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음악춘추 추모인물탐구 - 피아니스트 김형근 선생 / 음악춘추 2013년 4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4. 1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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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4월호

음악교육계의 숨은 개척자 - 피아니스트 김형근 선생

 

피아니스트 김형근(金炯瑾, 1918. 3. 1∼1982. 4. 14)선생은 서울 출생으로 경성사범학교 연수과와 동경예술대학 음악학부(속칭: 우에노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스위스 취리히 콘서바토리움 피아노 연주과 대학원 과정(1955∼1958)을 마쳤다.(한국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 일본 황후의 피아노 선생을 역임했던 다카오리 미야지, 스위스의 Max Egger·Edwin Fisher 사사)
서울대 사범대와 음대에서 조교수를 역임한 선생은 대구효성여대 음악과와 숙명여대 음대 교수,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실력파 피아니스트들을 배출해 냈다.
김형근 선생은 피아니스트로서 여러 회의 독주회를 개최하면서 드뷔시의 피아노 곡 등 수많은 곡을 초연하였고, 서울시향의  제77회 정기 연주회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협연하는 등 우리 악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법과 올바른 교수 방법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연구하는 피아니스트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또한 문교부 음악편수관과 서울특별시 문화위원회 음악분과위원으로서 여러 업적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순 한글 음악 용어를 제정 및 보급하는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음악통론인 『중등음악통론』을 비롯하여 『음악통론』 『고등음악통론』 『새중학 음악』 『고등음악교본』 『새 음악』 등의 저서를 발표하는 등 음악이론과 음악교육의 발전 면에 있어서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런 한편 작사자로도 활약하여 「조국」 「추억」 「장난감 코끼리의 자장가」 「고향의 벗」 「꽃 파는 소녀」 「봄노래」 등의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일시: 2013년 3월 13일(수) 오전 10시 30분
장소: 코스모스 악기 10층 
진행: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상만 (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조삼진 (건국대 사범대 명예교수)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김준규 (전 검찰총장, 변호사)

 

김형근 선생의 성장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김형근 선생님께서는 음악교육의 개척자이자 선각자로 2대 편수관을 지내시면서   음악용어를 한글로 새롭게 만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동안 선생님께서 남기신 업적들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자칫 잘못했으면 묻힐 뻔했고, 그렇기에 김형근 선생님에 대해 소개해 주신 이 마에스트리의 대표 양재무 선생님, 그리고 귀중한 사진과 자료를 잘 보관해 오신 아드님 김준규 변호사님, 민경찬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좌담회는 김형근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는 것은 물론 한국 음악사를 정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되기 때문에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되며, 문서로 잘 기록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김형근 선생님에 대한 우리들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이 후학들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김형근 선생님의 가족들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 검찰총장으로 계셨던 분의 아버지가 피아니스트이실 줄을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기일(忌日)에 맞춰서 잡지가 발간될 수 있게 되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부친이신 김형근 선생님께서 어떠한 환경에서 음악을 하셨는지 그 성장과정에 대해 김준규 변호사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준규_ 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서울 출신으로 조선 말기 홍문관 교리까지 오르셨고,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관직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관료집안에서 태어나셔서 유복하게 유년시절을 보내셨고, 그래서 아마도 그 시절에 피아노를 공부하시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제가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아버지께 활발하게 활동하실 당시의 모습은 알지 못하지만‘왜 아버지가 피아노를 하셨을까?’항상 궁금했었습니다. 이번 좌담회를 준비하며 미국에 계신 누님께 물어보니, 아버지께서는 학창시절에 학교에 있었던 풍금을 굉장히 잘 치셔서 도지사상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능이 있던 아버지께서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후에 피아노를 전공으로 삼으신 것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이용일_ 과거 우에노 음악학교(현, 동경예술대학)는 학생을 선발할 때 가정환경을 매우 중요시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환경’이라는 것이 금전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하는 그 과정을 중시하여, 공부를 시작한 시기가 조금 늦더라도 가정환경과 성품이 올바른 학생이라면 큰 제약을 두지 않고 받아주었습니다.
그 때 일본에서 우에노 음악학교에 다닌다고 하면 엘리트로 취급했고, 일본사회가 인정했던 그러한 학교였기 때문에 선생님 집안에서 음악 공부를 반대하지 않으셨겠지만, 대외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도 쉽게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허락하신 것을 보면 김형근 선생님의 부친께서야말로 진정한 선각자이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민경찬_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경성사범학교를 다닌 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당시 사범학교를 통하여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또 많은 음악가들이 사범학교를 통하여 배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용일_ 당시 사범학교의 음악교사 중에는 우에노 음악학교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사범학교에 대해서 이상만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시지요.

