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 / 음악춘추 2015년 1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5. 2. 1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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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월호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
(1956 ~ 2014.7.24)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은 1956년 서울 태생으로 12세 때, 서울시향과 데뷔 무대를 가진 뒤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명교수 이반 갈라미언을 사사했다. 19세 때 코네티켓 주립대 교수로 임명돼 3년간 일하다, 피바디 음대와 맨하튼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뒤 1985년 브뤼셀에서 열린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금메달 (2등상) 수상하였고, 86년 미국 국립예술기금위원회(NEA)의 지원 대상 솔로 리사이틀 리스트로 뽑히며 본격적인 바이올린 독주자로 경력을 쌓아왔다. 1999년부터 인디애나 음대 교수로 재직한 그는 독일 뮌헨 ARD 국제콩쿠르, 덴마크 칼 닐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영국 런던의 벤자민 브리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핀란드 헬싱키의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등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내활동으로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개교하면서 초빙교수로 근무하였으며, 화음체임버오케스트라를 리드하여 세계적인 악단으로 육성하였다.

 

일시: 2014년 12월 2일(수) 오후 4시 00분
장소: 연세대학교 음대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조영창, 김상진, 김영호

1. 배익환 선생님의 성장과정과 학창시절
2. 배익환 선생님과의 첫 만남
3. 배익환 선생님의 음악세계
4. 배익환 선생님이 한국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이제 7년을 접혀든 음악춘추의 인물탐구는 우리나라 근대 음악사에 소중한 자료로 남을 것입니다. 인물탐구는 2007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배익환 선생님의 이야기로 이번 음악춘추 1월호를 조명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의 성장시절과 학창시절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조영창/ 저는 배익환 선생님을 14살 미국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김상진/ 저는 유학 가기 전까지 저의 아버지께 레슨을 받아 알게 되었습니다.

 

김영호/ 어렸을 때는, 집이 부유하였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의 아버지가 (前)박정희 대통령의 친구였습니다. 배익환 선생님 아버지의 강직한 성격으로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계기가 5.16 콩쿠르에 배익환 선생님이 1등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 (前)박정희 대통령이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국을 나가기 어려운 시기였는데,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김상진/ 외국에 나가기 힘들었어도, 5.16 콩쿠르에 1등 하면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이용일/ 그럼 유학을 갈 때 박정희 대통령이 도와준 것이 아닙니까?

 

조영창/ 아니요. 도와준 것이 아니라, 5.16 콩쿠르의 혜택이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것 이였습니다. 

 

김상진/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배익환 선생님이 유학을 간 동안에 아버님이 보증을 잘못 써서 가정이 어렵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영호/ 배익환 선생님이 그 어린나이에 가족들을 모두 다 미국으로 데리고 갔으니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김상진/ 배익환 선생님은 대학 등록금도 마련할 겸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지원했었습니다. 파이널 몇 명 안에 들어 오디션을 치루는 과정에 너무 어린 나이라는 이유로 떨어진 일화가 있습니다. 그 뒤로 코네티켓 주립대에서 학사도 다 마치지 못한 배익환 선생님을 뽑아주었고,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를 해결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일/ 정말 기적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김영호/ 그 당시 배익환 선생님은 10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돈을 다 벌어야하니 일이라는 일은 다 하였습니다. 또한 음악이 워낙 특출나서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그를 불러주었습니다. 그 당시 ‘타쉬‘라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 그룹에서 배익환 선생님이 연주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때 활동하던 타쉬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코네티켓 주립대 교수인 씨오더 암(Theodore Arm)교수가 같이 일을 하자고 제안하여, 배익환 선생님은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도 하지 않고 코네티켓 주립대 교수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말만 되면 그 친구 집으로 놀러가 같이 지낸 기억이 있습니다.

 

조영창/ 배익환 선생님은 선상음악회의 음악감독을 오랫동안 하였습니다.

 

김상진/ ‘선상음악회’ 는 콘서트 홀에서 연주하는 것과 똑같은 하나의 완전한 음악회를  말합니다.  후원하는 사람이 배익환 선생님을 감독으로 세워준 것입니다.

 

조영창/ 그리고 후원해 주신 분이 바이올린을 빌려주셨습니다. 오랫동안 쓸 수 있게 하여주었습니다.

 

김영호/ 악기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좋은 악기를 사지 못하였습니다. 선상음악회의 디렉터가 되면서 후원하는 사람이 악기를 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을 더 잘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힘든 와중에도 콩쿠르 우승을 하고,  대학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 음악인들에게 굉장한 희망을 주는 것 같습니다. 

