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세광음악출판사 박신준[朴信埈] 회장 / 음악춘추 2016년 5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1. 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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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세광음악출판사 박신준[朴信埈] 회장

세광음악출판사 고 박신준 회장은 1917년 평남 중화에서 태어나 안주중학교를 졸업하고 1.4후퇴 때 월남한 뒤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피란지인 대구에서 1953년 2월 세광출판사를 설립해 대중가요집을 만들어 보급했다. 전쟁 속에서 유행가를 따라부르는 것 외에 아무런 오락수단이 없던 시절, 사람들이 가요를 쉽게 부를 수 있게 노래책을 만들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1966년엔 월간 '가요생활'을 창간하여 가요계 소식을 일반에 전했고, 1970년대 들어 통기타 음악이 대중음악을 주도하자 기타 코드를 곁들인 <세광애창곡집>을 출간했다. 1970년대 후반 국내에 피아노가 보급되면서 바이엘, 체르니 등 서양 클래식 음악교본으로 영역을 넓혔다. 1984년 세광음악출판사로 사명을 바꾼 뒤 1988~1989년엔 중학교와 고등학교 음악교과서를 만들었고 1997년엔 <세광음악신문>을 창간하는 등 설립 이래 사반세기동안 줄곧 음악 출판에만 매달렸다. 그동안 내놓은 책만 해도 <우리 노래 대전집>등 가요 가곡집부터 <피아노전집>, <죽파가야금곡집>등 악보, <음악대사전>, <국악대사전>, <표준음악사전>등 사전류, <한국음악사>, <음악기초론>, <음악형식론>, <현대화성론>등 이론서까지 2천여 종이 넘는다. 국악 관련 서적과 악보를 출판하고, 도산기념관 건립기금을 내는 등 소리 나지 않게 활동했다. 또 새마을문고중앙회 회장으로 이동도서관 운영과 벽지도서 보급에 앞장서 1991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일시 : 2016년 4월 7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_(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_(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박세원_(세광음악출판사 회장)
이만방_(작곡가,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 박신준 회장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2. 박신준 회장과의 첫 만남 
3. 박신준 회장의 음악세계
4. 박신준 회장의 교육관
5. 박신준 회장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 오늘은 세광음악 출판사를 설립하시고 우리나라 음악계에 공헌하신 박신준 회장님에 대해 알아보고자 이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광 박 회장님하고는 세광하고 일본의 음악지우사(音樂之友社)가 계약할 때, 제가 일본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소개를 부탁받아서 박회장님과 알게 되었습니다.

김형주 : 지금까지는 우리가 음악인 위주로 해왔는데 오늘 음악 출판인을 하게 된 것은 아까 말씀하신대로 우리나라 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악보, 악서를 출판하여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용일 : 그렇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음악사전을 비롯한 좋은 자료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선, 제일 처음에 박회장님이 왜 가요 책을 만들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박세원 : 아버님이 가사집을 만들게 된 시기에는 우리나라가 전쟁 후라서 오락거리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대중가요를 따라 불렀는데 가사를 듣고 적으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따라 부르기 쉽게 가사를 적어서 공급을 해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노래 가사집을 만들어서 시험적으로 판매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호응이 좋고 많은 사람들이 찾다보니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일 : 회장님이 우리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착안하신 것입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세광 대중가요 책을 기억하십니까?

김형주 : 박신준 회장님은 한국 전쟁 때 월남을 해서 처음에 헌책방으로 시작 하셨습니다. 제대로 출판을 시작한 것은 대중가요 가사집입니다. 그 당시 서울역 앞에 4층 건물에서 작은 자리에 직원 3명을 데리고 시작하셨습니다. 대중가요 가사집이 출판할 당시 다른 출판사도 그렇고 좋지 않은 여론도 있었지만 출판이 되니 대박이 났습니다. 시골의 농사꾼도 가지고 다닐 정도로 대박이 났습니다.(웃음) 이후에도 여러 출판업계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동안 세광출판사 만큼은 착실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박회장님의 성실함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박회장님을 알게 된 것은 50년대 후반에 음악문화라는 월간지를 하고 있던 최영환씨와 함께 가서 출판하자고 박신준 회장을 설득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이성삼 선생의 ‘최신 음악통론’입니다. 그것은 모두 문고판입니다. 또한 이윤영씨가 번역한 ‘낭만파 음악의 조류’와 제가 쓴 ‘알기 쉬운 음악 감상법’을 문고판으로 출판했습니다. 그것이 세광출판사에서 낸 최초의 클래식 책입니다. 당시에는 출판한 책들이 팔리지 않아서 초판에 끝났는데 제가 쓴 ‘알기 쉬운 음악 감상법’은 꾸준히 이어져서 개편을 해서 국판에다가 제가 확대해서 다시 썼습니다. 지금도 출판 되고 있어서 세광출판사에서 가장 오래 동안 출판 되는 책일 것입니다.

