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채리숙
긍정의 힘으로 살아 온 음악 여정
1958년 10월 11일 서울시공관에서 한국오페라연구회에 의해 막을 올린 오페라 「토스카」에 24살의 앳된 소프라노가 주인공인 토스카 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당시 그녀는 조선일보 주최 신인 연주회와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 협연, 그리고 문교부 콩쿠르 1위 입상 등으로 음악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신인이었다. 그녀에게 「토스카」는 생애 첫 오페라였고, 한국의 관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부터 국내 음악계에서 프리마돈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소프라노 채리숙 선생이다.
성과 이름이 잘 어울려 예쁜, 독특해서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을 이름, 그리고 직접 만나 보니 칠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젊은 시절을 궁금하게 만드는 고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기자들을 웃으며 반갑게 맞아 준 채리숙 선생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솔직하고도 재미있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풀어나갔다. 그래서 앞으로 더 잊혀지지 않을 채리숙 선생과 인터뷰를 지면에 옮긴다.
삶을 이끄는 원동력, 긍정의 힘
"아무래도 첫 번째 공연했던 「토스카」 무대가 가장 기억에 남지요. 당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연주, 협연, 콩쿠르 등으로 이름이 알려지며 선배님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래서 오페라에도 캐스팅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무대가 작든 크든, 관객이 몇십 명이든 몇천 명이든 최선을 다하고자 했어요. 그것이 예술가의 본래 정신이겠지만요."
채리숙 선생에게 음악가로 살며 가장 기뻤던 순간, 속상했던 순간은 결국 음악에 대한 욕심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연주를 하게 되었을 때, 연주가 뜻대로 잘 되었을 때는 행복한 것이고, 바라던 무대에 서지 못하거나, 연주가 흡족하지 않았을 땐 속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주어진 상황에 대해 불평하는 법이 없다.
"스스로 목표를 정해 열심히 매진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남을 시기한다든가 경쟁심을 갖고 남이 안 되길 바라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타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거나, 욕심이 과하면 오히려 자신에게 나쁜 결과가 오지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젊은 음악가 중에 무대에 자주 선다고 교만하게 구는 이가 있으면 가만히 보고 있질 못해요. 직설적인 성격이라 한 마디 하긴 하는데, 그래놓고 나중에 후회를 하지요(웃음)."
이미 최고의 자리에 서봤기 때문에 후배들을 향한 따끔한 충고도 가능한 것이겠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최고의 자리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선생 역시 과거 우리나라의 암울한 역사와 함께 험난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그리고 유학시절
평양 출신인 선생은 어릴 때부터 이미 노래 잘하는 어린이로 TV 방송에 출연했으며, 중학생 때도 여러 무대에서 노래할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2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레슨을 받기 시작해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불러 콩쿠르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고 1․4 후퇴 때 22일간 걸어서 남한에 내려온 선생은 피란을 다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음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란 교사(校舍)를 세운 이화여대에 진학해 채선엽 선생 밑에서 4년 전액 장학금(미스 풀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다양한 연주 활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세계적인 음악가의 무대를 접할 수 없었지요.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악보도 없었고, 어렵사리 구한 테발디, 마리아 칼라스 등의 LP판을 들으며 공부했답니다. 그래서인지 더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같네요."
당시 문교부 주최 유학 시험을 거쳐야만 유학을 갈 수 있었던 시절, 채리숙 선생은 서울시향 협연 때 인연을 맺은 지휘자 김생려 선생의 추천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루돌프 빙 총감독의 초청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유학 시절 정말 어려움이 많았지만, 피란 시절 온갖 고생을 다 해봤기 때문에 강단이 생겼는지 이런 각오를 했었어요. '내가 한국에서는 소프라노로 활동했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당시 5불씩 주고 이론 레슨을 받기도 하며 줄리어드 음대 입학 시험을 치렀고, 반액 장학금을 받으며 2학년으로 입학했습니다."
그 때 선생의 나이는 28세였으며, 줄리어드 음대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11명 중에는 정경화, 정명화, 한동일 등이 동기로 있었다. 그리고 헝가리 출신의 프레쉘(Freshel) 교수를 사사한 채리숙 선생은 스승의 추천으로 두 차례의 오디션을 치른 후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 마스터 클래스'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그 때 음악제에 참가하게 해주셨고, 매니저처럼 돌봐주신 프리드린트 바그너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은인입니다. 무거운 짐도 못 들게 할 정도 예뻐해 주셨고,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 바이로이트 가서 그런지 많은 관심을 갖고 돌봐주셨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프리드린트 바그너 선생은 채리숙 선생이 바이로이트에서 생활하던 3년간 집세, 생활비, 레슨비, 용돈 그리고 레슨 코칭까지 모두 책임져 주기도 했다. 바그너의 손녀인 프리드린트 바그너 선생은 매년 오디션을 통해 지휘자, 성악가 등 10여 명을 선발해 바이로이트 음악제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제,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예술제 중 하나인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바그너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것이 특징이다. 음악제의 명성답게 세계적인 음악가가 모이는 이 곳에서 채리숙 선생은 오페라와 관련된 여러 가지를 지도받으며 오페라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베를린 공대에서 유학 중이던 지금의 남편을 지인의 소개로 만나 결혼을 했고, 자녀를 출산하기도 했지만, 채리숙 선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베를린 음대 오페라과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해 학업을 이어나갔다. 선생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바이올리니스트 손리사(계명대 교수)가 그 중 한 명이다.