 

김영호/ 배익환 선생님은 콩쿠르 나갈 때 많이 연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쁜 연주일정 속에서도 무섭게 준비를 하여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영창/ 여건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정말 재주와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길은 어딘가에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저도 그렇다고 봅니다. 기능이 뛰어나고 강한 사람은 잘 되더라고요.

 

김상진/ 우리나라 음악인들에게 기업이나 업체에서 후원을 많이 해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에서는 젊은 피아니스트에게는 유학 갈 때, 돈을 다 내주고, 여러 가지로 많이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배익환 선생님은 후원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돈을 벌며 혼자서 일어난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너무 편하게 후원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배익환 선생님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감회가 남다릅니다.

 

조영창/ 저의 아버지가 한양대에 교수로 재직 중이셨을 때, 한 달 월급이 3만원 이였습니다. 그리고 레슨비는 3000원이였습니다. 세 자녀가 모두 레슨을 받아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기에 괜찮았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 저희 모두 다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배익환 선생님은 자신이 가족을 이끌어 나가야 하니 저희보다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배익환 선생은 일을 하고 들어와도 악보 공부하느라고 바빴습니다.  일을 하는 것도 그냥 돈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에 흥미를 느끼면서 했습니다. 요즘 젊은 학생들을 보면 정신자세가 연약한 것 같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지,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건이 안 좋더라도 음악을 하고 싶다면 음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딘가에 있다고 봅니다.

 

이용일/  현재 우리나라를 보면, 부모의 능력에 따라 서울대, 고대, 연대가 정해집니다. 어릴 적에 음악을 시작하여 좋은 선생 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유복한 가정만이 가능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모의 뜻을 따라서 음악을 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습니다. 부모의 욕심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을 통해 우리는 많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영호 선생님은 배익환 선생님을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김영호/ 저는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나이가 같아 친하게 지냈습니다. 저희 둘 다 이대욱 선생님의 후배였는데 이대욱 선생님의 집으로 놀러 가면 레코드, 오페라 악보 등 음악에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대욱 선생님 집으로 간 어린 배익환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은 이대욱 선생님과 같은 아파트의 룸메이트로 살며 음악적 지식을 많이 얻었습니다.

 

이용일/ 그러면 김상진 선생님은 언제 배익환 선생님을 처음 만났나요?

 

김상진/ 저는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을 때 만났습니다. 뉴욕에 친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3살 때 피바디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 잠깐 가게 되었을 때 친구끼리 만나서 지내다 배익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해지게 된 계기는 체임버 뮤직 이였습니다. 체임버 음악을 하다 배익환 선생님과 친해진 것 같습니다.

 

김영호/ 배익환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조영창/ 우리가 뉴욕에 살 때 기회만 있으면 같이 모여서 실내악을 하곤 하였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은 한국에 귀국을 하여 저희 집에 많이 오셨습니다. 저희 집에서 실내악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용일/ 대학을 제대로 졸업을 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인정을 받은 것을 보면 배익환 선생님은 음악적으로 천재인 것 같습니다.

 

조영창/ 배익환 선생님이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확실하고 배울 욕심이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저는 학생들에게서도 많이 배웁니다.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자신이 배워야 할 것 을 확실히 아는 사람들은 그 답을 언젠가는 찾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천재’라는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음악인들에게는 모든 것을 다 갖출 수 있는 감수성, 똑똑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배익환 선생님은 미국에서 누구에게 배웠나요?

 

김영호/ 갈라미언에게 배웠는데, 그 시스템이 음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갈라미언 선생은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은 곡을 줘서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배익환 선생님은 음악적으로 일을(연주를) 많이 하다 보니 경험에서 음악성이 풍부해지고 지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음악을 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다면 , 그런 일들을 다 못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음악에 관심이 있었기에 그의 음악성이 빛을 발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용일/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갈라미안께 기초를 배우고, 음악성은 현장에서 몸으로 배웠다는 말씀이신 것이지요?

 

김영호/ 네

 

이용일/ 제가 보기에 배익환 선생님은 1가지를 가르쳐 주면 10가지를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우수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특히 배익환 선생님이 좋아했던 음악은 무엇이였나요?

 

김상진/ 어떤 종류의 음악이든지 다 좋아하고 음악의 편식이 없었던 분입니다.

 

김영호/ 바이올리니스트지만 바이올린 말고도 다 좋아하였습니다.

