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음악평론가 운천(韻泉) 한상우 선생 / 음악춘추 2012년 3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2. 29. 14:27

 

음악춘추 기획대담 / 3월호

한국음악계의 새로운 풍토 조성한
음악평론가 운천(韻泉) 한상우 선생(韓相宇, 1938년 8월 27일∼2005년 8월 18일)

 

고전음악 해설 방송 프로그램 진행, 일간지와 음악 전문지 평론 기고 등을 통해 고전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함은 물론 현장성을 갖춘 정확하고 날카로운 필력으로 한국 클래식 음악사에 큰 몫을 담당한 한상우 선생은 1938년 8월 27일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거쳐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 무학여자중학교와 경기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1972년부터 MBC FM에서 14년간 고전음악 담당 제작위원으로 일했다.
1971년부터는 고전음악 평론가로, 1984년 MBC를 떠난 뒤에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음악과장, 월간 《음악춘추》 편집위원,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세종문화회관 이사, 예술의전당 자문위원, 국립극장 운영 심의위원, 국제음악제 운영위원, 광화문 문화포럼 운영위원, KBS 교향악단 운영위원, 88 서울올림픽 문화예술 자문위원, 한국바그너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한상우 선생의 가곡 작품으로는 「10월」, 「가을」, 「물사발」 등, 기악작품으로는 「현악4중주 다장조」, 「피아노를 위한 스케치」, 「더블베이스를 위한 소품」 등이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음악》, 《북한 음악의 실상과 허상》, 《선율, 온 영혼의 불꽃》, 《한국 오페라 50년사》,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 《루빈스타인 자서전》(역서)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제1회 예술평론가상(1980), 한국음악상(1994),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8), 허행초상(2003)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일시: 2012년 2월 7일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백병동(작곡가,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이만방(작곡가, (사)한국작곡과협회 이사장(前))  
      양재무(이마에스트리 대표, 서울예고 미래발전부장)
      김재은(앙상블 예무스 단장, 서울예고 교사)

 

한상우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한상우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몇 해가 흘렀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그 동안 간직했던 한상우 선생님과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그분의 업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상우 선생님의 성장과정을 먼저 이상만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상만_ 한상우 선생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 후기에 총융사(總戎使) 어영대장 공조판서를 지내시고 갑신정변 때 나이 사십에 순절하신 충숙공(忠肅公) 한규직 옹이 증조부이시고, 포대장 장위사(壯衛使) 찬정(贊政)을 지내신 한규설 옹이 작은 증조부, 그리고 부친은 충북 제천중학교를 설립하고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한승렬 씨로 명망있는 가문의 자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 광산 개발에 손을 대었고, 이 일이 잘못되어 하루아침에 살던 집까지 날리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지만, 한상우 선생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음악 속에 마음을 담아 틈만 나면 교회에 가서 오르간을 치며 악보 보는 법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커스단이 들어오면 막간에 나가 하모니카를 부는 등 음악적인 ‘끼’를 발휘하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전 경성여자상업학교)는 증조부이신 한규설 옹의 아드님이신 한양호 선생님이 세운 학교여서 서울여상에 계신 분들과도 두터운 친분이 있었고, 한상우 선생의 형님 되시는 한상준 씨는 한때 한양대 총장으로 계셨습니다.
한상우 선생은 워낙 명망있는 가문에서 엄격하게 자라셔서 그런지 늘 올곧은 성품과 겸손함이 몸에 배여 있었지만, 반면에 자존심이 강하고, 또 어떻게 보면 매우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음악뿐만 아니라 특히 문학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김재은_ 제가 한상우 선생님의 사모님이신 신승애 선생님께 들은 바로는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집에 있던 유성기를 통해 처음 음악을 접하셨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입학해서는 노래도 부르고, 오르간과 하모니카를 연주하셨다고 합니다. 한상우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를 나오신 후 일찍부터 유치원 선생님을 하셨고, 음악과 노래, 그리고 하모니카 부는 것에 소질이 있으셨기 때문에 한상우 선생님이 음악을 하시는 데에 있어서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당시 서울에 소재하던 중앙중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하셨지만, 부친의 뜻에 따라 고향인 제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로 진학하셨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는 브라스 밴드 지휘도 하셨다는데, 어린시절부터 음악적 소양을 길러오신 것 같습니다.

