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악교육 역사에 큰 족적 남긴
음악교육자 정우현 선생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난 음악교육자 정우현(鄭佑賢, 1926. 10. 9~2008. 5. 11) 선생은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함양에 소재한 안의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입학하여 1957년 졸업하신 정우현 선생은 졸업하신 그 해부터 서울예고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셨으며 교감 직을 거쳐 1975년 6월 서울예고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평교사를 거쳐 교감, 교장 직을 맡아 봉직해 온 정우현 선생은 서울예고를 위해 새로운 교육과정을 편성하기도 하며, 진정한 음악, 무용가를 양성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서울예고 교장으로 취임한 해에 예원학교 교장도 겸직한 정우현 선생은 이후 1983년 예원학교 교장 직을 사임하고 서울예고에만 더욱 열정을 쏟았으며 1992년 2월 정년퇴임하였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제1번」과 「현악4중주」를 비롯해 「수석 있으매 즐거운 인생」, 「내 사랑 수석일세(탐석의 노래)」 등이 있다.
일시: 2011년 12월 8일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 명예회장)
패널: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고중원(피아니스트, 단국대 명예교수)
양재무(이마에스트리 대표, 서울예고 교사)
조은영(피아니스트, 서울예고 교사)
정준((주)쏠리테크 대표이사)
정우현 선생의 성장배경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작고하신 선대 음악인들의 생을 되돌아보고 업적을 기리는 2012년 1월호 음악춘추 인물탐구에서는 서울예고 제3대 교장이셨던 정우현 선생님에 대한 좌담회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예원, 서울예고가 오늘에 이른 것은 ‘정우현 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먼저 정우현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정준_ 저희 할아버님께서는 제가 태어나기 오래 전 일찍 돌아가셔서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전해 듣기로 무역업에 종사하시던 분이셨고, 할아버지 형제분들 중에서도 음악을 하시던 분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대 음악가 선생님들이 어린 시절 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고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에 반해 저희 아버님께서는 일제강점기에 진주사범학교에서 일본인 선생님께 음악을 배우면서부터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신 후 다시 고향인 안의로 돌아가셔서 안의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며 음악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625전쟁 발발 전에 안의중학교 선생님들이 아버님의 작품을 모아 작곡집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아버님께서는 서울로 올라 오셔서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진학하셨고, 졸업하실 무렵 임원식 선생님께서 함께 서울예고에서 일할 것을 제안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서울예고에 몸담으시면서 같은 재단에 속한 이화여고에 출강하시기도 하셨는데, 결국은 평생을 서울예고에서 봉직하셨습니다. 정년퇴임 하신 후에는 재단의 이사직을 맡으셨습니다. 그 때는 제가 유학 등으로 집을 주로 떠나 있어서 아버님의 모습을 많이 뵙지는 못했지만, 서울예고를 떠나신 후에도 늘 학교에 대한 걱정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아버님께서는 서울 예고에 대한 애정과 영재 예술 교육에 큰 뜻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_ 과거 사범학교에서는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넓은 교양과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전인교육을 강조했지요. 정우현 선생님은 음악 이외의 다방면에도 실력을 갖춘 분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실 때,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는 집안의 반대도 심했을 것 같은데요.
정준_ 주위의 반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6·25 전쟁 이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혼자 고향을 떠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7살 정도 많은 나이에 새로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새로운 배움과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족과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전쟁 이후 집안 사정도 어려우셔서 경제적인 도움도 전혀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시면서 금전적인 어려움도 많이 겪으셨다는 이야기를 자라면서 아버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이용일_ 진주사범학교 제6회 졸업생이신데, 진주사범학교 미쳐 자리 잡기도 전에 학교를 다니셨으니, 그런 점에서도 많이 힘드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는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좋은 상도 받고, 교수님들의 신임을 얻지 않았을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안정적이나 성품과 실력을 두루 겸비했기에 임원식 선생님도 정우현 선생님을 서울예고로 모신 것이겠지요.
