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대담 / 인물탐구
음악교육가 류덕희 선생님
(1930.2.15 ~ 1998.5.14)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 온 류덕희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1953년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한 후, 1955년부터 1962까지 정신여고와 무학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또한 그는 지속적인 음악교육연구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1962년 서울교대의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1995년 2월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71년, 연세대 교육대학원 교육학과에서 수학한 후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건국대, 한양대 교육대학원에서 강의한 그는 1972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음악협회 이사, 1975년부터 1982년까지 한국음악교육연구회 부이사장, 1982년부터 1985년까지 한국음악교육학회 회장을 지냈다.
「피아노 트리오」(1953)와 김소월 시에 의한 가곡「꿈」을 작곡하고, 「음악교육학개론」,「세계음악교육사」를 집필한 음악교육가 류덕희 선생은 한국리코더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 교사 리코더합주단을 육성하여 매년 리코더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리코더음악 보급 및 초등음악교육과의 접목을 위하여 노력하시고 서울교육대학교 정년 후에는 한국리코더 아카데미의 이사장을 역임하며 작곡
과 집필 활동 및 리코더 음악교육 발전에 헌신하였다.
일시: 2014년 9월 4일(목) 11시
장소: 리코디아 반포점
진행: 이용일선생님(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상만선생님 (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장창환선생님 (서울교대 명예교수)
조효임선생님 (서울교대 명예교수)
기 청 선생님 (전 강남교육장)
류기준 선생님 (자제)
1. 류덕희 선생님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2. 류덕희 선생님과의 첫 만남
3. 류덕희 선생님의 음악세계
4. 류덕희 선생님의 교육관
5. 류덕희 선생님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 이번 음악춘추 10월호에서는 음악교육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은 모를 수도 있지만, 따뜻한 마음과 유머러스한 말씀으로 음악 교육을 멋지게 표현하신 류덕희 선생님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교육계의 선구자로 활동하신 류덕희 선생님의 성장과정은 어땠나요?
류기준 / 아버님은 서울에서 출생하셨고, 2남 4녀 중에 제일 막내였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6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서울사대부고를 1회로 졸업하셨습니다. 형제분들 중에 2분은 전쟁 때 월북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3남매를 두셨는데, 음악을 전공한 누이와 여동생 그리고 제가 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주변 정리를 하다가 누군가가 아버님이 하시는 일을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잘 모르지만 월급쟁이의 생활을 접고 10년 가까이 리코더쪽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 할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류기준 / 저희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양잠업을 공부하여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하시다가 병을 얻으셔서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용일 / 아버지가 음악하신 계기와 가정에 음악적인 흐름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류기준 / 본인이 음악적인 열정이 있어서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월북하신 형제분들도 전공을 하진 않았지만 첼로, 피아노 등을 연주하였습니다.
이용일 / 혹시 교회를 다니셨나요?
류기준 / 네, 다녔습니다.
이용일 / 류 교수님이 음악을 전공하게 된 배경에는 교히에서의 음악활동이라고 보아야겠네요. 먼저, 이상만 선생님은 언제 류덕희 선생님을 처음 만나셨나요?
이상만 / 저는 학교 다녔을 때, 그 당시에 음악 교육에 대해서 가장 관심있고 선구자이신 정세문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정세문선생님은 저의 선생님이기도 하지만 류덕희 선생님의 선배였습니다. 정세문 선생님 소개로 저보다 3~4년 정도 선배인 류덕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희 두 명 다 김성태 선생님의 제자니 더욱 빨리 친해졌고 특별히 한국음악협회 이사로서 같이 활동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나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류덕희 선생님은 저보다 선배지만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당시 김성태 선생님은 "저 사람은 작곡을 했어야하는데 선생
님을 하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음악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창환 / 대학교 4학년 때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제가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류덕희 선생님이 대학에 오셔서 대모를 수습하려고 노력할 때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류덕희 선생님이 저를 추천하여 교대 교수로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를 동생처럼 아껴주셔서 정말로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저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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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청 / 제가 류덕희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급 정교사 자격 연수에서 선생님의 음악교육에 대한 강의 때였습니다. 강의 내용이 음악교육에 대해 너무 훌륭하였으며 음악에 대한 확실한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강의였습니다. 그리고 kd의 중 지루한 분위기나 힘들어 할 때 재미있는 유머로 분위기를 바꿔가며 강의 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강의를 받는 모든 선생님 들이 즐겁게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저는 강의의 방법을 선생님의 방법을 롤 모델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용일 / 조효임 선생님은 언제 류덕희 교수님을 처음 보았나요?
