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8월호
작곡가 박찬석 선생
반세기 앞선 음악적 삶을 영위한 클래식계의 만능 엔터테이너
생전에 한국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애쓴 작곡가 박찬석 선생(1922. 3. 23 ∼ 2009. 7. 30)은 전북 진안 출생으로 전주사범학교, 경희대 음대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 특허대학에서 명예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초·중·고교 교사를 거쳐 서울교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선화예술학교 및 계원예고 초빙교수, 서울 총신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한 한국음악협회 초대 총무이사, 서울음악교육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 및 상임고문, 한국작곡가협회 이사 및 부회장, 한국음악평론가협회 부회장, 한국음악학회 이사, 한국작곡가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한 박찬석 선생은 한국에 콩쿠르가 거의 전무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전국 틴에이져 피아노 콩쿠르를 창립, 선구자로서의 사명감으로 매년 단일 피아노 콩쿠르를 개최함으로써 전문성을 높이는 한편, 바람직한 콩쿠르 문화를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더불어 선생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인 녹조근정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문화상 금상 등을 수상한 바 있고, 1948년 작곡집 『완춘』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조국 산하』(1980), 『임의 노래』(1981), 『박찬석 작품 전집』(1992)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저서로는 『새로운 무용음악』(1960), 『음악교육』(1966), 『올바른 피아노 교육』(1981), 『피아노 교수학』(1987), 『대학 음악교육』(1992) 등이 있다.
일시: 2013년 7월 10일(수) 10시 30분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형주(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회장)
최영섭(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전인평(중앙대 명예교수)
정영자(전 중앙대 음대 학장)
박경우(한국창작오페라단 음악감독 겸 지휘자)
박찬석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작곡가 박찬석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지 손대면 안 되는 일이 없었던 말 그대로 이 시대의 ‘풍운아’이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러한 자리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훌륭한 패널 분들이 참석해주셔서 기쁘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먼저 김형주 선생님께서 박찬석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어떠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김형주_ 저는 1960년대 후반에 월간음악과 관련된 작업을 시작하면서 박찬석 선생님을 만나 알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박 선생님과는 공적인 일도 함께 하였지만, 오랜 세월 동안 동료로서, 또 벗으로서 교류를 가져왔지요.
이용일_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드님이신 박경우 선생님께서 부친의 성장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경우_ 일찍이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를 대신해 홀로 아버지를 키우셨던 할머니와 주변 친인척들께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로는 흔히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처럼 지방에서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수재(秀才)로 인정받았으며, 당시 입학이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던 사범학교에 입학하셨고 이후 음악 교육에 대한 당신의 열정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용일_ 부친의 형제분들 중에는 음악과 관련이 깊은 분들이 있으셨나요?
박경우_ 저희 부친의 형제관계로는 고모와 작은아버지가 계시는데요. 특별히 음악에 관련된 분들은 없었지만, 작은아버지께서는 저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주사범(전주교대의 전신)을 졸업하시고, 교직에 몸담으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성장기에 풍족하지 않은 가정환경과 사회상도 녹록치 않은 당시의 상황이었음에도 저희 부친께서는 음악이란 학문에 입문하신 이래 한결같이 음악계에서 활동 해오셨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계에서 활동하시다 또 다른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음대 피아노과를 지원하려는 생각을 가지셨으나, 당시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수준이 아버지에 비해 턱없이 못 미치는 상황으로 판단하셔서 입학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셨다고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후일에서야 비로소 판단과 결정을 잘못하셨던 한 사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 경희대(당시 신흥대학) 작곡과에 1회로 입학하셔서 어렵게 일본에서 작곡 관련 서적들을 구하고 탐독하시며 거의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셨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형주_ 박찬석 선생님께서는 전주에서 학교를 나오신 후에도 주로 전주에서 많이 활동을 하셨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도 전주로 돌아가 그 곳의 상급학교에서 근무를 하셨으니 전주를 각별히 생각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박 선생님께서는 전주공고를 시작으로 군산여고, 전주사범을 거치셨는데, 그 당시 전주사범은 꽤 명문학교였으며, 그 곳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초창기는 주로 전북, 즉 전주를 중심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왕성한 연주와 교육활동을 펼치심으로써 지역 음악계에서 인정받으셨습니다.
이용일_ 최영섭 선생님께서는 박찬석 선생님과 어떻게 처음 인연을 쌓게 되셨나요?
최영섭_ 동아방송이 개국하면서 제가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전속으로 맡게 되어 주로 활동하던 인천을 떠나 1963년에 서울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래저래 10년 정도 정신없이 생활하다 보니 음악인들과 교류를 가질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서울 생활에 적응해 나가면서 박찬석 선생님께 1970년대 초에 인사를 드리게 된 것을 시작으로 친목을 쌓게 되었지요.
