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이강염 사장(국민음악연구회) / 음악춘추 2015년 11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6. 8. 9. 14:40

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1월호

우리나라 음악계의 출판 개척자 

이강염 사장(국민음악연구회)


이강염 사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 출판인으로 일제에서 해방된 우리민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음악출판을 한 대단한 인물이다. 1955년 우리나라의 경제여건이 아주 어려울 때 국민음악연구회(國民音樂?究會)가 어렵게 간행한 ‘음악(音樂)’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그러나 음악도들에게 필수적인‘세계명곡해설대사전’(이강염, 1981), ‘세계음악대전집’(이강염, 1962), ‘훌륭한 음악가’(이강염, 1961), ‘중등음악교본1’(이강염, 1963), ‘명곡이야기’(이강염, 1961), ‘음악의 발자취’(이강염, 1961), ‘세계음악사’(이강염, 1959), ‘국악기해설’(김용진, 1976), ‘고등음악통론’(김형근, 1957), ‘한국음악연구’(이혜구, 1957), ‘초등화석학’(박태준, 1958), ‘세계음악사’(이병두, 1973), ‘국악감상’(성경린, 1976), ‘국악사’(이성천, 1976) 등을 저술하고 간행한 대단한 업적을 남기신 음악전문 출판인이었다. 


일시: 2015년 10월 16일(금) 오전 10:30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용일_오늘은 우리나라 음악의 발전에 정말 큰 공을 세운 이강염 선생을 기리는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구두회 선생님께서 나오시기로 하셨는데 못 나오셨습니다. 이강염선생께서는 국민음악연구회라는 출판사를 창립하시고 음악잡지까지 출판하신 어려운 작업을 하셨습니다. 벌써했어야 하는데 가족과의 연락, 자료수집이 어려워 지금까지 미뤄오다가 지금 이렇게 좌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출생, 학력,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리하고 다음 후학들이 정리하게 넘겨주는 것도 보람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민음악연구회에 대해서 이강염 선생의 개인에 대해서보다는 국민음악연구회라는 단체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김형주_저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음악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드릴 것이 있습니다. 출판에 관한 관심이 우리 음악계에서는 희박합니다. 출판은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음악인들도 출판에 대한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출판이라는 것은 결국 음악사적으로 본론은 아니지만 본론에 변화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선 생각한 것이 악보 없이 어떻게 음악을 할 수 있냐는 겁니다. 악보도 출판입니다. 서양음악사를 연구해 보더라도 출판사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브라이트코프 출판사 같은 경우도 엄연히 음악사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출판이 안 되면 음악을 할 수 없습니다. 음악사의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도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출판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 이제까지 음악계가 이 수준까지 올라오고 발전한데는 출판 그리고 악기제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분야가 없었으면 음악의 발전을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한국음악사에 출판과 악기제작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음악사에 한 분야를 맡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국민음악연구회는 그런 차원에서는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았냐는 전제조건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국민음악연구회는 해방 후에 ‘최초의 음악출판사’입니다. 역할이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이용일_혹시 국민음악연구회가 처음 생겼을 때 우리나라의 사회상이 어땠나요. 필요성이 있었을 텐데 이강염 선생이 아니었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상만_해방 직후에 우리나라 음악출판의 주도적인 역할은 최성두라는 분이 했습니다. 1930년대에 악보출판도 했는데 당시는 악보출판을 거의 일본하고 계약을 했습니다. 그래도 최성두씨는 우리나라의 현제명, 안기영의 작품들을 출판했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최성두씨가 출판보다는 레코드출판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이강염 선생이 나타났습니다. 이강염 선생은 원래 일제시대 정판사라는 출판사 출신이었습니다. 이강염 선생이 우리나라 소위 지식층에 있는 그런 분들과 교류를 하면서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음악출판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서울출신이고 집안도 좋고 상당히 높은 차원에서 출판을 시작하였고 대단히 중요한 것은‘국민음악’이라는 용어를 이강염 선생이 만들어서 한국적인 국민의식 이런 것들을 고취시켰다는 부분이 상당히 음악사에서는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근대의 음악문화가 아무래도 음악가들 중심으로 형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음악주변에 음악을 에워싸고 있는 출판, 방송, 악기제조 이러한 산업들은 뒤로 물러났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음악하는 분들은 관심이 없지만 출판이라는 언론분야에 대해서 상당히 심층적으로 다루는 그런 경향이 생기게 되었는데 어쨌든 이 대담회는 그런 의미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강염 선생은 그 당시에 우리나라 명사급에 들었습니다. 국민음악연구회의 장소는 효자동에서 처음 시작이 되었는데 지금은 무궁화동산이라고 하는 공원같은 것을 조성했죠. 그곳은 전차 종점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서 시작은 상당한 요지에서 출발하였고 그 당시에는 국민음악이 유일한 우리나라 출판사로써 존재하게 되었죠. 시간은 짧지만 2년 동안 ‘음악’이라는 잡지를 발행해서 그 잡지가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음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여러 가지로 다양한 출판을 했지만 특히 피아노의 교본 바이엘과 체르니를 최초로 출판하여 바이엘, 체르니의 시대를 연 곳이 국민음악연구회입니다. 장사가 안 되고 활기 있게 발전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을 때인데 그런 환경에서라도 굳이 했다는 거 이것은 보통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음악계의 발전을 큰 공헌을 했다는 거죠.