조효임 / 저는 리코더를 초등 음악교육에 도입 하신 분은 류덕희 선생님이 선구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서울음대 성악과를 졸업했으나, 독일에 유학 가서 전공을 실기에서 음악학으로 바꾸어 다시 학부부터 공부하였습니다. 그 때에 부전공으로 플륫을 배우다가 리코더 음악의 아름다음을 접하고 나서 '리코더를 교육에 접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코더 렛슨을 받고 리코더 동호회에 가입하여 주말에는 연주활동도 하고 연주봉사활동도 하면서 오르프-슐베르크(Orff-Schulwerk) 음악교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리코더는 오르프 음악교육에서 목소리 다음으로 중요한 멜로디 악기입니다. 서울교대 교수 공채 때, 하루 종일 시험을 보았는데, 면접을 하시던 류덕희 선생님께서 리코더를 지도할 수 있는지를 물으시고 독일에서 리코더를 공부했다고 했더니 저의 장점이라고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교대 교수에 임용되고 류덕희 교수님이 힘 써주신 덕분에 지난 20여 년 동안 리코더 실기를 전공과목으로 개설하여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교대 역사상 처음으로 제가 부임한 첫 해에 9명의 학생이 리코더로 졸업연주를 하였으며, 그 졸업생들이 초등교사가 되어 오늘날의 한국 초등음악교육계에서 리코더 활동을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유덕희 선생님의 갑작스런 별세로 선생님께서 이끌어 오시던 한국 리코더 아카데미를 제가 2년여 동안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류덕희 교수님이 안계셨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용일 / 제가 정리를 하면 리코더를 처음에 시작하신 분은 춘천 교대의 박재훈 교수님입니다. 류덕희 교수님과 박재훈 교수님의 차이점을 말씀을 드리자면, 류덕희 교수님은 리코더를 공부하신 조효임 박사님과 아드님이 지금까지 리코더 관계되는 일을 잘 맡아주시고 계시지만, 박재훈 교수님은 대학 강단에서 리코더를 강의한 교수가 없었고, 동생이신 연세대 작곡가 교수인 박재훈 선생님이 창작활동을 잠시 한 것으로 그쳤기에 리코더의 주류가 서울교대로 왔다고 봅니다. 제가 교수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밥을 같이 먹었을 때, 류덕희 교수님이 음악교육을 열심히 해보라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자주 만남을 가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교수님의 마음에는 한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외향적으로 활발 하셨였지만, 남이 모르는 마음속에 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만 / 우리 학교 선배 중 최춘근 선생님이 계셨는데 최춘근 선생님의 어머니가 정신여고의 교장인 김필례 선생님이였습니다. 최춘근 선생님은 아는 지인 중 똑똑하고 훌륭한 분이 있다며 어머니께 이야기 하여 정신여고의 선생님으로 채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분이 바로
류덕희 선생님이십니다. 그 때 최춘근 선생님도 정신여고의 선생님이였습니다. 그 당시 정신여고의 합창단과 중창단이 서울에서 합창을 잘하는 합창단이였습는데, 류덕희 선생님이 그 합창단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가 음악교육을 처음 하였을 때는, 일본 사람들의 영향으로 일본식 교육으로 하였습니다. 일제시대때, 공부한 사람들이 음악교육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류덕희 선생님이 일제시대 교육 방법을 탈피하여 한국식의 교육 방법을 실시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용일 / 류덕희 교수님의 학문적인 업적과 한국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창환 / 음악전공 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분야가 있는데, 성악과나 기악과나 기능적인 면이 강합니다. 그리고 클래식과 경음악의 분야가 따로 있고 , 음악교육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능 위주로 음악교육이 이루어 졌었는데 정세문 선생님이나 류덕희 선생님이 음악교육 분야를 확고하게 확립시킨 분이십니다. 그 중에 류덕희 선생이 보다 발전적인 역할을 담당하시고, 매진하시던 분입니다. 우리 후배들이 그 이상을 본받아서 더욱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후배들을 굽어보시고, 기쁘게 여기시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교수님은 부지런하지만, 담배를 때문에 폐암에 걸린 것이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교수님은 제가 정년퇴직을 할 때 돌아가셨습니다.
