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2월호
우리나라 음악서적의 개척자
신재복 사장(대한음악사)
음악자체가 영세한 시기에 대한음악사를 설립하여 음악서적이 거의 없던 시기에 외국의 악보를 수입하여 음악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재복 사장(1924∼2011)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단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 1962년 창립 이래 반세기 기업역사를 자랑하는?국내 대표적인 클래식 전문기업 대한음악사를 창립하였다. 1980년 7월, 음악전문월간지 [월간음악] 공로상을 수여받았으며 1993년 5월에는 대한음악사 예술의전당 지점을 개설하였다. 1994년 5월 외서 수입업을 등록, 국내의 열악한 클래식 악보와?음악서적 분야를 개척하고자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에서?외서무역업을 시작하였다. 2001년 2월 쇼핑몰과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 구축, 2008년 9월 대한음악사 명동점에 ERP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2009년 5월 대한음악사 분당지점도 개설하여 국내 최대의 클래식 악보, 클래식 CD, DVD, LP와 소품 등 클래식에 관련된 모든 품목을?최다 보유하고 있다.
일시: 2015년 11월 12일(목)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한돈(강원대 명예교수)
이승운(피아노포르테 대표)
신원석(아드님, 대한음악사 대표)
이형준(대한음악사 디자인오디션 수석 디자이너)
1. 신재복 사장의 성장 과정
2. 신재복 사장과의 첫 만남
3. 신재복 사장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우리나라 음악계가 이만큼 발전 할 수 있게 큰 공헌을 하신 신재복 사장님의 업적을 회상하면서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신재복 사장님은 항상 긍정적이셨고 누구나 가면 꼭 한 말씀 하셨습니다.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사람을 만나면 근황부터 물으시고 그만큼 넉넉한 사람이셨습니다. 음악가들은 존경하고 신뢰했던 분입니다. 신 사장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아드님이 먼저 말씀해주세요.
신원석_ 아버님께 형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6.25전쟁 때 북쪽에 계실 당시 사고로 형님을 잃으시고 그 이후 아버님은 27살에 남쪽으로 내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일_ 자제분은요?
신원석_ 저와 누님만 두 분입니다.
이용일_ 음악을 하시나요?
신원석_ 다들 음악을 배우셨는데 누님 두 분은 중간에 미술로 전환하셨고 저는 음악을 배우다가 운동을 했습니다.
이용일_ 음악을 시켰는데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이 재미있네요. 음악이 적성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럼 처음에 대한음악사가 어떻게 창립되었는지 아시나요.
신원석_ 원래 대한음악사를 하시던 분은 바이올린을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대한음악사를 시작하시고 1년도 안 되어 미국으로 이민갈 일이 생기셔서 다른 하실 분을 찾다가 아버님을 아셔서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셨습니다.
이용일_ 김형주 선생님은 그 점에 대해 잘 아시는지요.
김형주_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가까운 친구죠. 연주활동이나 창작활동을 하는 음악인들에게 절대적 필수요건은 악보입니다. 대한음악사는 우리나라의 연주계를 위한 모든 악보의 공급처였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계에 기록할만한 업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용일_ 원래 대한음악사의 처음 상호가 서울음악사였죠. 서울음악사였는데 신재복 사장님이 인수하면서 대한음악사로 바뀐 과정 이상만 선생님은 아시나요.
이상만_ 1957년에 안병소씨가 서울음악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2년 뒤 신재복 사장님이 안병소씨를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안병소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니까 자기를 도와주던 사람한테 자연스럽게 인계해서 1962년에 대한음악사가 그 똑같은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출생지가 함흥이라고 되어있는데 함흥이 아닙니다. 함흥이 큰 도시이니까 함흥이라고 하는데 신재복 사장님의 출생지는 경평입니다. 경평은 함흥의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가문은 평산 신씨이고 1.4후퇴 때 남한으로 넘어오셨고 집안은 비교적 깨인 집안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북쪽에서 함흥상업학교가 아주 유명한 학교인데 거기를 다니신 걸로 전해 들었습니다.
이용일_ 결국 안병소 선생님과 신재복 사장님간의 신뢰가 이어지고, 안병소 선생님이 사람을 잘 고른 것 같습니다. 대한음악사가 어렵게 악보수입 등 어려운 일들을 했잖습니까. 인구도 많지 않았고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아니고 대단한 집념입니다.