처음 뵈었을 때는 풍채가 워낙 좋으시고 건장하셔서 실제로는 저보다 연세가 두 살 정도 위시지만 마치 선생님 같은 느낌을 받아서 항상 제가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정중히 드렸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박찬석 선생님 하면 풍채로부터 느껴지는 것이 ‘음악을 하는 신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겨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웬만큼 더운 날씨에도 나비넥타이는 꼭 하시는 등 용모가 바른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남자들은 바쁘다보면 자기 주변을 대충대충 하기 마련인데, 누구보다 바쁘셨던 박찬석 선생님의 외출하실 때 모습은 언제 뵈어도 마치 결혼식장에 발을 들여놓는 신랑처럼 깔끔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알고 지내게 된 것은 박찬석 선생님께서 한국작곡가협회의 부회장으로 계시고 제가 총무담당을 맡으면서부터였는데, 당시 유명무실했던 한국작곡가협회를 어떻게든 살리자는 취지로 자주 상의를 하면서 술자리를 가지곤 하였습니다.
이용일_ 전인평 선생님께서는 박찬석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전인평_ 저는 박찬석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1974년으로 기억하는데요. 더욱이 저희 안사람이 서울교대를 나왔기 때문에 그 관계가 각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 선생님께서는 초·중·고교 교사, 사범학교·교육대학 교수까지 차근차근 올라 가셔서 활동하신 걸 보면 참으로 입지전적 인물이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늘 박 선생님을 옆에서 뵈어 오면서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어떻게 주위에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일을 안 맡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이용일_ 제가 듣기로 정영자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박찬석 선생님의 제자이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영자_ 네, 맞습니다. 저는 박찬석 선생님께서 한때 몸담으셨던 무학여고를 졸업했는데요. 음악 선생님으로 부임해 오신 선생님을 통해 음악수업을 받았고, 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과목 특성상 음악대학도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그렇게 활성화시키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무학여고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박찬석 선생님을 모르는 출신들이 없을 정도로 얼마나 음악을 잘 활성화시키셨는지 몰라요.
항상 학생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해주셨고, 진취적으로 밀어주시면서 제자들의 실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저렇게까지 하실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긍정적이시고 열심이신 분이었지요.
덕분에 무학여고는 음악적으로 상당히 부각이 되었을 정도였고, 선생님의 퇴근 시간이 언제인지를 모를 만큼 음악실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당신께서 직접 창단하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통해 악기가 뭔지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펴 주셨습니다.
박찬석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박찬석 선생님께서는 카리스마가 대단하셔서 꼼짝없이 그분의 기에 눌려 말씀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일들이 아직도 제 추억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 선생님의 측근이셨던 최영섭, 김형주 선생님께서는 그분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영섭_ 가곡의 창작 정신으로 말하자면 박찬석 선생님만큼 애착을 갖고 한국가곡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분이 없었던 것 같아요.
또한 그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여러 공적을 보더라도 음악을 통한 교육활동이 가장 깊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당신의 일생을 교육계에서 주로 보내셨기 때문에 교육을 통한 음악의 공헌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형주_ 네, 맞습니다. 그리고 허물없이 동료로 지내면서 느낀 것이 참 곧으면서 직선적인 사람이었어요. 제가 오죽하면 너무 빼지 말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웃음). 또한 깨끗하면서 요령을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더불어 악의가 없는 솔직하고 정직한 양반의 품성을 지닌 음악가였습니다.
이용일_ 전인평 선생님께서는 박찬석 선생님과 작품 활동을 함께 하셨지요?
전인평_ 네. 한국작곡가회에 참여하면서부터 박 선생님과 자주 교류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돌아가시기 1, 2년 전쯤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서 받아보니 연구실 정리를 해야 하니 와서 필요한 책이 있거든 가져가라 하셔서 책을 10묶음 정도 제가 가져온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선생님의 연구실에는 작곡에 관한 책은 물론이고 피아노 교습, 음악사, 음향학, 또 국악에 관련된 책까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저는 “박 선생님의 음악적인 관심사가 굉장히 다양하시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국악에 관련된 것만 해도 값이 꽤 나가는 큰 전집을 비롯해 골동품으로 여겨질 만한 매우 중요한 자료들도 많이 소장하고 계셨고, 그 밖에 레코드와 전집, 민요집, 더불어 일본 서적까지 갖고 계셔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 서적으로 매우 희귀한 『음악음향학』과 『동양음악연구』는 동양음악 연구의 선구자인 다나베 히사오의 서적으로, 이 책을 소장하고 계신 것에 가장 놀라웠습니다.