 

한상우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한상우 선생님의 가문은 제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명망있는 가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음악을 접하셨고, 역경도 겪으셨지만 끝까지 한 길을 걸어오신 것은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상우 선생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상만_ 저는 한상우 선생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 처음 만났습니다. 한상우 선생은 조금 말발이 세고 적극적이어서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상우 선생과 교분을 나누진 않았지만, 후에 서로 방송일을 하면서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방송국에서 독일어 강좌를 담당하던 한우근이라는 여성과 친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상우 선생의 누이동생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 다음부터 더욱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백병동_ 한상우 선생은 저의 2년 후배입니다. 대학시절에는 우등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고 기억되고, 제가 군대를 갔다와서 복학한 후에 한상우 선생을 만났을 때는 전과는 달리 상당히 말발이 세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더라고요. 그 시절에는 사회운동이 일어 대학의 교수들도 진보와 보수 두 성향으로 나뉘었고, 학생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상우 선생은 진보성향을 띤, 운동권에 속해 있는 학생이었고 데모에 참여하기도 했었지요. 
그 후로 제가 서울여상에서 교사로 있었는데요. 앞에서 이상만 선생님도 말씀하셨다시피 한상우 선생의 증조부 한규설 옹의 아드님이신 한양호 선생님이 서울여상을 설립하시고, 또 그의 아드님이신 한학수 선생님이 뒤를 이어 교장 직을 맡고 계셨지요. 그 때문에 계속적으로 교류를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박용구 선생님이 회장으로 계시던 ‘음악팬클럽’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었지요. 당시 ‘음악팬클럽’에는 김영태(시인), 최정호, 이상만, 강석희, 한상우 선생 등이 회원으로 있었습니다.
그 때의 한상우 선생은 음악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고, 평소 학교 다닐 때 직설화법을 구사한 것으로 봐서는 신랄한 비평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들과는 달리 호평이든, 악평이든 상대방을 자극하기보다는 배려하는 평론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만방_ 저는 한상우 선생님과는 7년 정도 차이가 나는 후배인지라 늘 먼발치에서만 뵈었습니다. 저희가 학교 다닐 당시에는 음악교사를 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았고, 더구나 시골에서는 음악선생님을 전혀 뵐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소도시에서는 한두 분 정도 계셨기 때문에 그 선생님들이 누구인지 다 알지 않습니까? 그렇게 음악을 전공하고도 나아갈 길이 변변치 않던 시절, 졸업한 선배님들 중에 직장을 가지고 계신 분이 어떤 분들인지 알아보던 중 한상우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후에는 선생님께서 1972년부터 시작하신 FM 라디오방송을 들으면서 선생님의 해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진행하시는 음악방송을 듣고 매료되었던 것이, 당시 음악방송에서는 진행자가 음악과 상관없는 이야기, 주변 이야기, 혹은 음악과 상관이 있어도 정설이 아닌 이야기들을 주로 많이 했었는데, 선생님이 진행하실 때는 전혀 다른 방식이어서 ‘이제야 음악방송이 제대로 방향을 잡아가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셨지요. 그런데 한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뵈었던 일이 있었는데, 〈음악팬클럽〉의 회장이셨던 박용구 선생님께서 저희 집 근처에 사셨고, 모임이 있을 때면 여러 선생님들께서 박용구 선생님의 댁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분들 중에서도 한상우 선생님이 가장 나이가 적으셔서 후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습니다.

 

김재은_ 저는 1981년 서울예고에 부임하였습니다. 그 시절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성가 경연대회를 개최하였는데, 한상우 선생님을 심사위원으로 초빙하면서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MBC FM 클래식 방송을 진행하고 계셨고, 심사위원으로 오셨던 선생님은 ‘굉장히 내성적이시고 차가운 분’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어요. 이 후 시간이 흘러 한상우 선생님께서 서울예고의 음악과장으로 부임하시고부터는 가깝게 지내면서 처음 느꼈던 것과는 다르게 선생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선생님을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한상우 선생님을 처음 대면한 분들은 누구나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과의 친분을 쌓은 후에는 처음의 느낌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곤 하지요. 선생님께서는 늘 약자의 편에 서셨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깍듯한 성품을 지닌 분이셨거든요.

 

이만방_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월간 「음악춘추」의 편집위원 역할도 하셨었는데, 그 시절 많은 평을 쓰셨습니다. 선생님의 평은 악평일지라도 연주자에게 도움이 되는 그러한 평을 하셨지요.

