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작곡가 김용진(金容桭) 선생 / 음악춘추 2016년 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1. 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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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한국적인 것의 현대적인 표현을 추구하신 작곡가 김용진(金容桭) 선생


작곡가 김용진(1930년 대전출생)은 대전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와 동대학원 졸업 후, 미국 동일리노이 대학교 대학원과 만하탄 음악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25년 간 재직(1970-1995)하였으며 재직 중에는 펜실바니아 주립대학 교류교수(1984-1985)와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1991-1993)하였다. 그는 관현악곡 11편을 비롯하여 실내악곡 19편, 성악곡 3편, 국악곡 3편 등을 국내·외의 음악제에서 발표하였으며, 6편의 학술 논문과 6편의 저서를 발표하여 창작음악의 이론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그가 추구한‘한국적인 것의 현대적인 표현’과‘청중과 공감하는 현대음악’의 사상은 한국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창악회(創樂會)의 제3대 회장으로 재임 시(1978-1986) 작품발표회를 활성화하여 연2회의 정기발표를 갖는 한편, 창작음반 제작을 시작하여 우리 창작음악의 보급과 보존에 힘썼으며, 작곡 콩쿠르를 시작하여 신인발굴의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의 초기 구상과 기획을 골격으로 1989년에 창립된 <작곡동인 소리목>은 현재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동안 30회가 넘는 작품발표회를 통하여 200곡 이상의 다양한 장르의 창작곡을 발표하였으며 10회의 CD출판(70 여곡 수록)을 통하여 창작음악의 보급과 보존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작곡가협회 이사장 재임 시(1995-1997)「광복50주년기념 대한민국 작곡대제전」을 개최하여 반세기 우리 현대음악을 정리하는 역사성 높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재임 시(1997-2000) 침체되었던 <서울음악제>를 활성화시키는 한편「한민족창작음악축전」을 시작하여 국내 최대의 창작축제로 정착시켰으며 대한민국 작곡상(1981),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9) 그리고 서울특별시 문화상(2003)을 수상하였다.


일시: 2016년 2월 11일(목) 오전 11시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최승준(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작곡과) 명예교수)
      허영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교수)
      임영미(작곡가)
      김범기(경상대학교 교수)
      이현주(KC대학교 교수)
  
1. 김용진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김용진 선생과의 첫 만남
3. 김용진 선생의 음악세계
4. 김용진 선생의 교육관
5. 김용진 선생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이제까지의 대담은 음악사를 쓰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후세에 도움이 되도록 좋은 말씀들이 남겨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용진 선생님의 성장과 출발에 대하여 최승준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주세요.


최승준_ 김용진 선생님께서는 대전에서 출생하시어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셨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나중에 사회 각계에서 많이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학교 다니시는 도중에 6.25가 나서 입대를 하셨는데 군악대에서 클라리넷을 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참전용사로 인정이 되어 돌아가신 다음에도 국립묘지(이천 호국원)에 안장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시고 미국에 가시기 전에 휘문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미국유학 가실 준비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용일_ 선생님이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알고계신가요?


이현주_ 뚜렷한 동기를 들은 것은 아닙니다. 음악에 관심이 있으셨고 시골에서 레슨을 받으려고 서울로 올라오신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용일_ 선생님과 첫 만남은 대게 학교에 들어가서겠네요?


임영미_ 다른 선생님의 소개로 입시 때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최승준_ 저는 학교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이용일_ 김용진 선생님의 위 아래로 강력한 선배와 후배가 있었습니다.


최승준_ 저도 선생님께 그런 말씀을 가끔 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너무 힘드신 일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용일_ 김용진 선생님이 선비시니까 작품도 선비스럽게 나왔지요.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어떠셨나요?


이현주_ 제가 김용진 선생님께 배울 때만 해도 김용진 선생님께서는 연세가 있으셨을 때였습니다. 선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부터 제자들한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들었는데 제가 배울 때 1년 동안은 저희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1학년 때 열심히 배우고 2학년이 되었는데 선생님이 처음으로 제 이름을 기억해주셨어요. 그 때 너무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항상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셔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찾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처음에 만나 뵈었을 때에는 차가우시고 어려웠습니다. 말씀이 별로 없으셨지만 던져주시는 말씀이 참 배려하시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이용일_ 교수는 서제스트지 티칭이 아닙니다. 제대로 작품을 가르치셨다고 봅니다.


최승준_ 이 선생님은 첫 만남이 차가웠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김용진 선생님께 작곡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먼 산을 보시면서 한 학기 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걸리고 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열심히 했었지요. 나중에 들어보니 김용진 선생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이용일_ 저 같은 경우에는 갑자기 김 선생님이“밥 먹으러 갈까”그러셨죠. 그래서 같이 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평소에 만나면“오셨소?”그 뿐이지 그 외에는 말씀이 없으셨죠.