더불어 박 선생님은 생전에 민요풍이나 한국적인 분위기의 곡을 많이 작곡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풍년가」와 같은 곡은 사람들에게 많이 불려졌고, 지금까지 국악계 사람들은 그 곡을 다시 편곡하여 부르곤 합니다. 이러한 한국적인 선율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음악적인 다양한 관심사,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용일_ 어떻게 갑자기 전인평 선생님한테 그러한 귀한 책들을 주셔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
박경우_ 저희 아버지의 평소 신념을 토대로 생각했을 때 가족관계나 부자지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보다 서적의 실질적인 활용도와 가치를 염두에 두시고 결정하신 부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소장하셨던 책들이 주로 일본 원서였기 때문에 그 자료들을 자식에게 물려 주는 것보다는 잘 활용할 수 있으면서 진정으로 그 자료들을 필요로 하는 분에게 줘야겠다 생각하셔서 전인평 선생님께 물려주신 것 같습니다.
전인평_ 한번은 박 선생님께 일본원서를 빌려 복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제게 일본 책을 볼 줄 아느냐고 물으셨던 적이 있었고, 그 일이 마음속에 남으셨던 모양입니다. 어찌 되었든 돌아가시기 전 주위에 많은 지인들 중 저에게 이 책을 주시려고 생각한 그 마음이 가슴 뭉클하고 부모님과 같은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이용일_ 사실 전인평 선생님께서 박 선생님과 이런 인연이 있으셨는지 모르고 해주실 이야기가 많지 않으실 줄로 알았는데, 진정한 추억을 간직하고 계셨네요.
그렇다면 정영자 선생님께서는 제자로서 박찬석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영자_ 박 선생님께서는 피아노 곡을 비롯해 오페레타나 어린이 창작곡도 많이 쓰셨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가곡을 가장 많이 작곡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박 선생님과의 인연이 더 깊었던 것 같고요.
또한 저는 학생 때부터 박 선생님의 보살핌 아래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박찬석 선생님께서 부임해 오시면서 이미 성악을 시작했던 학생이기 이전에 제자로서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며, 당신의 작품을 저한테 100% 내주셨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큰아드님이신 용우 씨의 반주에 맞춰 제가 4시간 동안 박 선생님의 작품을 전부 노래했던 적도 있었고, 당신께서 쓰신 그 느낌을 저한테 그대로 전달해주시고자 자주 가르침을 주셨는데, 제 나름의 표현력이 그분의 뜻과 코드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박찬석 선생님의 곡은 제가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표현하기 어려웠던 부분도 있었지만 토속적이면서도 곡 자체가 서정적이고 자연을 그리는 부드러운 노래들이 많아서 제 마음에 와닿았고, 가사는 김소월 선생님의 시를 주로 사용하셨지요. 시의 뜻을 작품에서 잘 표현해 주시기도 하였고요.
또 제가 박찬석 선생님의 곡을 부를 때면 박 선생님께서는 제게 표현력이 아주 뛰어나다며 칭찬해 주셨고, 제가 어린 나이였음에도 선생님의 작곡발표회에 찬조출연을 시켜 주셨습니다.
박경우_ 저희 아버지의 여러 곡 중에서도 「낙엽」하면 정영자 선생님, 「풍년가」하면 테너 신영조 선생님의 연주가 단연 압권입니다. 물론 정영자 선생님께서는 저희 부친의 거의 모든 곡을 연주하고 녹음하셨습니다. 또한 과거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가을 맞이 가곡의 밤에서 여러 작곡가의 대표작 한 곡만을 연주하는 연주회여서 앙코르를 받을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커튼콜로 인해 유일하게 신영조 선생님께서 「풍년가」를 두 번 불렀던 적도 있었고요.
김형주_ 박찬석 선생님의 업적 중 음악 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음악단체를 통한 사회활동입니다. 박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단체에 관여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에 음악협회 초대 총무이사를 맡게 되면서부터라고 기억하는데요.
1973년 7월 28일 한국작곡가협회가 처음으로 조직되면서 금수현, 김동진, 나운영, 박태현, 이요섭, 박찬석 선생님들께서 초대 멤버로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박경우_ 저희 부친께서는 한국 음악계가 태동할 무렵, 음악단체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일찍이 1963년에 서울음악교육회를 창립하신 이래 전국적 규모의 교사연수, 국내 및 해외공연, 음악 세미나 등의 다각적인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또한 서울리틀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당시에 쳄버 공연도 직접 기획 및 지휘하셨고, 영화음악의 녹음작업도 하셨을 만큼 장르를 가리지 않으셨지요. 하지만 저희 아버지처럼 다방면으로 활동하다 보면 혹자는 “저분은 전공이 뭐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음악이란 줄기에서 뻗어난 지체와도 같은 연관성 있는 제각기 다른 활동영역을 통해 아버지만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음악세계를 확립 나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주활동을 비롯한 교육·창작·언론 등 영역을 제한하지 않고 다각적인 활동을 펼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리_이은정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8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최영섭(한국작곡가회 명예회장)
김형주(한국음악평론가협의회 회장)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전인평(중앙대 명예교수)
정영자(전 중앙대 음대 학장)
박경우(한국창작오페라단 음악감독 겸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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