김형주_ 원래 안병소 선생님이 처음에는 서울음악사로 가게를 열었습니다. 신재복 사장은 그때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안병소 선생님 밑에서 가게 운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병소 선생님이 병으로 못하게 되시니까 신재복 사장한테 인계를 한 것입니다.
이용일_ 안병소 선생님이 하실 땐 책이 많지 않았습니다. 바이올린 책들을 위주로 하고 악기도 팔고요. 대한음악사로 오면서 확장을 했죠. 본격적인 우리나라의 도서공급으로써는 신 사장님이 처음이라고 봐야하죠. 이상만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이상만_ 저는 안병소씨와 같이 일할 때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철두철미하고 자상했습니다. 명동에 있는 대한음악사는 음악가들의 사랑방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악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신재복 사장님의 결정적인 역할은 음악회 표를 팔았습니다. 전체 음악회 표의 반을 대한음악사에서 팔았습니다. 대한음악사를 끼지 않으면 음악회가 잘 안 되었습니다. 더 가까워진 건 광복30주년 기념음악제를 할 적입니다. 사무실이 명동 국립극장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이용일_ 그곳이 만남의 장소였죠. 새로운 책이 들어오면 사기도 하고요. 이한돈 선생님의 첫 만남이 언제이신가요.
이한돈_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학교 행사를 위해 후원을 요청한 곳이 바로 대한 음악사입니다.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회를 맡았을 때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 외부의 협찬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음악에 관계된 기업이 없어 협찬 얻기가 쉽지 않았는데 대한음악사 신 사장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큰 도움을 주셨지요. 또한 음악회 포스터는 꼭 대한음악사에 붙여야만 했습니다.
이용일_ 이승운 선생님은 첫 만남이 언제이신가요.
이승운_ 1973년도에 음악춘추사의 노 사장님이 콩코네 테이프를 처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명동에 있는 대한음악사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이용일_ 이형준 선생님은 첫 만남이 언제이신가요.
이형준_ 저는 중학교2학년 때 처음 뵈었습니다. 지금 현 대음악사사장과 저는 친구입니다. 20년 전부터 신재복 사장님과 일을 했습니다. 그때 제일 가까이 뵈었죠. 어떻게 보면 아들보다 더 가깝게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용일_ 제가 볼 때 그 분이 책을 별로 안 보시는 거 같은데도 저에게“이 교수 이런 책이 들어왔어”라고 말을 하셨죠. 신재복 사장님은 즐기면서 하셨고 오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기쁘게 해주셨습니다. 책도 안사고 보고만 가면 속상할텐데 불평조차 하지 않는 넉넉한 분이셨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김형주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형주_ 신 사장이 인간성이 좋습니다.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이 좋았기 때문에 사람이 잘 따랐습니다. 결국 그런 것이 사업에 도움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명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거래장소로 뿐만 아니라 음악인들이 교류할 수 있는 중개역할도 했습니다. 단지 거기에서 상업행위를 한 게 아니라 음악인들의 휴게소 같은 곳이었죠. 인간성으로 봐서는 사업자로서 덕이 될지도 모릅니다. 대한음악사가 개인의 기업체가 아니라 음악계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할까요.
이용일_ 신재복 사장님이 우리나라 음악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상만 선생님이 말씀해주세요.
이상만_ 책을 보급한 점은 음악문화의 확산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입지를 잘 살려 운영을 다방면으로 했지요.
이용일_ 악보공급을 해서 작곡계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악보를 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서 악보를 사보로 한 일도 있었지요. 신 사장님은 음악예술잡지를 일본에서 수입했습니다. 그 잡지에는 매월 일본의 새로운 현대음악이 나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작곡계가 발전하는데 일본의 음악예술잡지가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 모릅니다. 물론 피해도 많이 줬습니다. 거기까지 가야하는 단계가 있어야 하는데 다 무시하고 따라 붙었으니까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 작곡계에서는 기초 없이 곡을 쓰다 보니 갈 길을 잃어버리고 헤맸습니다. 주관이 확실히 없는 사람들, 일본어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니까 오히려 해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 잡지로 인해 우리도 덕 보고 신 사장님도 덕을 보았지요.
