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첼리스트 원용성 선생 / 음악춘추 2013년 9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10. 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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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9월호

첼리스트 원용성 선생
다양한 활동 펼치며 한국 첼로계 발전에 헌신

 

서울대 음대에서 수학하고, 오스트리아 모차르테움 국제하계대학과 독일 함부르크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첼리스트 원용성 선생(1929. 12. 20∼2009. 6. 10)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첼로 수석과 동아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연주자 겸 교육자로 국내 첼로계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이강열, 김인수, Antonio Janigro, Gerhard Stenzel 선생을 사사하면서 음악의 길을 걷게 된 원용성 선생은 1962·1968·1984년 서울시장 공로표창장을 받았으며, 수도여사대 음악과 및 연세대 한양대 중앙대 이화여대 경희대 음대 등을 비롯하여 서울예고, 숙명여고 교단에 서오면서 후학 양성에 열정을 쏟았다.
동아음악콩쿠르 심사위원과 한국음악협회 이사 직을 맡아 활약하기도 한 선생은 2003년에는 한국원로교향악단을 창단하여 수석단원으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쳤으며, 병마를 얻게 됨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하면서 ‘불멸의 음악인’이라는 칭호를 받은 바 있다.

 

일시: 2013년 8월 8일(목) 10시 30분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백운창(전 숙명여대 음대 교수)
     이종영(전 경희대 음대 교수)
     원형중(이화여대 사회체육학과 교수, SBS골프 해설위원)
     홍성은(단국대 음대 교수)

 

원용성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음악춘추 9월호 인물탐구 난에서는 첼리스트 원용성 선생님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사실 원 선생님을 추모하는 자리를 이전부터 마련하고 싶었는데, 마침 백운창 선생님께서 원용성 선생님의 가족 분들과 연결을 시켜 주시고, 첼로계를 대표할 만한 두 분의 선생님들께서 선뜻 참여해 주신다는 말씀에 늦게나마 이렇게 용기를 내어 오늘의 자리를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원용성 선생님에 관한 좋은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아드님이신 원형중 선생님께서 먼저 부친의 성장과정 및 어린 시절 기억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원형중_ 네. 제가 할머니께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드리자면, 아버지께서는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셨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갑작스런 환경 변화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음악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할아버지께서 여러 취미활동을 접하게 해주신 덕분인데, 바이올린을 먼저 배우셨지만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첼로에 마음을 뺏기게 되어 시작하게 되셨고, 아마도 턱이 아프기 때문에 바꾸기로 결정하셨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이용일_ 그 시절에 취미로 음악을 배우셨다는 것이 흥미로운데요.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원형중_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황해도의 만석꾼이셨기 때문에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계셨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의 형제는 7남매이셨는데, 그 중에서 음악을 하신 분은 아버지뿐이었고요.

 

이용일_ 당시의 만석꾼이라면 넉넉한 환경 덕분에 바이올린과 같은 신문화에 두루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여유가 있으니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셨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렇다면 원형중 선생님은 부친께서 어느 분을 사사하셨는지 아시는지요?

 

원형중_ 그에 대해서 아버지께 정확히 전해 들은 바는 없지만, 함께 첼로를 하셨던 저희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이강열 선생님께 처음 첼로를 배우셨다고 하고, 김인수, Antonio Janigro, Gerhard Stenzel 선생님 등에게 가르침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종영_ 원용성 선생님께서 만석꾼의 아드님이셨던 것은 저도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강하시면서 때묻지 않은 깨끗하신 분이었죠.

 

원용성 선생님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제가 기억하는 원용성 선생님께서는 양반 중에 양반이셨고, 한마디로 지조가 강한 분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종영 선생님께서는 원 선생님과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셨나요?

 

이종영_ 네. 저는 어렸을 때 원 선생님께 첼로를 배웠습니다. 제가 11살 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으니 벌써 55년 전 이야기네요. 당시 원 선생님께서는 저를 예뻐하셨는지 야단을 치시고 나서 제가 울고 있으면 금방 달래주셨을 정도로 제게 많은 애정을 주셨고, 다른 분들께 제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제가 사모님보다도 먼저 원용성 선생님을 뵈었기 때문에 두 분이 연애하실 때 함께 만남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제 음악인생에도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 바로 원 선생님이신데요. 여러 오페라나 서울시향의 공연을 자주 관람하면서 첼리스트의 인생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렸을 때부터 모두 지켜보며 꿈을 키워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_ 그럼 백운창 선생님께서는 원용성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백운창_ 저는 서울시향에 입단하면서 처음 원 선생님과 만나게 되었지요. 그 때가 1960년대 초인데, 그 후에도 쭉 각별한 동료이자 벗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이용일_ 그렇군요. 홍성은 선생님께서도 원 선생님과의 추억을 말씀해 주시지요.