김형주_이강염 선생은 음악출판계의 선각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런 환경에서 음악출판을 하겠다고 나선 것, 이것은 하나의 선각자적인 책임이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상업적으로 남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유독 음악출판을 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은 선각자적인 개척정신, 그것이 근본이 아니었나... 지금 생각해봐도 하나의 모험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이 분은 처음에 바이엘, 체르니라는 일본에서 나온 책을 대게 복사했습니다. 지금은 저작권 때문에 어림없지만 그 당시에는 저작권이 없었습니다. 악기의 기초적인 교본부터 시작했습니다. 


이용일_당시의 우리나라 음악교과서 출판사는 몇 개였습니까?


김형주_국민음악연구회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용일_결국 교과서는 출판사에게 대단한 수입원입니다. 아마 국민음악연구회가 유지된 것은 음악교과서 때문인 것 같습니다. 


김형주_현대음악출판사의 심성태씨가 국민음악연구회에 전무로 있었고 음악춘추의 노병남씨는 기자로 있었습니다. 심성태씨가 전무로 있다가 사임을 하고 시작한 것이 현대음악출판사고 노병남씨가 시작한 것이 음악춘추사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초가 국민음악연구회입니다. 


이용일_심성태씨가 차에 교과서를 싣고 학교를 방문해 교과서를 팔았다고 들었습니다.


김형주_교과서는 국민음악연구회 밖에 없었습니다. 6.25 때문에 수송도 전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민음악연구회에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었고 출판사는 여기 하나였습니다. 심성태씨가 미군들이 폐차한 지프차를 끌고 교과서를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갖다 줬습니다. 


이용일_요즘 세상적인걸로 말하면 대단한 거죠. 교과서는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반면 어렵게 교과서를 제작하셨겠지만 좋은 수입원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위험한 음악전문 서적출판에 재투자하신 점은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형주_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순천에서 수지여고음악교사를 할 때인데 일 때문에 서울로 다닐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국민음악연구회에 꼭 들렸습니다. 이강염 선생이 인간적으로 인간미가 있다 할까요. 그런 정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강염 선생이 본인 집에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효자동 근처에 사택이 있었습니다. 같이 가서 식사도 대접받고 여러 차례 그렇게 했습니다. 이강염 선생은 상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용일_이강염 선생의 학력은 알 수 없나요.


이상만_상당한 대학은 안 나왔지만 상당한 학력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그 분이 왜 음악을 택했을까요. 왜 음악을 출판하게 되었을까요.


이상만_관심이 많았고 이강염 선생에게 두 딸 이병춘, 이병옥 그리고 두 아들 이병두씨와 차남이 있습니다. 두 딸과 이병두씨가 서울대 음대 출신입니다. 현제명씨하고도 교분이 있었고 그래서 아마 젊었을 때 아마추어로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이강염 선생의 사위 중에 한명이 서명석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KBS의 최고가는 인기 아나운서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보면 상류층의 생활을 누리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잡지는 2년 하다가 그만뒀지만 잡지에서 상당히 하고 싶은 일들을 잡지를 통해 표출했다고 봅니다. 특히 잡지 중에서 기억에 나는 게 장사분씨가 잡지에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군악대 이야기를 연재했습니다. 장사분씨가 동성음악이라는 책을 쓸 적에 거기에 연재되어있는 글들을 정리하여 출판하게 되었죠. 상당히 우리나라 근대적인 역사를 조금 발굴하는데 관심을 많이 두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용일_이강염 선생이 음악을 전공하신 것 같습니다. 음악의 발자취, 세계음악사 등 많은 책을 썼지요.


김형주_원래 음악을 많이 알아요. 그만큼 젊었을 때에도 음악을 가까이 했고 그런 차원에서 음악출판을 시작한거지만 출판으로써 크게 성공한 쪽은 아닙니다. 장남 이병두씨는 아버지의 사업에 대해서 전혀 터치를 안 했습니다. 생각이 없다하여 차남에게 인계했습니다. 차남이 인계를 받아 하면서 피아노 사업에 손을 댔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출판자체도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문을 닫은 겁니다. 이강염 선생은 음악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그 후에 60년대 들어와서 잡지를 또 시작했습니다. 음악세계라는 제호로 음악월간지를 냈습니다. 사무실도 없고 개인적으로 운영을 했습니다. 한 2~3년 계속 했습니다.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도 음악세계라는 잡지를 이끌어갔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지속적으로 잡지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끈기 있게 음악잡지를 이끌어 갔다는 점은 음악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안 됩니다.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이용일_아쉬운 것은 국민음악연구회가 잘 운영되었다면 튼튼한 음악기업으로 남았을 텐데요. 


이상만_그런 것들이 아쉬운 점인데 말년에는 상당히 고생을 하시고 출판 사업에서 돈을 잃은 건 아니고 저서도 있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세계음악사는 자기가 직접 썼다기 보다는 번역에 가까운 저서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역사를 정리하겠다는 역사의식을 가졌다는 점 굉장히 중요하죠.  


이용일_사실 국민음악연구회에서 만든 음악사전 있잖아요. 굉장히 큰 업적입니다. 일본책을 번역했지만 그것은 엄청난 사업이지 돈벌이와 상관없는 역작입니다. 


김형주_그렇게 집착력 있게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음악출판을 이어가고 의리 굳은 그런 것을 볼 때 한국음악사에 남을 만한 업적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상만_음악출판의 큰 기둥이죠. 


이용일_제가 볼 때는 국민음악연구회가 시대를 감지 못하고 변화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상만_이강염 선생이 있을 때에는 나름대로 시대상황에 맞도록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변신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창업자들은 변신하기가 힘들죠. 


이용일_지금 기억에 남을 만한 출판된 책들이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_김수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1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