이상만_ 정우현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라는 곳은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경상도 말씨보다는 이북말씨를 쓰는 사람이 더 많았지요. 이곳은 경상북도 풍기라는 고장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교육열이 대단해서 일본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해방 이후에는 이러한 사람들 중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서울로 유학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부친께서 무역을 하셨으니, 아마도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우현 선생님은 중학교 교편을 잡던 시절 음악뿐 아니라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 다방면에 능통하셨는데, 나중에는 수석(壽石) 수집가로도 활동하시면서 (사)한국수석회 회장을 맡기도 하셨지요.
해방직후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대 음대에 다니게 되었는데, 보통 입학생들보다도 7살 정도 나이가 많았지만 학생들과 잘 어울리며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한 필체가 좋아서 현제명 선생님께서 많이 아끼셨고, 학교 심부름도 도맡아 하는 모범생인데다가 잘 생기기까지 하셨으니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정우현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네. 그렇다면 이곳에 계신 분들은 정우현 선생님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인연을 맺어 오셨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상만 선생님께서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이상만_ 정우현 선생님은 서울대 음대에 입학하실 때 다른 학생들보다도 7살이나 많은 학생이었는데, 저와는 9살 차이가 나는 큰 형님이셨습니다. 또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키가 크고, 잘 생기셔서 단연 인기셨지요. 1학년 때부터 졸업하실 때까지 늘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셨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절대 티를 내지도 않으시고, 늘 겸양하는 태도를 보이셨지요.
그리고 1학년 때부터 김세현 선생님을 사사하면서 곡을 쓰기 시작하였고, 젊은 나이에 교향곡 작곡가로도 활동하셨습니다. 일례로 1956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교향곡 제1번」은 선생님이 작곡한 곡입니다. 정우현 선생님은 그 곡을 작곡하기 위해서 안의 지방의 민요들을 많이 채보해서 주제를 정하셨고, 상당히 민속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고중원_ 저는 1960년 서울예고에 입학하며 선생님을 뵈었는데 그 당시 서울예고의 커리큘럼은 오전에는 국영수 등 일반 학과 수업으로, 그리고 오후에는 음악수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3학년 때는 입학자격 국가고시가 생겨 그 동안 못 배웠던 과목을 배우느라 이 제도가 바뀌었다.) 정 선생님께서는 시창·청음, 이론, 합창, 감상 수업을 맡으셨는데, 오후에는 거의 선생님 사간들로 차 있었지요. 수업시간에 절대로 늦지 않으셨고, 시간보다 일찍 나가시는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또한 그 더운 여름에도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넥타이를 매시는 등, 늘 단정하고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셨지요.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던 50년이 넘는 세월을 되돌아보면, 교육에 있어서 조금도 양보 안 하시는 참으로 열정적이었던 선생님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적었던 노트는 제가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또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데도 훌륭한 참고서가 되었습니다. 유학가기 전 3년 반, 또 다녀와서 2년을 예고 교사로 있을 때와 그 후로도 실기 강사로, 수 십년을 가까이 뵈어 온 저에게 선생님께서는 평교사로 계실 때나 교감, 교장 직을 맡으셨을 때나 늘 한결같은 참 교육자의 모습을 지니셨고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계십니다.
이용일_ 제가 본 정우현 선생님은 성품이 대단히 합리적인 분이셨습니다. 예술적인 기질도 뛰어나셨지만 학생 한 명 한 명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도 참으로 인간적이었던 분이셨지요.
조은영_ 제가 1974년 서울예고에 입학하고 2학년이 되었을 때, 정우현 선생님은 예고의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면서 예원의 교장직도 겸하셨는데 그 후 예원 후임 교장으로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고영관 선생님이 취임하시자 그 분이 학교를 이끄는데 따르는 어려움을 이해하시고, 매일같이 예원학교에 들르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동안 서울예고의 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교장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사실 교장이라는 위치에 오르면 사소한 일 하나 하나 신경 쓰는 것이 힘들고 귀찮으실 만도 할 텐데, 정우현 선생님은 조회시간에 제일 늦게 나오는 학생들까지도 붙잡고 질서교육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제가 서울예고에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정 선생님께서는 사회에서의 역할,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세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시창·청음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신 선생님께 늘 가르침 받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정 선생님은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모범답안지 같은 분이십니다.