 

이상만_ 그 시대의 사범학교 중 평양사범학교, 경성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는 3대 사범학교라 불렸고,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했던 학생들이 장학금의 혜택을 받기 위해 많이 진학했었습니다.
사범학교를 통해 장차 필요한 지도자를 키우겠다는 일본정부의 계획 아래 이 세 사범학교는 음악 외에 미술 분야에서도 ‘우에노’ 출신을 많이 배출해 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형근 선생님도 경성사범학교의 좋은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으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 때는 예능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사범학교뿐이었기 때문에 김준규 변호사님 말씀처럼 풍금을 배울 수도 있었고, 풍금에 재능이 보이니까 여러 면에서 고려했을 때 우에노음악학교로 유학을 보내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용일_ 보통의 음악가들은 자녀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그 재능 또한 물려받는 경우가 많은데, 김준규 변호사님께서는 법조계에 계신 것으로 보아 부친께서 음악을 가르쳐주시지 않으신 것 같네요.

김준규_ 아마도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셨다면 음악의 길을 걸었을 테고, 검찰총장은 못했을 겁니다(웃음). 당신께서는 자신이 음악에 들인 노력과 헌신에 비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셨는지 막내인 저에게는 음악을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하는 집안에서 자란 덕택에 음악을 좋아하고 제 삶에서 친숙하면서도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형근 선생의 음악세계

민경찬_ 김형근 선생님께서는 서울시향의 정기 연주회에서 김동진 선생님의 지휘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협연하신 것 이외에 배재학당에서 드뷔시의 여러 곡을 초연하셨고, 경향신문에서 그 소식을 알리는 등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주능력 또한 인정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대구에서 이점희 선생님과 함께 대구 최초로 조인트 리사이틀을 가지신 것을 포함하여 수회의 리사이틀을 가지셨죠.

 

이용일_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연주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요?

 

이상만_ 네, 맞습니다. 라흐마니노프 곡을 비록 초연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연세에 그런 대곡을 협연하셨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며, 그래서 선생님의 연주를 직접 보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았던 것이 김형근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기도 했죠.
제가 지금 기억하기로 드뷔시를 초연하셨던 무대는 1954년 10월 즈음에 경향신문사의 후원으로 이루어졌고, 연주에 관한 기사도 났었어요. 사실 그 연주뿐 아니라 초연하셨던 곡이 많이 있으셨는데, 그 중에서도 드뷔시 음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앞서간 분이셨고, 그렇기 때문에 취리히로 유학을 가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김형근 선생님의 스승이셨던 Max Egger 선생은 당시 드뷔시 음악의 해석에서 최고의 귄위자였고, Edwin Fisher은 베토벤 음악의 해석에서 세계적인 대가였거든요.
그래서 아마 귀국 후 〈베토벤 피아노의 연주법〉이란 논문을 쓰셨던 것 같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교수법을 다룬 최초의 논문일 것입니다.

 

이용일_ 김형근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드뷔시 음악을 소개하신 분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김준규 변호사님께서는 부친의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준규_ 아버지께서 연주하셨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열정’」을 저는 가장 좋아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제가 취리히를 방문했을 때 다시 살아났습니다. 제네바 출장을 가게 된 것을 계기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유학하셨던 취리히를 둘러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유학시절 사진을 들고 가이드의 도움으로 그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았지요. 사진 속의 장소가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고, 같은 자리에 제가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장소를 찾느라 스위스 현지 분들에게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드리니 다들 50년 전에 동양 사람이 이 곳에 와서 음악 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습니다. 아마추어이시지만 사진도 수준급으로 찍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공부하셨던 취리히를 거닐다 보니 50년 전에 아버지께서 홀로 이 먼 곳에 오셔서 머물다 가셨구나 하는 마음에 벅찬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겠습니까. 그 시절 유럽 취히리까지 오셔서 음악 공부를 하시고 귀국하셨다니 당시로선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 뿌듯했습니다.

정리_배주영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4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이용일 (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준규 (전 검찰총장, 변호사)

 

 이상만 (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조삼진 (건국대 사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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