 

양재무_ 저도 서울예고에서 처음 한상우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평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방송을 통해 선생님을 알고는 있었는데요. 당시 한상우 선생님은 감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것이 아닌, 연주자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기반으로 한 진행을 하셨고, 음악적 구조에 따른 정확한 해설과 하나하나 직접 구매하신 옛 LP판을 들으시면서 굉장히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을 방송을 통해 청취자들에게 잘 전달해 주시기도 하셨고요. 저 또한 그렇게 선생님의 방송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은사님이셨던 이인영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상우 선생님, 그리고 정우현 선생님의 조언으로 서울예고의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요. 서울예고에서 한상우 선생님을 모시면서는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고, 특히 제가 유학 길에 오를 때 다방면으로 길을 열어주시고, 배려해 주셨습니다.

 

한상우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저는 대학 때 정회갑 선생님께 배웠는데, 당시 백병동 선생과 강석희 선생 때문에 숨을 못 쉴 정도였어요(웃음). 저는 모든 음악적 영감을 찬송가에서 받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곡을 써서 제출하면, 정회갑 선생님께서는 ‘너는 다른 사람의 곡은 보지도 않니?’라며 혼내시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너희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니?’라며 백병동, 강석희 선생과 비교하셨었지요. 아마도 한상우 선생님도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작곡에서 평론으로 방향을 바꾸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만방_ 그런 상황이 우리나라의 음악을 다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요. 오히려 말씀하셨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창작음악과 연주자뿐만 아니라 음악평론이 있었기에 지금의 음악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창작분야나 연주에서 세계시장에 내놔도 뒤쳐지지 않을 만큼 우뚝 설 수 있었던 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실제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백병동 선생님, 강석희 선생님, 한상우 선생님, 그리고 몇 분의 선생님들 말고는 우리나라 음악계에 이름이 거론될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요즈음의 K-Pop이라고 해도 마땅할 당시의 대중음악은 사회적 분위기를 담기가 어려웠지만 그 시대의 화가, 시인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렸던 세대의 선생님들은 예외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만_ 한상우 선생은 무학여고에 있다가 경기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그 때 MBC에 시험을 쳐서 입사한 후 FM방송의 전담 프로를 14년간 진행했는데,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음악을 직접 수없이 들어 본 후 그 느낌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저도 방송국에 몸담으면서 음악방송을 했었지만 한상우 선생 만큼 많은 팬을 거느린 진행자를 보지 못했고, 음악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의 레코드 콜렉션 또한 대단했는데, 아마 우리나라 음악가들 중에 그렇게 많은 LP판을 소장한 사람이 별로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러한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 가면서 저술도 많이 하였는데, 특히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2003)처럼 선배 음악가들의 인물탐구에 주력했고, 북한음악을 연구하면서는 본인의 음악인생 지평을 더욱 넓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만방_ 1971년 MBC가 개국하기 전까지는 KBS밖에 없었고, 전국채널이 되면서 FM 라디오 방송이 생긴 것이지요. 당시 저희들은 유일하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MBC에 클래식 채널이 편성되고부터는 클래식 음악의 보편화가 시작한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해설을 하실 때, (예를 들어)‘베토벤 소나타 몇 악장에 몇 번, 몇 번째 마디에서 연주자의 실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실수라고 하는 것은 전체적인 흐름으로 봤을 때…’이런 식으로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해설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음악전공자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해주셨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분석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MBC FM을 통해 오랫동안 한상우 선생님이 클래식 프로를 이끌어 오셨다는 것과 이것이 우리의 음악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이용일_ 당시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한상우 선생님의 방송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참 중요한 시간대이고, 지금 생각하면 상업방송에서 그렇게 획기적인 편성을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요.

 

이만방_ 한 번은 한상우 선생님을 뵙고, “선생님! 해설 잘 들었습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선생님께서 “어떤 해설을 들었는가? 어떻게 들었는가?”에 대해 물으셨지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선생님을 뵈었을 때, 이 같은 인사를 건네지 못했습니다(웃음).

 

이용일_ 어찌 보면 그것이 한상우 선생님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저 두루뭉실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도 그렇지 못하고, 일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철두철미한 분이다’라고 할 수 있지요.

 

양재무_ 제가 서울예고 초임교사일 때로 기억되는데요. 한상우 선생님께서 전라도 광양지방으로 고로쇠물을 드시러 가셨다가 동행했던 분들은 다 잘 드시고 오셨는데, 선생님만 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고생하시고, 일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지신 일이 있습니다.