이한돈_ 저는 음악 활동을 하면서 대한음악사에 자주 들렸습니다. 신 사장님은 음악하는 분들의 안부를 꼭 물으시고 안부 전해달라는 얘기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자주 들리다 보니까 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이 교수, 어느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음악책이 있는데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말씀하셔서 2층으로 올라가서 여러 가지 음악 이론 책과 악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론 책들과 악보들은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셨던 흔적들이 담겨 있는 어느 분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들과 악보는 미국에서 공부하셨던 분이 “신 사장님이 아끼는 사람한테 전달해서 잘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이 교수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셔서 책을 받아서 제 연구실에 놓고 지금도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또한 강원대학교 음악학과 음악 자료실에 책들과 악보가 많이 부족하여 신 사장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신 사장께서는 기꺼이 허락 하시여 음악학과 자료실에 여러 책을 기증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이용일_ 육하원칙에 맞으면 도와주시는 분이라 아마 그렇게 해서 더 사업도 번창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분이 베푼 만큼 더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이승운 선생님은 출판 쪽에서 볼 때 어떠신가요.
이승운_ 신 사장님은 어디 학교 입시곡이라고 하면 그대로 뽑아서 주시고 나중에 문제생기면 교통비까지 다 드리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 어느 선생한테 배우고 있다 그러면 그 곡도 뽑아주셨습니다.
이용일_ 이형준 씨는 사장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음악계에 어떻게 공헌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이형준_ 그 당시 저에게는 어릴 때의 첫 직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런 것을 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음악인들이 많이 오신다는 건 신기해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하루는 일할 때 나프탈린에 중독이 되어서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환기가 안 되는 부분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씀을 하시니까 직원들을 위해 에어컨을 바로 달아주셨습니다. 당시 에어컨이 상당히 비쌌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런 부분 때문에 많은 음악인들이 모이고 존경하고 그랬나보다 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했습니다. 후에는 대한음악사라는 곳이 음악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라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이용일_ 그 뒤에 대한음악사가 영업이 잘 되는걸 보고 몇 개가 나왔다가 다 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이 잘된다고 해서 따라가다 잘 되는 사람 거의 못 봤습니다. 결국 신 사장님이 참 경영을 깨끗이 했던 것 같습니다.
김형주_ 아주 다정하고 친절하게 인간적으로도 높이 살만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음악계 얘기도 하고 신 사장은 질문도 많이 했습니다. 전문 외국 작품은 대한음악사에서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도 올라와 대한음악에서 악보를 구해서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용일_ 바이올린 책은 동네에서도 파는데 부모들도 그곳에서 안사고 대한음악사에서 사더라고요. 부모들이 대한음악사에 가야 한다는 인식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만큼 신뢰가 있는 회사로 만들기까지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셨겠죠.
이상만_ 그리고 신재복 사장님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끝없이 했습니다. 지금은 정보화시대이지만 아날로그 시대를 멋지게 사신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람과 사람의 입김으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마 세계에서도 드물 겁니다.
이용일_ 요즈음 웬만한 악보는 인터넷에서 인쇄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거에 대비도 해야 하고 대한음악사가 있음으로써 우리나라에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좋은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형주_ 우리나라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대한음악사가 해온 역할은 따로 있었고 그 역할은 이제 평가 받아야 하죠. 우리나라의 음악발전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승운_ 음악인 중에 신재복 사장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신 사장님은 반 음악인이었습니다.
이용일_ 음악가의 경조사도 다 챙겨주셨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악보를 복사해서 사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애써 만든 사람들은 손해 보지 않냐고 말하면서요. 그 책이 팔림으로써 다음에 다른 책도 나오니 정당하게 책을 사라고요. 악보를 공급하는 쪽이 건강해야 우리나라의 음악전체가 튼튼해집니다. 그런 점에도 우리 음악가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악보를 몰래 쓰는 건 범죄행위입니다. 음악가들이 바르게 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대한음악사
명동본점_02)776-0577/ 예술의전당점_02)597-3157/ 분당점_031)707-7823~4
정리_김수현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1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한돈(강원대 명예교수)
이승운(피아노포르테 대표)
이형준(대한음악사 디자인오디션 수석 디자이너)
신원석(아드님, 대한음악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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