 

홍성은_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때는 1971년이에요. 앞서 말씀하신 이종영 선생님과 같은 11살,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약 4년을 선생님께 첼로를 배웠는데요. 선생님은 따뜻하고 참 정이 많으셨고 제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이, 선생님께서 잘츠부르크에 잠시 공부를 하러 가셨었는데, 그때 얼마간에 빚을 지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쓰시던 악기를 제게 팔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그 때 선생님께서 친히 악기를 저희 자동차에 실어 주시면서 “이 놈아 열심히 해야 돼”라고 하시며 눈시울을 적시셨던 모습입니다.

 

이용일_ 당신의 전부였던 악기를 팔아야 했으니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지만, 좋은 연주자에게로 갔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셨을 것입니다.
원용성 선생님께서는 표현에 인색하며 묵직하신 분이셨는데요. 원형중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아버지를 어떠한 분으로 기억하시나요?

 

원형중_ 저희 3형제에게는 매우 엄격한 아버지이셨습니다. 아들만 셋이었기 때문에 아마 강하게 키우려 하셨겠지만, 그 내면에는 따뜻함이 숨어 있었던 것 같고, 이번 추모 좌담회를 위해 아버지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며 저희 형제 모두가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용일_ 원용성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음악가께서 자식들에게 음악을 안 시키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을까요?

 

원형중_ 물론 당신께서 열정을 가지고 공부하신 학문이었지만, 음악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생각에 제가 뒤늦게 작곡과로 진학하고 싶다는 뜻을 말씀드려도 단칼에 반대하셨습니다.
“취미는 좋지만 전공은 안 된다.”라고 자식들에게 못 박으셨지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유학을 가셨던 기간 동안 잠깐이나마 첼로를 배웠었습니다.

 

원용성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아무래도 생계를 위함이 아니라 보다 여유로운 환경에서 첼로를 시작하게 되셨으니, 그 음악이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생각되는데요. 

 

이종영_ 네, 맞습니다. 음악적으로 대단한 역량을 가지고 계신 연주자였지요.

 

이용일_ 오늘 참석하신 분들께서는 원용성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셨나요?

 

이종영_ 저는 원 선생님과 친분이 깊었기에 당신께서 읽으셨던 일본 서적을 저에게 자주 설명해 주셨고, 또 선생님의 음악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옆에서 지켜 본 원 선생님은 음악의 느낌과 프레이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원형중_ 제가 보기에 아버지께서는 누구에게든지 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당신의 자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 레슨을 하지 않으실 때면 꾸준히 연습하시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백운창_ 그래서인지 오케스트라의 수석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으셨지요.

 

이용일_ 주위에서 뺏으려하면 할수록 더욱 공부에 정진하셔서 음악의 발전을 도모하였으니, 경쟁사회에서 살아나고자 하심이 훗날 이렇게 좋은 결실을 맺지 않았나 보여집니다.

 

원형중_ 점차 연세가 드시면서 제게 자주 하셨던 말씀이,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마음속으로 “인생의 후반기인 지금까지 온통 음악에 대한 생각뿐이시구나.”라고 느꼈고, 원로 교향악단이 창단된 후에는 더욱 열정을 갖고 임하셨습니다.

 

원용성 선생님의 교육관

 

이용일_ 저와 이따금씩 마주칠 때면 다른 말씀 없이 잘 되어 가느냐는 한 마디뿐이었지만, 선생님의 그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요. 제자들에게는 이보다 더욱 각별하게 말씀을 전하셨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이종영_ 원용성 선생님께서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분이었어요. 사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제자가 콩쿠르에서 입상하도록 무대 뒤에서 정치를 하곤 하잖아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풍토를 지켜보면서 매우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홍성은_ 저는 원용성 선생님께 어린 나이에 배울 수 있는 레퍼토리를 거의 모두 가르침 받았습니다. 솔직히 선생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요. 그 시절의 제 연주 테이프를 들어보면 선생님께서 정석대로 잘 가르쳐 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요즘은 개성 있는 연주를 많이 추구하는 편인데, 원 선생님께서는 누가 들어도 거부감 없는, 그러한 음악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마치 교과서처럼이요.
그리고 콩쿠르에 관한 말씀을 듣자니 한 가지 일화가 생각이 나는데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화·경향 콩쿠르에 참가했을 적 일 입니다. 당시 초등부의 첼로 파트 참가자가 두 명이었고, 둘 다 원 선생님의 제자였어요. 마침 심사위원도 두 명밖에 없었고, 당시에는 심사위원이 참가자를 보지 못하도록 막을 가리고 무대 뒤에서 심사를 했었지요. 그런데 콩쿠르 진행자가 첼로 튜닝을 무대 뒤에 계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악기를 맡기자 선생님 말씀이 “맨 처음 홍성은이 첼로가 들어오고, 두 번째로 경미 첼로 들어오고…(웃음), 둘 다 내 제자인데 내가 어떻게 심사를 해?”라고 하셔서 결국 한 분의 점수로 등수를 매기게 되었대요(웃음). 그 정도로 공정하시면서 늘 정도를 걸으시는 분이셨기에 원용성 선생님의 음악 역시도 깔끔하셨습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9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백운창(전 숙명여대 음대 교수)

 이종영(전 경희대 음대 교수)

홍성은(단국대 음대 교수)

원형중(이화여대 사회체육학과 교수, SBS골프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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