양재무_ 저는 비교적 늦게 정우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랑을 받았지요. 선생님께서 제게 서울예고 교사직을 제안하셨을 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유학을 계획 중이어서 교사직에는 뜻이 없었지만, 은사님이셨던 이인영 선생님께서 “서울예고는 좋은 학교니 가서 일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래서 정우현 선생님께 다시 연락을 드리게 되었지요. 서울예고에서 처음 근무하던 그 해에 정 선생님과 함께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일주일의 여행 기간 동안 선생님께서는 과거 일본 진주사범학교를 다니면서 배웠던 것과 초창기 서울대학에서 느끼셨던 조국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예술에 대한 끝없는 정열을 저에게 하나하나 알려 주셨고, 서울예고에 있으면서 교사로서 가져야 할 소임과 “대한민국의 예술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깨우치게 해주셨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교육철학이 참 투철했던 분이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일본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동경에 가서 선생님의 진주사범의 일본인 은사님을 뵈었을 때였는데, 그분은 자신이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손수 정 선생님께 매주셨습니다. 그러자 정 선생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흐느끼시더라고요. 나중에 선생님께서 제게 아들처럼 참 대해 주신 보기 드문 일본인 선생님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진주라는 대도시에 올라오셔서 혼자 힘든 생활을 하시고, 먹고, 자고, 입는 것까지 신경 써주셨던 은사님의 은혜에 큰 감사함을 느끼시고 울음이 나셨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은사님에게 그 만큼 더할 나위 없이 큰 사랑을 받으셨기에 제자들에게도 또한 사랑을 베푸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중원_ 정우현 선생님은 임원식 선생님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으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선생님께서는 늘 교장이신 임 선생님을 존중하셨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원만하셨습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학교일을 도맡아 하셨고. 평교사를 거쳐 교감, 교장선생님이 되셔서도 한결 같이 학교에 제일 먼저 출근하신 분이셨습니다.
교육자로서 정우현 선생의 업적
이용일_ 정우현 선생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음악계에 가장 중용을 지키는 음악가인데요. 서울예고 교장으로 계시면서 일구어 낸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양재무_ 서울예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예술고등학교의 산파 역할을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전국 예술고등학교의 컨설팅을 직접 하셨고, 경쟁 학교가 생기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 선생님을 산파보다 더 큰, ‘산부인과 원장님’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이상만_ 임원식 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실 때, 정우현 선생님은 교감으로 일하셨지요. 임원식 선생님은 사회적인 판단과 정치적인 판단이 상당히 뛰어나셨고, 직관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분이셨지요. 그 반면에 정우현 선생님은 자신의 노력으로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쓰셨고, 당시 신봉조 이사장님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임원식 선생님도 신봉조 이사장님의 큰 신임을 받았던 인물 중 한 분이신데, 그 분과는 또 다른 신임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임원식 선생님이 서울예고 교장 직에서 물러나시고, 그 뒤를 정우현 선생님이 이으셨는데, 교장이라는 자리에 본인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 결 같이 고사하셨지만, 그 당시의 정황으로 봤을 때, 정우현 선생님께서 교장 직을 맡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봤을 때에도 서울예고의 교장이라는 위치는 너무나도 큰 자리이지만 선생님께는 너무나도 당연한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1962년 임원식 선생님과 함께 한국청소년음악연맹 활동을 하면서 서울예고에 자주 가곤 했었는데요. 정 선생님도 함께 그 일에 동참하셨습니다.
고중원_ 제가 서울예고의 교사로 있던 1967년에 ‘예원중학교’라는 교명으로 중학과정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다음해가 평준화 정책으로 시험을 보지 않고 학교를 들어가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예원중학교에 예술과 전혀 상관없는 학생들을 배정 받는 실정이었지요. 그러니 예술학교로 제대로 운영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만든 것이 예술학교의 성격을 띤 각종학교이고, 1969년 9월 경 ‘예원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지요. 이 일을 성사시키신 주역이 바로 정우현 교장선생님이셨습니다.