임영미_ 저희가 레슨을 받으러 선생님의 방에 3~4명이 같이 들어갔었는데 하루는 레슨 받고 모두 일어나서 나가려하니까“벌써 가려고? 이야기라도 하지”라고 말씀하셔서 엉거주춤 앉았었습니다. 저희는 선생님이 어려워서 공부 외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무 긴장해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고 정적이 흐르니까 선생님도 정적이 힘드셨는지“할 이야기 없나? 다들 가보지”그러셨습니다. 선생님은 작품 공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이야기를 잘 할 줄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연락을 받고 갔었는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곡 써”였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씀입니다.


김범기_ 제가 입학할 때 김용진 선생님께서는 학장을 하고 계셨고 그 당시 입시부정이 있어서 힘들어 하실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너무 바쁘셔서 레슨을 잘 못 받았습니다. 1년이 지나서 제가 2학년 때 선생님께서 은퇴하시기 1~2년 전부터는 제자들에게 잘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을 집으로 부르셔서 식사도 같이 하고,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김용진 선생님께서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마음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제 느낌에는 선생님께서는 온화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도 굉장히 많이 해주시고요.


이용일_ 김용진 선생님은 상대방이 말을 걸어야 말을 하시고 필요한 말이 없으면 대화를 잘 안하셨죠. 제자들이 외롭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승준_ 연세가 드시면서 부드러워지신 것 같습니다. 처음 학교에 오셨을 때 5년 정도는 매우 엄격하게 하셨죠.


허영한_ 학교에서 어렵게 뵙다가 연초에 동기들끼리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자녀분들이 굉장히 어릴 때였습니다. 아이들하고 대화하고 계시는 모습은 제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선생님한테 저런 면도 있으시구나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최승준_ 선생님께서는 결혼이 늦으셔서 자녀 사랑이 극진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결혼식에 참석한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사람인데, 이남수 선생님이 사회를 보시고 주례는 한심석 총장이 보셨죠.


영미_ 김용진 선생님께서는 저희가 학교 다닐 때 공부 외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하신적이 없으셨습니다. 김용진 선생님께서 필라델피아에 계실 때 저도 필라델피아에 있어서 찾아뵈었는데 제가 졸업생이니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시더라고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때 들었습니다.


이용일_ 미국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의 교수 영향이 클 겁니다. 이현주 선생님은 김용진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셨나요?


이현주_ 합리성을 추구하시면서도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선생님께 배운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 당시는 음열주의 음악 등 합리적이고 엄격한 체계에 의해 곡을 써야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음악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골격만 엄격한 음열을 사용하시고 장식적인 음들에서는 자유롭게 사용하신 선생님 작품의 예도 들어 주셨습니다.  바르톡, 드뷔시, 스트라빈스키에 대해서 처음에 많이 소개해주셨고, 미국에 다녀오시고 난 후에는 조지 크롬에 대해서, 열려있는 음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엄격한 규칙 위에 작곡가는 항상 마음을 여는 음악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김범기_ 선생님의 작품목록을 보면 두 글자인 제목이 많습니다. 수상, 비가, 단가, 노래 등 3분의 2가 넘습니다. 작품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으시고 함축적인 것을 많이 쓰셨고 제자를 대하시는 태도도 그러셨죠. 이러한 점이 어디서 왔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가톨릭의 암묵적이고 묵시적인, 기독교적인 선생님의 신앙이 그런 바탕이 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곡을 표현 할 때에도 깨끗하고 간결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셨는데 70년대, 80년대 아방가르드의 음악이 한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을 때에는 다른 목소리를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시로 끝나는 제목도 많았습니다. 선생님의 생활, 음악과 가톨릭을 한 카테고리로 묶어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임영미_ 음열을 추구하셨던 분들은 대부분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기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화성학도 선생님께 탄탄하게 배우고 그래서 미국에 가서도 기본이 될 수 있었고 현대음악에서도 기본적인 하모니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쿼르텟(Quartet) 이상이 되면 모든 기본은 사실 하모니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모던 하모니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배우고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허영한_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낀 점은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대부분 제자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런 점은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공부하신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에서 추상적인 측면, 절대음악에 대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계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작품해설도 다른 선생님들에 비해서 굉장히 모호하고 구체적인 것을 제시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김범기 선생님이 이야기 했듯이 어떻게 보면 시적인 측면도 중요하게 생각하시지 않으셨나...