더 나은 한국 성악계의 미래를 기대하며
그리고 1974년 귀국하여 서울과 대구에서 귀국 독창회를 갖고 이화여대에 출강하다가 그 해 가을부터 중앙대 음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25년간 후학을 양성했고, 두 차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중앙대에 있을 때도 긍정적인 자세로 학교 일들을 추진해 나갔었어요. 학장으로 있을 때는 회의시간에 동료 교수님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지요.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라'는 속담이 있듯이 '나는 이화여대 출신이지만 중앙대를 내 학교처럼 생각한다'고요."
그리고 귀국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서울예고에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선생은 "사실 요즘 어린 학생들이 나이 먹은 선생님한테는 배우려 하지 않아 이제는 예고에 그만 출강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마침 신입생 한 명을 지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학생이 한 학기만에 실기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고 귀띔해 준 선생은 자신의 레슨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모습을 본 기자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스승 밑에서 제자의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학생들에게 늘 연습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운다고 할 때 옆에 앉은 강사가 이렇게 저렇게 해라 말해도 핸들을 잡은 사람은 나잖아요. 마찬가지로 선생인 내가 가르쳐도 결국 소리는 학생이 내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의 방법을 찾아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본인의 것을 개발함으로써 발전하는 것이지요. 꼭 하루에 몇 시간씩 노래하는 것만 연습이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도 노래를 어떻게 부를지 고민한다면 그것 역시 연습이지요."
채리숙 선생은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에는 푸치니의 오페라를 가장 많이 사랑했지만, 나이가 들고 생각이 성숙해지면서 오페라보다는 독일 가곡에 더 큰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진정한 성악가가 되려면 가곡을 많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선생은, 곡에 따라 테크닉이 달라지는데, 과거 리트를 오페라식으로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성악가도 관객도 리트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해서 성악가가 크게, 고음을 노래하면 박수가 터져 나오던 시절도 있었지요. 철학적인 독일 리트를 노래함으로써 소리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 그리고 작품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다 깊이 고민하게 되더군요. 진정한 성악가가 되려면 오페라, 가곡 등 여러 방면에서 깊이 있게 연구하길 바랍니다. 좋은 소리를 지녔다고 해서 훌륭한 성악가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선생은 한국 성악가의 실력이 세계 최고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특히 요즘에는 국내에도 실력 있는 교수들이 많고,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무대도 한국에서 접할 수 있음은 물론 음반, 자료, 악보 등 풍족한 환경 속에서 자기 계발을 하기가 수월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음에도 유학을 너무 많이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외국에서 견문을 넓히고, 보다 많은 지식을 쌓는 것은 좋지만, 다소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도 너나할것 없이 유학을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차라리 그 시간과 물질을 다른 방향에 투자해 한국에서 관련된 진로로 나간다면 얼마든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선생은 요즘에는 상황이 다소 개선된 듯하지만, 무대에 서는 사람만 계속해서 기회를 잡는 듯 하다며, 이는 옳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페라단 등의 단체를 이끌어 가려면 현실적이 어려움이 많겠지만, 음악계의 전체적인 수준 향상을 위해서 실력있는 신인을 발굴해 골고루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실수가 있더라고 그런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인내를 갖고 신인들을 이끌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화여대 음대와 줄리어드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바이로이트 음악제 마스터 클래스에서 수학, 독일 베를린 음대 오페라과를 졸업한 소프라노 채리숙 선생은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등 다수의 교향악단과 협연했고 수백여 회 이상의 무대에 섰다. 오페라 「토스카」, 「오텔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한국 초연했으며 여러 오페라의 주역으로 사랑받았고, 독일 함부르크 바그너 음악협회 주최 초청 연주회 및 독창회, 함부르크 스튜디오 오케스트라 협연 등 다수의 공연을 가진 바 있다. 독일가곡연구회 회장과, 중앙대 음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문화방송 특별상, 한국 음악상을 수상한 선생은 〈모차르트 26 가곡집〉, 〈베토벤 42 가곡집〉, 〈하이든 32 가곡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글․배주영 기자 / 사진․김문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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