박세원 : 네 제가 기억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이용일 : 이상만 선생님은 회장님을 처음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이상만 : 시기는 1958년 정도로 기억하는데요. 대중가요집을 만드는데 방송국하고 제휴를 하지 않으면 광고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또한, 어떤 대중가요가 인기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려면 방송국과 교섭을 해야 하기에 박회장님이 송영수라는 분하고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래서 저도 방송국에서 그 분을 마주쳤는데 보통분이 아니셨습니다. 평안도 사투리를 아주 강하게 쓰셨으며 얘기를 나누어 봤더니 굉장히 유식한 분이였습니다. 그때 기억으로는 애국심이 강했고 반공정신이 철두철미했습니다. 나중에 물어봤더니 본인이 학교선생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다닌 학교가 안주 중학교라는 굉장히 명문 학교라고 하였습니다. 안주라고 하는 곳은 궁중의 수를 놓던 매우 좋은 동네였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 아무래도 이만방 선생님이 계셔서 연령대 별로 다양하게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만방 : 제가 박회장님을 직접 만나 뵙고 교분을 쌓을 연배는 아니지만 60년 말과 70년대에 우리나라 악서들, 조각으로 돌아다니던 것들을 엮어 만든 악보가 태림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그 태림출판사의 클래식 부를 만든 분이 세광출판사 출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박회장님께서 특별히 서울연대 작곡과 출신들을 직접 뽑아서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박회장님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의 고향인 경남 거창에서는 시골이기에 음악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앞에 말씀하신 가사집을 통해서 가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이 오락거리가 마땅치 않아서 전쟁놀이나 유행가 따라 부르기를 하면서 놀았는데 가요집이 있어서 유행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60년대 초에 ‘학생 애창곡집’이라는 것이 나왔는데 이 책을 보면서도 세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세광 출판사에서 출판한 바이엘과 체르니를 손에 가지게 되었습니다. 헌책이라서 질이 좋지는 않았는데 피아노가 없어서 건반을 직접 종이에 그려서 건반을 만들어 연습을 하였습니다. 세광출판사에 대한 저의 어린 시절 기억입니다.

이용일 : 지금까지 세광 출판사의 탄생과정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집안에서 볼 때는 창업을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보십니까?

박세원 :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피난 때 대구에 가서라고 하셨습니다. 1953년 2월 12일, 피난정부에 세광출판사로 등록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대구에서 활발하게 하셨습니다.

김형주 : 어쨌든, 우리가 인물 좌담회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나라 음악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고 우리나라 음악 발전과정에 상당한 도움을 준 인물로 본다는 것입니다. 악보와 악사를 출판하는 출판사는 여럿 됩니다만 그중에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곳은 세광과 현대입니다. 현대음악출판사가 세광음악출판사보다 클래식 악보들을 4-5년 먼저 출판을 했었습니다. 후에, 세광의 사세가 확장되면서 회사의 체제도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태평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원수가 15-1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국산 피아노가 제작 시판됨에 따라 피아노의 보급이 급속히 확대되어 피아노 학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추세에 힘입어 피아노의 기초교본인 바이엘, 체르니, 하논이 출판 되었습니다.  

이용일 : 제가 현대에서 책을 많이 써서 알았지만, 언제 세광이 현대를 앞섰나요?

김형주 : 규모는 현대보다는 세광의 규모가 큽니다. 

이용일 : 제가 박회장님을 처음 만났던 당시, 일본지우사와의 박신준 회장님의 자리를 통해서 만들어 진 것이 ‘최신 명곡해설 전집(전26권)’입니다. ‘최신 명곡해설 전집’은 일본지우사에서 나온 책을 번역한 것인데 당시의 상황으로는 2년 반 만에 국판 각권300면 내외의 책을 26권이나 만드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명곡해설 전집‘은 우리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음악대사전‘도 신진출판사에서 발행했던 것을 인수하여 완전히 개정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이상만 : 사실 ‘명곡해설 전집’을 만든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음악대사전’을  만들었다는 것이 큰 업적입니다. 이 작업은 서울대 작곡과 출신인 서창업씨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서창업씨는 일본말을 잘하고 사보도 잘했기 때문에 번역을 통해서 큰 작업을 했는데 이를 출판하려니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습니다. 그래서 박신준 회장에게 찾아갔고 세광에서 출판하게 되었고 당시에 옆에 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출판 쪽에서 승산이 거의 없는 작업이었지만 박회장님은 ‘내가 그동안 대중가요를 출판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이제는 문화적 공헌을 해야겠다.’라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음악 역사를 바꾸는 큰 사업 이였습니다.

박세원 : 당시에 원고를 받으시고 몇 년 동안 내용을 보완 하셨습니다.

이상만 : 승산이 없었는데 회장님이 그 작업을 감행하신 것은 큰 용단이었습니다.

이용일 : ‘음악대사전’이 출판된 시기가 1982년이 맞나요?

박세원 : 네. 그렇습니다.

이상만 : 또 한 가지 중요한 업적은 국악 출판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음악대사전’이 출판 된 후 1984년에 장사훈 박사가 평생 동안 모아 정리한 ‘국악대사전’이 편찬 되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국악에 대한 책을 출판한 곳이 없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하여 장사훈 선생의 많은 저서가 출판 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우리나라 국악을 중흥 시키는데 기여한 큰 업적 중에 하나입니다. 