기 청 / 제가 어느 땐가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합주를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열심히 지도하여 잘 잘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 류덕희 교수님께도 같이 지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 지도 할 때보다 음악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을 본 저는 '류덕희 교수님의 음악을 만드는 실력은 대단 하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쓰신 책을 가지고 음악교육에 참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제가 장학관 시절에 음악교육 관련 논문 심사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논문에서 선생님의 책을 참고한것을 보고 선생님은 책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교육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음악교육이 단순한 음이나 노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 내지 정서 순화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저서를 통한 음악교육 방법에 대한 이론을 확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음악교육이 계속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로 기악합주, 반주법, 표준화 음악재능 검사, 음악교육학 개론, 음악 교수법, 음악감상학습 지도자료, 음악교육사, 음악낙수, 음악사전 음악교육론 등이 있습니다.
조효임 / 류 선생님께서는 리코더 음악을 초등음악교육과 접목하시기 위하여 솔로곡 뿐만 아니라 합주곡으로 편곡하시거나 작곡을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민요나 다른 악기를 위한 곡들을 리코더합주편성으로 편곡하시어 청소년 및 교사리코더 합주활동을 지도하시었습
니다. 또한 서울교대에서 매년 주최하는 전국아동음악경연대회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경연대회인데, 여기에 리코더부를 만들어서 독주와 합주부분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습니다.
류기준 / 전쟁이 끝나고 50 60 년대 우리나라가 어려웠을 때, 발로 하는 풍금도 없는 학교가 수두룩했습니다. 아버님은 음악교육 과정을 편찬하면서 적당한 악기가 무엇이 있는지 고민을 하시다가, 일본이나 유럽 쪽의 악기들을 벤치마킹 하셔서 리코더라는 악기를 초등음악
교육을 위한 악기로 채택을 하셨습니다. 박재훈 교수님, 정세문 교수님이 함께 리코더를 채택하신 분이었고, 그 뒤에 국내에서 엔젤 악기사가 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리코더라는 악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현장에서 학교 선생님들을 위해 교육하고 여러 곡들을
편곡하고 작곡하고 하며 발전 시켜 나갔습니다.
이용일 / 류덕희 교수님과 정세문 교수님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창환 / 저는 류덕희 교수님이 한국음악교육의 기초를 닦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 두 분 다 은사 같은 분이십니다. 두 분의 공통점은 류덕희 교수님과 정세문 선생님이 하는 내용 즉 음악교육 방향이 같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류덕희 교수가 교육과정에 리코더 교육을 넣은 것은 혁명적입니다.
기 청 / 음악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 음악을 통한 창의성계발 등 참으로 우리나라 음악교육 발전에 큰 공로를 하신 분입니다.
이용일 / 그리고 유머감각도 뛰어난 선생님이십니다.