 

이용일_ 당시 광양지방은 고로쇠물로 아주 유명했었지요. 고로쇠물을 마시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고 속병에 아주 좋다고 해서 당시 백병동, 강석희, 이강숙, 한상우 선생, 그리고 저 이렇게 다섯 사람이 갔었지요. 그런데 이강숙 선생과 한상우 선생에게만 몸에 이상이 생기고, 강석희 선생은 대단히 좋아졌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웃음).

 

김재은_ 저도 한상우 선생님과의 에피소드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선생님께서 음악과장으로 서울예고에 부임하면서 더욱 친분을 쌓을 수 있었는데요. 선배님이시기도 한 한상우 선생님은 저희 부모님을 비롯하여 가족 모두에게 마치 친척같이 대해 주시는 따뜻한 분이셨습니다.2003년 제가 미국 피바디 음대 교환교수로 있던 당시, 한상우 선생님 내외분께서 볼티모어에 있던 저희 집을 방문하셔서 며칠 머무셨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때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용일_ 한상우 선생님의 현대음악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는지요.

 

백병동_ 저는 한상우 선생과 현대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곡목 소개할 때는 종종 현대음악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전위음악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고, 쇤베르크나 바르톡, 그 외에 슈톡하우젠 이런 작곡가들의 곡도 소개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만_ 제가 보기에는 고전주의 음악에 대한 신봉이 확고했다고 생각합니다. 한상우 선생이 쓴 글을 봐도 그렇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진취적인 것들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백병동_ 바꾸어 말하면 양반스러웠다고 할 수 있지요?(웃음)

 

한상우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외롭고 쓸쓸한 것인데, 한상우 선생님은 가장 안정적으로, 무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서울예고의 음악과장으로도 계셨던 한상우 선생님의 교육관은 어떠했나요?

 

김재은_ 선생님께서는 늘 학생들에게 의욕과 성취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장점을 발견해 주시는 점이 있던 반면, 평론가와 지휘자는 단원들이나 전문음악인들과는 친밀해지면 안 된다는 명확한 선을 긋고 계셨어요. 한 마디로 평론가와 지휘자는 외로운 길을 걸어야만 참다운 지휘자로서의 역할과 평론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고하셨지요. 그래서 선생님 스스로는 전문연주자들과는 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생활하셨습니다.

 

이용일_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음악가들 위에 군림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워낙에 연주자들과 어울리지 않다 보니 많은 분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지는데요.

 

김재은_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것은 한상우 선생님을 잘 모르고, 관계 설정이 되지 않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늘 약자의 편에서 상대방을 헤아리고, 배려를 하는 마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그것은 견제와 균형의 관점에 따라 조금 달리 보여질 수 있겠지요.
 
이상만_ 한상우 선생이 많은 이들에게 이 같은 오해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 한상우 선생과의 만남에서 보면, 선생은 늘 각론은 삼가고 본론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권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자상한 면도 엿볼 수 있었는데, 제 생각으로는 소위 지체 높은 양반가문의 배경이 있었으니 남들에게도 그렇게 비춰지지 않았을까요.

 

이용일_ 그것도 그렇지만 한상우 선생님은 늘 바쁘셨어요. 그래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도 부족했고, 그렇기 때문에 각론을 건너뛰고 본론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상만_ 방송국이라는 곳이 사람을 참 바쁘게 만들지요. 그래서인지 그런 습성이 늘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이만방_ 한상우 선생님께서 서울예고에 계실 때는 자주 찾아 뵙고 이야기도 나누고 한 편인데요. 어느 날 선생님과 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도중 선생님께서 “곡이 별로다”라고 하시는 거였어요. 처음에는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나중에 선생님께서는 “이 곡의 완성도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지요. 그 후에도 ‘현대음악이다. 고전음악이다’라는 논쟁보다 후배들을 상대로 “네가 곡을 쓸 때 무엇을 주장해도 좋고, 어떤 기법을 써도 상관없다. 하지만 너의 곡에서 완성도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충고를 늘 아끼지 않으셨고, 그것이 평론을 하실 적에도 그대로 묻어 나왔지요.