 

조영창/ 화음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있었습니다. 박상연씨가 “세계 제일가는 오케스트라 하나 만들고 싶은데 감독을 해주시겠습니까?” 라며 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전화를 받고 제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할 경우에는 지휘자가 없더라도 리더들이 좋은 사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상연씨에게 지휘자 없이 좋은 연주자들과 리더들로 연주를 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더니 너무 좋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누구에게 리더를 맡길까 이였습니다. 생각을 하다 리더십 강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생각하다 보니, 배익환 선생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배익환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용일/ 제가 화음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연습 과정을 들었는데요. 전혀 싸우지 않고  연습이 이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이 한국 예종에 와 있다가 왜 다시 나갔나요? 왜 한국에 남아있지 않았나요?

 

김상진/ 잘 모르겠습니다. 민감한 질문입니다.

이용일/ 배익환씨가 우리 음악계에 남긴 것을 정리해보면 무엇이 있을까요?

 

조영창/ 같이 공연도 많이 했지만, 참 좋은 음악가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음악가는 돈, 명예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는데,  배익환 선생님은 오로지 음악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참 음악성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배익환 선생님은 예술가의 마인드를 가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욕심이 없었습니다.

 

김상진/ 자신의  절대적 가치가 출세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이였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은 대여 받아쓰던 악기를  인디애나로 가면서 새로 만든 악기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악기가 만들어 진 날,  배익환 선생님은 주변사람들과 요리를 직접 하며 악기생일 잔치를 하였습니다. 주변에 제가 아는 많은 음악가들이 배익환 선생님과 좋은 경험을 많이 하였기에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은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음악가들에게 가장 인정받는 음악가였습니다. 배익환 선생님은 아무리 유명한 연주자가 있어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같이 연주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들, 자신이 인정하는 음악가들과 같이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대중들에게는 덜 인식이 된 것 같습니다.

 

조영창/ 그것이 후배나 친구들에게나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이용일/ 프로필을 보면, 큰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것도 없고, 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대학교수가 되었나요?

 

김영호/ 우리나라에서 덜 알려졌을 뿐이지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실력보다는 얼마나 대중화가 되었는지를 봅니다. 하지만 배익환 선생님은 그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유명세를 타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음악가들이 배익환 선생님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한다고 봅니다.

 

이용일/ 그럼 무엇 때문에 인정을 받았나요?

 

김상진/ 실내악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음악가들 사이에서 아무리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여도 음악가들이 보기에 실력이 좋지가 않으면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Columbia artist 소속 이였던 첼리스트 다니엘 리가 있습니다. 여러 공연을 한 굉장히 유명한 솔리스트였습니다. 그런데 음악가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실내악을 할 때 자신의 개인적인 주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영호/ 솔로만 하면 괜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과 같이 실내악을 하면 이런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게 되는 거죠.

 

이용일/ 여담이지만 CJ에서 화음을 후원할 때 CJ 사장실에 한 바이어가 찾아와 화음체임버의 사진을 보고 어떤 단체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장은 자신이 후원하는 단체라고 설명하였고, 바이어는 CJ가 그런 일도 하냐고 감동받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김영호/ 그 옛날에 솔로만 했던 시절에 실내악으로 인정을 받아 함께 공연을 한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음악가로서는 동료들에게 음악적으로 인정으로 받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데, 배익환 선생님은 동료들에게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조영창/ 너무 아쉽습니다. 좋은 인재인데 한창 때인 때 간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더 클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김상진/ 좋은 정신을 가진 친구라 음악의 꿈을 향해서 달려 나간 것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친구입니다. 음악적으로 참 좋은 영향을 준 친구입니다.

 

이용일/ 우리나라의 대학교육을 보면 솔리스트로서의 교육이 많습니다. 저는 좀 바꿔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호/ 배익환 선생님은 그 바쁜 와중에도 요리하는 것과 사진을 찍는 등 음악 외에 또 다른 취미가 있었습니다.

 

조영창/ 지난 2월 달에 저희들끼리 음식을 같이 해 먹은 적이 있습니다. 모두 다 행복해 하였습니다.

 

김상진/ 작년 이 때쯤 구미음악제를 같이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악화가 되어 가시니 우리나라 음악계의 큰 손실입니다.

 

조영창/ 정말 열심히 살다 가셨습니다. 정말로 아까운 인재입니다.

 

김영호/ 암 수술 끝나고도 한국에 남아 대관령에서 공연을 하신 분입니다. 다른 공연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그 만큼 음악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이용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열정을 지닌 분이 배익환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이 음악계에 계속 남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익환 선생님은 실내악이 얼마나 중요한 지 우리에게 인식시켜 주신 분입니다.

 

정리_구수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5년 1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피아니스트 김영호

 

첼리스트 조영창

 

바이올리니스트 김상진

 

바이올리니스트 故 배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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