이상만/ 유머가 많아 많은 사람들이 류덕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만일 류덕희 선생님이 코미디 작가였어도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 분 세대에 경상도에 최인찬이라는 작곡가가 있었는데 그 분 또한 유머감각이 뛰어나
셔서 "류덕희 선생님과 최인찬 선생님을 유머 시합을 시켰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돈도 많이 벌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충청도에서 태어나서 충청도 사투리를 가끔 씁니다. 하지만 류덕희 선생님은 너무 깔끔한 서울말을 썼습니다. 서울말과 서울 변두리 말 즉 서울의 사투리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서울 변두리 말 흉내를 잘 내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어의 구사 능력이 뛰어났으며,
말솜씨가 참 좋았습니다. 선생님의 교육 철학을 정리 하자면, 선생님은 일반식 교육의 선두자입니다. 군정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교육 사조를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하였고 '조금 한국적인 교육 방법을 한국사람들에게 맞게 음악 교육에 적용해야겠다' 그리고 '음악교육을 실시하면 교양 있고 아주 튼튼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한국 사람에게 맞는 교육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기 청 / 류덕희 교수님은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 진실된 교육을 하셨으므로 음악교육의 가치를 높이 올려놓으신 분입니다.
장창환 / 교수님은 예술 무용(스포츠 댄스)도 잘 하셨습니다. 그는 정말 열정적, 낭만적, 인간적인 분이십니다.
이용일 / 어머니와 결혼은 어떻게 하신겁니까?
류기준 / 큰아버지가 아시는 지인을 통해 중매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 저는 류 교수님이 낭만적인 분이시기에 분명 연애결혼 하셨으리라 믿었는데요.
조효임 / 류 선생님께서는 취미 활동으로 볼룸댄스를 하셨는데 프로 수준으로 경연대회도 나가시어 입상도 하셨습니다. 또한 매년 서울교대 체육관에서 볼룸 댄스 연주회도 여시었는데, 춤을 추실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몸이 날렵한 멋진 댄서가 되셨습니다. 삶의 여유를 가지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음악교육에서도 선구자라고 생각합니다만, 'create and fun'이라는 슬로건이 생각날 만큼 여러 분야에 선구자적인 활동을 하셨습니다. 음악교육 초창기 단계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특히 초등음악교육에서 리코더로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인간적으로도 해학이 있으셨습니다. 점심시간에 학교 근교에 있는 우동이나 모밀 한 그릇을 대접해드리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으셨지요. 특히 서울교대 교수연수회를 가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유 교수님의 유머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목적지에 도달하여 교수님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셨습니다.
기 청 / 저희들과 같이 모이면 교수님은 음악교육에 대해 강의에서 못 다한 내용과 진실된 교육의 원리. 음아교육의 제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로 저희를 지도 해 주시고, 끝나고 혜어질 때에도 무언가 주시려는 참 스승이셨습니다.
이용일 / 집에서는 어떤 분이셨나요?
류기준 / 저희 누이가 음악전공을 하면서 피아노 연습을 하였는데 "그 부분 다시 쳐봐"라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저에게 음악을 권하셨는데, 저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웃음). 지금은 다시 돌아왔지만 그때는 유도를 하였습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 한국 리코
더 아카데미의 초대 이사장을 하셨고 조효임 교수님이 2대 이사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단체를 모아서 리코더를 교육하고 연주하는 일을 하셨는데 그 일이 단절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저는 리코더 아카데미를 후원하고 리코더의 하드웨어적인 분야를 공부하고 개발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연주홀과 연습실도 운영하고 있고요, 연주회 기획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을 통해 리코더를 하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 지길 바랍니다.
이용일 / 류덕희 선생님으로 인해 국내음악계에 끼친 영향이 있을까요?
기 청 / 우선 후학들을 위해서 음악교육의 대한 이론과 원리를 알게 하셔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많은 개선을 하게 되었습니다. 류덕희 선생님은 음악교육이 단순한 음이나 노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 내지 정서순환을 위한 방법을 널리 펼치셨습니다. 저서를 통한 음악교육 방법 방법에 대한 학관 확립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음악교육이 계속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손꼽히는 음악가이며, 후진들을 이끌어 주시는 리더십이 강한 지도자입니다.
정리_구수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10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선생님(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선생님 (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장창환선생님 (서울교대 명예교수)
조효임선생님 (서울교대 명예교수)
기 청 선생님 (전 강남교육장)
류기준 선생님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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