 

양재무_ 여러 선생님들께서 한상우 선생님은 항상 바쁘셨다고 하셨는데, 진짜 바쁘셨던 이유는 서울예고에서 무용부장도 겸직하고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만_ 한상우 선생은 누구든지 일정한 거리감을 두셨고, 여성 팬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울예고 무용부장을 하면서는 무용하시는 분들과도 많은 친분이 있었는데요. 당시 이러한 연유로 한상우 선생과 가까이 지내던 저까지 무용에 대한 지식을 상당히 쌓을 수 있었지요.

 

양재무_ 당시 한상우 선생님은 학생들이 기능인보다는 음악인이 되어야 하는 것과 음악인으로서 각자가 가져야 할 자존심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만 깊이 있게 연구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면에서는 피폐한 부분들이 많았는데,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음악감상을 통해 그러한 문제를 승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하셨지요. 사실 한상우 선생님은 조금 형이상학적이셨고, 학생들이 한참 생각해야 하는 고차원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선생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라디오 방송을 하시던 시절 어느 작곡가를 초청하여 특집으로 대담 진행을 하셨었는데, 예전에는 라운드 테이프라고 해서 테이프를 돌려서 틀어야 했었지요. 그런데 실수로 2면부터 거꾸로 테이프가 돌아갔고, 그렇게 30분 정도 진행을 이어갔는데, 두 분다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선생님께서 나중에 하신 말씀이 “작곡가가 자신의 곡을 거꾸로 틀었는데도 모르더라”라고 웃으며 이야기하셨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을 다니시면서 자신의 저녁시간을 모두 할애해 음악회를 보셨는데,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만_ 음악회를 많이 다니신 만큼 정말 날카로운 귀를 가지신 분이셨지요.

 

김재은_ 네, 정말 많은 음악회를 다니시면서 당시의 전문연주자들이 어떤 음악을 하고, 어떻게 음악회가 돌아가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많은 음악회에 참여하면서 음악계의 동향에 대해 파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새삼 존경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만방_ 우리가 음악회에 가 보면 보통 그 날의 주인공인 연주자가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거 음악회 때 한상우 선생님이 나타나시면 여성분들이 둘러싸서,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면 한상우 선생님이 그 날의 연주자로 착각할 정도였지요.

 

한상우 선생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당시 한상우 선생님의 방송이 오전 11시부터 12시에 편성되었던 만큼 주부들에게 인기도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지금이야 많은 여성들이 직장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시절만 해도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적었기 때문에 참으로 유효 적절한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한상우 선생님이 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백병동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백병동_ 무엇보다 방송매체를 통해서 클래식 음악을 보급한 공로를 생각한다면 한상우 선생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지요. 음악 애호가로 출발해 작곡을 전공했지만, 음악을 듣는 것에 있어서는 시간이 아까운지를 모르던 사람이었고, 또 그만큼 철저한 준비 과정이 있었지요. 한 번은 제가 필요한 LP판이 있어 충무로 레코드점에 들렀습니다. 주인에게 찾고자 하는 LP판을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제가 찾는 것마다 족족 한상우 선생이 구입해 가서 재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상우 선생에게 선수를 빼앗긴 일이 있었는데, 그 만큼 많은 음악을 섭렵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무턱대고 이것저것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수집하고 들은 것이지요. 아마 한상우 선생만큼 고전음악을 많이 들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본인이 먼저 음악 애호가이면서 클래식 음악의 전도사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용일_ 저도 알기로 한상우 선생님은 해설을 하기에 앞서 그 곡을 수 없이 들은 후에 해설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만큼 어떠한 음악이든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분이기도 하셨지요.

 

이상만_ 요즘 같은 시대는 음악회도 여러 곳에서 많이 열리고, 그것을 파악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상우 선생이 서울예고에 재직할 당시에는 음악회 다니기가 어려워 조금 뜸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만큼 음악계 전반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리고 MBC 같은 상업방송에서 한상우 선생의 진행 능력과 음악적인 지식이 아니었다면 클래식 프로그램을 해 나갈 수 없었을 정도로 가진 능력이 대단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대를 보면 상황이 많이 바뀌어서 일명 ‘잡종시대’가 되었는데요. 저도 방송국에 있던 사람이지만 KBS가 광고방송을 하면서부터 청취율과 시청률로 잣대를 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클래식이나 기타 좋은 음악방송들이 점점 설자리가 줄어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놓이고 보니 한상우 선생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정말 아쉽게 느껴집니다.