조은영_ 네. 정우현 선생님께서는 서울예고를 위해 정말 헌신하셨습니다. 설립 초기 제 어머니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당시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대체로 소위 명문학교인 경기, 이화여고에 진학했는데, 실력은 있지만 학비가 없어서 그러한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우수 학생들에게 정우현 선생님은 서울예고에 와서 공부하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답니다. 그리고 저희들 때에도 항상 예고에 와서 꿈을 펴라고 적극 권하셨지요. 그만큼 서울예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습니다.
이용일_ 당시 예술계통의 교육과정은 당연히 교육부에서 편성했지만, 기본은 전부 서울예고에서 만들어 보낸 것이지요. 역시 그러한 것들도 정우현 선생님이 사범학교를 다니시면서 폭넓게 음악을 배우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요?
고중원_ 서울예고는 예술 전문학교이다 보니 몇몇 필수과목을 제외하고는 전공과목에 주력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윗 학년부터는 대학입학자격 학력고사가 생겨서 생물, 화학, 가정 등의 과목을 배우기 시작했고, 저도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런 과목을 접하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기존의 대학과 같은 커리큘럼으로 운영되다가 1962년부터 새로이 커리큘럼을 재편성하게 된 것이지요.
조은영_ 서울예고가 미션스쿨이다 보니 정우현 선생님께서는 종교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스승과 제자, 그리고 동료들 간의 화목을 강조하셨지요. 또한 재학생들에게는 전인교육과 사회성을, 졸업생들에게는 사랑과 믿음을 주셨습니다. 제가 교사생활을 해보니까 믿음 하나만으로도 웃으면서 일 할 수 있고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선생님들보다도 투철한 분이셨지요.
이용일_ 당시 예원, 서울예고를 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은 없었나요?
이상만_ 임원식 선생님 때부터 예원과 서울예고와 연계되어 있는 대학과정을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제가 음악잡지 예음에서 일하던 당시 회장 최원영 씨가 서울예고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임원식 선생님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수 당시 기본 조건 중 하나가 서울예고를 대학수준의 학교로 연장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최원영 씨가 몇 년에 걸쳐 인수 작업을 해왔는데, 그 때는 서울 및 수도권에 마음대로 대학을 만들 수 없었지요. 또 대학이 들어설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장소를 갖고 있질 않아 무산되었지요. 사회적 여건상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기에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에 그런 기획을 가지고 만든 것이 한국예술종합학교입니다. 정우현 선생님은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의 뉴욕에서 많은 예술학교들의 교육 시스템을 연구하셨고, 그 시절 문서화되어 있지 않던 교육과정을 손수 만들기도 하셨지요.
임원식 선생님과 정우현 선생님의 교육철학은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임원식 선생님은 순수하게 엘리트 위주의 교육을, 그리고 정우현 선생님은 거기에 전인교육, 말하자면 음악예술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는 그런 사상을 가지고 계셨지요. 또한 일본말에도 능통하셔서 일본의 좋은 교육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하셨습니다.
양재무_ 전인교육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정우현 선생님께서는 교사들의 질적수준을 매우 중요시 하셨고, 입학생들도 실기뿐 아니라 학과 성적 모두 우수해야 함을 강조하셨지요. 정우현 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셨던 20여 년 동안의 서울예고는 지금의 외국어 고등학교와 과학고등학교에 견주는 실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정준_ 항상 예원, 서울예고에 어울리는 교육 여건을 만드시는데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 같고, 종종 “교육부에서 예술교육을 좀 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용일_ 당시 교육부 사람들이야말로 서울예고의 체계는 물론, 예술이란 것에 무지했기 때문에 대화로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정우현 선생님은 그 당시 교육부 감사들과도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서울예고에 맞는 교육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데에 무척 노력하셨습니다. 그러한 교육시스템을 가지고 예원학교를 만드신 것 자체가 엄청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은영_ 그렇게 예원학교로 교명이 변경이 되고 전공실기를 포함한 모든 예술 관련 과목들이 커리큘럼에 추가 되었는데, 이 시스템은 타 예고에서도 서울예고의 것을 모체로 삼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우현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을 이루어 낼 수 없었겠지요.
