습니다. 참모가 새 연탄으로 갈고 70%밖에 타지 않은 연탄은 더 타면 아침에 버리려고 부엌에 놓았는데 아침까지 잔겁니다. 그래서 타다 남은 연탄가스가 집안 여기저기 봄바람에 퍼졌죠. 아침이 되니 온 식구가 어지럽다고 말하니까 홍진표 선생님은 연탄가스 마신 것 같으니 김칫국 마시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나서 괜찮다고 볼일을 보시는데 홍진표 선생님은 합병증이 온 거에요. 일어나시지 못하고 그 길로 고려병원에 가셨습니다. 응급치료를 하는데 당뇨병으로 합병증이 오는 것은 나을 거라고 의사가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렵다고 합니다. 홍진표 선생님은“연탄가스를 좀 마셨는데 이렇게 병원까지 오게 되었다”면서 수첩을 꺼내 학생들의 레슨 날짜를 변경하며 적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며칠 후에 다시 올 테니 퇴원해서 맥주한잔 합시다”라고 말했는데 집에 가서 3~4시간 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홍진표 선생님이 세상을 급히 떠났다고요. 


이용일_ 이준일 교수도 모셨는데 이준일 교수의 전공은 성악이 아니지만 전공자 못지않게 성악을 하시는 분입니다. 첫 만남이 언제이신지요?


이준일_ 지금의 정독도서관자리는 6.25 당시 미군 통신부대에서 사용하였습니다. 후에 학교가 되어 음악실도 만들었죠. 학교에서 노래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아마추어로 노래를 부르다가 이러지 말고 서울음대를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한 친구가 홍진표 선생님을 소개받았고 그 길로 함께 갔습니다. 그때가 1957년이었습니다. 노래를 해보라고 하는데 노래가 엉망진창이죠. 하지만 홍진표 선생님은 자상하게 이태리에서 벨칸토라는 창법이 있는데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게 계속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까 “너는 아마추어로 노래를 할거냐 음대를 갈 거냐”고 물으셨죠. 그래서 저는 음대에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럼“음대 나와서 무엇을 할거냐”고 물으셨죠.“오페라 가수가 되어 있겠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노래를 부르라고 하시더니 오페라 가수는 포기하고 가곡을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오페라 가수가 되지 않으려면 뭐하러 노래를 배우나요”라고 말씀드렸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까지 배우다가 과를 바꿔서 서울대를 들어갔습니다. 요새 제가 아마추어로 노래를 다시 시작했는데 그때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배운 걸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이용일_ 이준일 선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도 악기가 좋아서 짱짱한 소리가 납니다. 


이상만_ 홍진표 선생님의 인기가 최정상이었습니다. 제2시대의 성악가 테너로서 제일 앞에서 많이 뽑혔습니다. 그 당시 성악가의 위치는 지금의 대중가요 성악가보다도 훨씬 더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때의 사회는 대중가요 가수들이 사회의 1면에 나와서 활동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성적이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는 테너 가수들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20년 동안은 가장 화려하게 사셨죠.


김형주_ 홍진표 선생은 1950대 후반과 1960년대, 1970년대에 활동한 사항을 보면 우리나라 성악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페라 무대에서 많은 활동도 하셨는데 성격은 제가 보기에 그렇게 개방적이지 않고 내성적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틱은 아니지만 서정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고운 노래를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음악계로서도 좋은 인물을 잃었다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상만_ 경희대학교에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는 점도 큰 업적입니다. 교육자로서 보람 있는 삶을 지내셨죠.


이용일_ 저는 홍진표 선생님한테 시창청음을 배웠습니다. 몸에 힘을 빼면 굉장히 좋은 소리니까 성악을 해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상만_ 홍진표 선생님이 포용력이 없지 않냐는 말이 있었는데 없지는 않았습니다. 홍진표 선생님은 개성사람입니다. 개성 사람들은 정확하고 차가워 보이고 계산이 정확합니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대인관계를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최영섭_ 투병생활을 하면서 교수생활을 할 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료나 후배 성악가들을 그렇게 부러워했습니다. 그 공허감을 메꾸기 위해 약주를 그렇게 많이 하셨죠.


이용일_ 홍진표 선생님이 독일가곡은 별로 안 좋아하셨나요?


이준일_ 제가 독일가곡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만 2년을 레슨 받았는데 독일가곡을 레슨하시는 것은 못 봤습니다.


최영섭_ 홍진표 선생님이 제자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제가 속으로 저건 참 좋다라고 생각한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성악가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주로 서양의 음악으로 레슨 합니다. 그런데 홍진표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두 곡을 과제로 내주면 한 곡은 외국곡, 한 곡은 한국가곡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레슨 할 때 제가 옆에 방에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피아노 반주는 누가 하는지 궁금했는데 본인이 친 거였습니다. 제가 피아노도 꽤나 했는데 깜짝 놀랐었죠. 다른 사람이 와서 반주를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피아노 잘 치는 것과 영어 잘하는 것, 제자들에게 외국곡, 한국곡을 함께 가르치는 점을 좋게 봤습니다. 


정리_김수현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안형일(서울대 음악대학 명예교수)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최영섭(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이준일(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