 

이용일_ 저는 요즘 KBS FM 고전음악을 듣다보면, ‘참, 식상하다’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가리지 않고 하는 식에 불과하고, 그야말로 세상 이야기만을 꺼내놓는데요. 한상우 선생님이 방송하던 그 때를 떠올리면 세상이 바뀌어서 그런 것인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목소리조차도 온화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따뜻함을 느끼게도 하셨고, 짙은 호소력을 지니고 계셨는데 말이지요.
한상우 선생님이 그런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해 오셨더라면 우리나라 클래식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제라도 여타의 방송국들이 전문적인 학식을 갖춘 사람을 선별하여 진행을 하도록 하고, 나아가 종전의 클래식 음악계의 반향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재은_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200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음악평론가 한상우와 함께 하는 토요 마티네라는 공연을 모차르트홀에서 정기적으로 해오고 계셨는데, 그 때도 물론 여성 팬들이 대단했었습니다. 한상우 선생님께서는 신수정 선생님, 그리고 몇 분의 음악인 제자들과 함께 매년 5월 정기적인 모임을 20년 가까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던 해인 2005년 5월의 모임에서는 토요 마티네를 이 모임에서 연주했으면 하셨고, 선생님께서 직접 프로그램에 들어갈 사진도 사진기에 담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선생님께서 병석에 누우셨고, 몇 달 동안의 입원과 수술, 그리고 홀연히 저희 곁을 떠나셨지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떠나시고 장례식장에서 프로그램에 사용할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고, 결국 그렇게 준비하던 연주는 선생님의 추모음악회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12월의 연주는 선생님과 함께 기획한 것이어서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상만_ 서울예고가 예음으로 넘어오면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임원식 선생님께서 이 일을 주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정우현 선생님이 서울예고를 운영하게 되고, 뒤이어 한상우 선생까지 서울예고로 부임하자 임원식 선생님의 견제가 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에는 서울예고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아 많은 분들이 서울예고를 살리는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는데, 한상우 선생이 음악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안정권으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평론의 경우도 흔히 ‘서울대 출신이 아니면 평을 안 써준다’라는 편견들이 난무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아주 폭넓게 많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듣고, 평을 쓰기도 하였지요. 한상우 선생의 권위는 말 그대로 ‘권위’가 아니라 연주자나 지휘자, 그리고 많은 음악인들이 학연, 지연으로 인한 성공을 저지하기 위한 어떤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생각하고, 한상우 선생 또한 늘 그러한 것을 끊고자 단언하였지요.

 

김재은_ 한상우 선생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것이 현대에서 사느라고 고달프고 지친 사람들에게 음악이라는 것은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준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것은 선생님의 저서인 『선율, 온 영혼의 불꽃』이라는 책에도 쓰여 있지요. 그래서 선생님의 삶의 내면에는 음악평론을 하면서도 수정해야 할 것을 보완시키는 것보다는 장점을 더 살리는 글을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요즈음 많은 기업들의 경영철학이 ‘부족한 것을 고치기보다는 장점을 더욱 살리자’라는 모토이지 않습니까?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추세를 따르고 있고요. 선생님께서는 음악에서도 이러한 정신이 필요하다고 여기셨고, 실천하셨습니다. 학교에 계시면서도 매일 음악회를 가셔서 모든 음악을 섭렵하셨고, 또한 의뢰가 들어오지 않아도 연주를 보신 후면 꼭 평론을 쓰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가끔 선생님의 평론을 읽어보곤 했는데, 제가 쓴 것과 비교를 하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족한 점을 쓰고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다’라는 식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야말로 좋은 점을 발췌해 내는, 그러한 철학을 가지고 계셔서 그런 선생님의 자세가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선생님과 함께 했던 일들을 떠올리니 한상우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이상만_ 마지막 직장이었지만 한상우 선생이 서울예고의 교육적인 방향과 교육이념 등을 정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음악인들이 한상우 선생의 모습을 본받고, 길이 여기기를 바랍니다.

 

이용일_ 오늘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자리하여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한상우 선생님과의 좋은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어 그 어떤 때보다도 알차고, 뜻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리·장혜령 기자
사진·김문기 부장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백병동(작곡가,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만방(작곡가, (사)한국작곡과협회 이사장(前))    

양재무(이마에스트리 대표, 서울예고 미래발전부장)

김재은(앙상블 예무스 단장, 서울예고 교사)

일시: 2012년 2월 7일 장소: (주)코스모스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