양재무_ 서울예고 50년사를 보니까 서울예고가 가장 큰 위기였던 시기가 1980년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시절 예술교육 과외금지 선포였습니다. 그 때 서울예고는 폐교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그 사건을 오히려 예고 시스템에 맞춰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정우현 선생님이십니다. 덕분에 음대 교수님들이 예고에 오셔서 레슨을 하기도 했었지요. 정말 꿈꾸고, 계획만 하던 것들을 현실화시키고, 가장 좋은 길을 찾던 분이셨습니다.
고중원_ 정우현 선생님의 사모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참 현숙한 분이시고, 말씀을 하실 때도 조근 조근 참 부드럽게 잘 하셨지요. 선생님께서 훌륭한 사모님을 만나신 것 이 교장직 수행에 큰 힘이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모님을 뵈면서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되면 저분처럼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이 선생님 댁을 방문했는데, 자제 분들의 교육을 위해 집에 TV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자제 분들 모두 학업성적이 우수했어요. 그 정도로 학교 교육에서건 가정교육에 있어서건 투철한 정신을 가지고 임하셨습니다.
이용일_ 제가 교육실습생을 지도하러 나갈 때면, 정우현 선생님께서는 늘 밥을 사주셨어요. 매번 그렇게 하시니까 나중에는 죄송스러워서 예고에 못 가겠더라고요. 그리고 교육 실습을 하다 보면 학생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일반 음악교과 지도방법을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시창·청음을 지도하게 한다는 불평 정도지요. 하지만 당시 서울예고가 교육적 기반이 닦여 있지 않다는 것을 본인이 잘 알고 계셨기에 방법을 강구하셨던 것으로 봅니다.
이상만_ 이 자리를 빌려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학칙법상 예고는 각종학교의 범주에 들어가 있습니다. 각종학교는 일제시대에 만든 범주인데, 정규학교가 아닌 기타학교라는 것이지요.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중고등학교 예술교육의 기적을 이룬 학교가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입니다. 전 세계를 찾아봐도 이러한 유래가 없지요. 정우현 선생님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대처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고, 설치법을 연구하면서 교육부 사람들과 대화로서 하나하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셨습니다. 지금의 서울예고가 있기까지 30년간 수많은 노력과 연구를 지속해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의 예술고등학교를 만드는 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셨는데, 대만의 동광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대만에서 많은 예술가를 양성하는 계기가 된 데에는 정우현 선생님의 공로가 매우 크지요.
정우현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작곡가로서 정우현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학생 때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하셨지만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면서 부터는 작품 활동이 뜸하셨지요.
이상만_ 정우현 선생님은 일상에서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평소에 대화를 나누면서도 중요한 것이 있으면 뒤돌아서 메모를 하기도 하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찬송가 곡조 같은 것은 틈틈이 적어놓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면서 작품에 대한 모티브를 얻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작품발표라든지, 활동이 뜸하시기는 했으나, 작곡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무척이나 작품을 쓰고 싶으셨겠지요. 하지만 서울예고를 위해 30여 년을 전심전력하시면서 작곡가로서의 삶은 희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앞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정우현 선생님의 대학시절 때의 관현악 작품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_ 작곡과를 졸업했다면 작품 활동도 굉장히 하고 싶으셨을 텐데, 서울예고 일에 힘쓰시면서 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중원_ 제가 기억하는 것은 한 번 일선 부대에 군가를 작곡하여 보내시면서 제게 쳐보라고 하신 적이 있고 교가가 없는 시골 중학교에 교가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지요. 요즈음 쓰는 말로 재능기부이지요.