최승준_ 그 당시에는(선생님의 귀국직후) 선생님이 작품 하나를 발표하시면 센세이션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비브라토를 넓게 하는 연주법입니다. 지금은 흔히 사용하는 연주기법이지만 당시에는“저렇게 하는 것도 있네?”라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해주시는 분이셨죠. 서양악기로 우리의 것을 표현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선두주자셨습니다. 작품을 보면 실험적이고 규칙은 있으되 융통성 있게, 얽매이지 않고 활용하는 그런 요소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허영한_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스타일을 학생한테 주입시키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작곡을 하다 보니 김용진 선생님의 작곡스타일이 오히려 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선생님은 음색 작곡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선생님의 대표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최승준_ 관현악법으로는“요음“, 실내악으로는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음색을 이룬‘클라리넷을 위한 3개의 단편’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용일_ 김용진 선생님의 작품에는 김용진 선생님의 스타일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김범기_ 1980년에 만드신 소리목이라는 단체가 있는데 2015년에도 정기연주회를 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도 연주했는데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놀랐었습니다. 16분음표 오스티나토를 쓰셨더라고요. 그 당시에 사람들도 놀랐죠. 그 당시의 작품을 요즘에 연주하니까 지금의 스타일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음색을 찾고 있는 이 시대에 선생님의 작품이 오히려 더 호소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작품들에서 공감이 되고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선생님이 선구자적인 생각이 있으시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죠. 그 당시에는 연주가 힘들어 마이너스 요소였지만 후대에 와서는 오히려 연주가 더 많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닌가...


임영미_ 12음열로 곡을 많이 썼었는데 특히 전음열이라는 게 1950년에 시작하여 10년간 유행하고 끝났거든요. 끝난 거를 저희는 70~80년대에 막 열심히 하고 있었던 거죠. 외국에서는 70년대 이후로 네오 로맨티시즘 혹은 네오 바로크, 네오 토날리티로 옛것을 다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이미 받아들여서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우리 1세대 작곡가들은 어떻게 음악을 공부 했는고니 일본의 음악예술이라는 잡지의 부록에 현대음악이 나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그 잡지로 공부를 했죠. 한국에 들어오는 음악에 대한 정보는 일본에서 온 것뿐이었으니까요. 김용진 선생님도 안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임영미_ 저에게 있어서 선생님의 좋은 점은 선생님은 항상 제가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뭔가를 지적하고 싶으실 때에는“이렇게도 좋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이렇게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최승준_ 1989년에 소리목이라는 작곡동인이 생겨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초기 몇 년 동안은 프로그램 서두에 김용진 선생님이 인사말씀을 쓰셨는데 워드 세대가 아니어서 백지에 써서 저에게 주시는데 그걸 정리하다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한국적인 것의 현대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새로운 음악을 발표할 때에도 항상 당시의 청중들과 새로운 음악을 같이 즐겨 왔듯이“동시대 청중과 같이 느낄 수 있는 현대음악”을 해보자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셨습니다.


이용일_ 김용진 선생님은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어떻게 보면 약간 냉정하다고 보일 수도 있는 것 같은데...


임영미_ 제가 고3 때 입시를 앞두고 있었는데 긴장을 많이 해서 위장병이 난거에요. 그래서 선생님이 시험 보러 갈 때에는 입시라고 특별한 음식 먹지 말라고 음식주의까지 주셨습니다. 차갑지 않으시고 따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현주_ 또한 선생님께서는 학장으로 계시면서 음대 교수님들이 입시 레슨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시면서도 여러 입장들 사이에서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이용일_ 김용진 선생님이 자발적으로 하신 건가요?


최승준_ 음대 교수 회의에서 이렇게 하자라고 결정 난 게 아니고 거의 독단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선포를 하시니까 연주파트 교수님들에게서 불만이 많았었죠.


이용일_ 선생님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과감하게 교수가 개인레슨을 못하게 하시고요. 그것은 개인연수를 하라는 거였죠?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혁명을 하신 분이죠.


김범기_ 서울대 입시 부정이 났을 때 음대를 폐쇄하겠다고 했을 때 자부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써서라도 음대를 살리고 싶으셨던 거지요.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그것을 회의를 통해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그때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죠. 제가 보기에는 다른 정책이 나올 수 없는 필연적인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우리가 과거의 방법대로 음악을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곡가들이 과거에 하던 방법으로 작곡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합니다. 김용진 선생님은 대세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요즘 연주되면 좋았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작품들이 연주될 수 있도록 소개한다면 작곡계가 바로 가지 않을까요? 다른 말씀 있으신가요?


최승준_ 정년하고도 한국작곡가협회의 이사장으로 계시고 교육적으로 보면 이러한 부분들이 항상 활성화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창악회 콩쿠르도 만들어서 신인발굴도 하려 하시고 오래전이지만 자료 같은 게 부족하니까 입상자들의 작품도 출판하여 보급도 하시고요. 그리고 창작음악을 LP로 제작하여 보급, 보존하는 일도 시작하셨지요.


허영한_ 음악교육 쪽에도 많이 기여하셨죠.


정리_김수현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3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허영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음악학과 교수)


최승준(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작곡과) 명예교수)


임영미(작곡가)

김범기(경상대학교 교수)


이현주(KC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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