정준_ 은퇴하시고 난 후에는 틈틈이 작품을 쓰셨지만, 학교에 계실 때는 학교의 일에만, 그리고 퇴근 후 저녁에는 제자 분들의 음악회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거의 안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양재무-서울대 음대 동창회장도 맡으셨고, 세계 청소년 음악연맹(쥬네스 뮤직) 활동을 비롯해 작곡가협회에도 참여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만_ 앞에 말씀드린 (사)한국수석협회의 회장으로 계시면서 수석에 대한 작품활동은 꽤 하셨어요. 작품 「수석 있으매 즐거운 인생」, 「내 사랑 수석일세(탐석의 노래)」 등이 그것이지요.
정우현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현재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수많은 음악가들이 제대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정우현 선생님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중원_ 현재 수많은 예고 출신 음악가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이 제대로 된 음악을 하고, 체계적인 커리큘럼에 맞추어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정우현 선생님의 혼신을 다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저는 임원식 선생님과 정우현 선생님 두 분을 말씀드린다면, 임원식 선생님은 진정한 음악가, 정우현 선생님은 진정한 교육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상만_ 정우현 선생님은 특정한 학생을 편애하기보다는 학생 한 명 한 명 신경을 쓰시던 분이셨습니다. 한 학생에게 무언가 잘못된 점을 지적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혼내시는 법이 없으셨고, 무언가를 바라실 때도 한 학생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조은영_ 네. 예를 들면 학생이 콩쿠르를 나가게 되면 전체 학생 앞에서 향상 음악회를 시키신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지도해 주셨습니다.
고중원_ 선생님 댁과 교장실에 가 보면 돌을 잔뜩 늘어놓으시고 좋아하셨지요. 피부가 검으셨는데, 아마 돌을 주우러 다니셔서 피부가 더 검게 되신 것 같았어요(웃음).
이용일_ 일본의 도호대학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원인에는 문화사조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도호대학이 서울예고 같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옛날부터 도호 출신들이 동경예술대학 학생들과 경쟁할 때면, 동경예대 학생들을 누르고 외국에 나가 성공하기도 했는데, 일본 내에서는 기초가 튼튼한 동경예대생들의 힘에 눌려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지요. 그 만큼 기초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판사, 검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지니고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의 학교교육이 문제가 되는 이 시대에 이제 서울예고도 위기가 왔다고 봅니다. 이러한 상황을 ‘정우현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에 대한 것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상만_ 정 선생님은 평소 농담을 좋아하셨습니다. 음악가 중에서는 농담 잘하는 분이 몇 분 계시는데, 그 중에 정우현 선생님은 모임을 가질 때면 톡톡 튀지는 않지만 은근히 좌중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선생님의 인품 중 가장 크게 본받아야 할 점은 인내심이라 할 수 있는데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참고 인내하며 큰일을 일구고 견뎌내셨지요.
이용일_ 과거 한국음악교육협회에서 조상현 선생님이 회장을, 구두회, 정우현, 이병두, 그리고 제가 부회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행사를 앞두고 사무 착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는데,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서로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요. 그 때 정우현 선생님께서 개인적인 감정보다도 국제적으로 약속된 행사이니 행사 먼저 잘 치르고 난 후 이야기를 통해 풀어나가자고 중재를 하셔서 ISME총회를 잘 마무리했던 적이 있습니다. 본인도 감정이 상하고 불만이 있었겠지만 대의를 위해 참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조은영_ 인내심도 많은 분이셨지만, 억양에 사투리가 섞여 있으셔서 그런지 참 부드러운 분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학생을 편애하지 않으셨으며, 남을 불편하게 하는 성품도 아니셨어요.
이용일_ 우리 모두가 교육자로서 그러한 성품을 배워야 하는데, 대학에 몸담고 있지만 우리도 사람인지라 어떻게 편애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 소수의 학생만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닌, 전체를 끌고 가는 교육방법을 후대에 실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 교수들을 비롯해 교육기관의 종사자들이 인내력을 가지고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대담을 통해 정우현 선생님이 후대 음악인들에게 알려지고 좋은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바랍니다. 추운 날씨에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장혜령 기자 / 사진·김문기 부장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 명예회장)
고중원(피아니스트, 단국대 명예교수)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양재무(이마에스트리 대표, 서울예고 교사)
조은영(피아니스트, 서울예고 교사)
정준((주)쏠리테크 대표이사)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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