이만방 : 60년대 학번인 저희들 세대에서 세광과 현대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세광은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하여서 항상 서점에 가면 구석 한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전공자들에게는 현대음악출판사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음악대사전’이 출판되고 나서 세광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또한 이후에 활자체와 크기가 바뀌면서 책의 질이 좋아졌고 나운영 선생님의 책을 시리즈로 내기 시작하면서 음악 전공자인 학생들에게 세광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이용일 : 지금 말한 것처럼 세광에서 대학교재를 깨끗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이만방 : 그렇습니다. 좋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용일 : 그러면서 더 큰 시장을 찾아서 피아노 교본을 만들었고 나중에는 피아노 교본 출판에 가장 중점을 두었습니다.

박세원 : 지금도 피아노 교본을 가장 많이 출판하고 있습니다.

김형주 : 초창기에 세광이 출판을 시작한 것은 대중음악이지만 후에 순수 음악에 힘을 기울여서 좋은 양서, 악서, 악보를 출판하여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박신준 회장은 우리나라 음악 역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분입니다. 박회장 자체로도 단독으로 월남해서 이만큼 사업을 확장하고 음악출판을 주도할 만한 힘을 가졌다는 것이 보통 분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적으로도 인간성이 좋고 근검절약하는 분이며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대할 때도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용일 : 저도 박회장님의 성품이 대단하다고 느꼈던 일이 있습니다. 같이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대단히 검소한 점심을 시켜주었습니다. 바빠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만들어 놓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작업을 하셨는데 특별히 ‘음악 해설전집’을 만들 때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 돈이 워낙 많이 들어가는 작업인데 경제적인 것보다는 문화적 가치를 놓고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업을 가장 크게 봅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회사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나요?

박세원 : 앞에 말씀하셨다시피 시작은 대중가요로 했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클래식으로 방향의 전환이 많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저희 회사가 대중가요에서 그치지 않고 클래식까지 출판을 할 수 있지 않았나싶습니다.

이용일 : 그런데 ‘명곡 해설전집’은 재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박세원 : 그것은 전집이기 때문에 양도 많고 그만큼 값도 나갑니다. 많은 분들이 찾는 것 보다는 전공자 분들이 찾으시는데 이미 살만한 분들은 다 사셨고,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지금은 찾는 사람이 줄어서 판매가 저조해져 재판이 나오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김형주 : 1965년 사옥을 중구 쌍림동에 마련하였고 월간음악잡지, 소설 등 3-4개를 월간지로 냈습니다. 그 후에 1970년 3월 세광음악학원이 있던 경양 빌딩으로 회사가 이전하였습니다. 종로에서는 회사의 규모가 조금 줄었었습니다. 그 후에 1977년에 서부역 근처의 서계동에 4층 사옥을 구입하여 이전하였고 주변의 3-4가구를 매입하여 주차장도 만드는 등 사업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저는 단독으로 월남하여서 사업을 확장하고 기반을 다지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박회장님은 사업적으로도 성공하셨고 성격이 아주 강직하신 분이셨기에 이러한 업적이 가능했습니다. 

이용일 : 수문당이라는 출판사의 사장이 세광의 직원 이였습니다. 수문당은 우리 교수들에게는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계열로는 세광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림도 세광에서 나온 것인가요?

박세원 : 아니요. 태림 사장님은 저의 고등학교 선배이신데 음악도서에 관심이 있으셔서 이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이용일 : 이렇듯, 세광이 음악 출판계에 한 계보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교학사에서나 현대에서 책을 만들 때 다양한 출판사의 책을 샘플로 받았습니다. 그중에 세광의 책이 레이아웃이 가장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책을 만들 때, 음표 하나씩 잘라서 붙이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수정하려고 보내다가 붙였던 게 떨어져 나가는 등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박세원 : 제가 어렸을 때의 작업했던 것을 본 기억으로는 종이에 먹으로 5선을 그어서 음표 도장을 만들어 그 위에 하나씩 찍었습니다. 글자는 타자기로 찍어서 사진으로 인화하여 그 인화한 글자를 칼로 따서 다시 붙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용일 : 이렇게 책을 만드는 과정이 복잡했기 때문에 교정하는 과정에서 다 떨어지고 없어지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습니다.(웃음)  

이상만 :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음악출판을 하면서 세광만큼 다양하고 많은 책을 출판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음악 출판계에서 아주 기록해야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업을 3대를 이어서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대중가요를 통해 이익을 남겼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순수음악, 동요전집 등을 출판하여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우리나라 음악문화 저변을 닦는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상만 : 덧붙이자면, 다른 곳에서도 출판을 해서 책을 만들었지만 단기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광 출판사에서는 서양음악 이론서가 시장이 형성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계속 출판을 하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 제가 3월에 일본음악지우사에 방문하였는데 그곳에는 이전에 출판하던 책과 내용이 전부 바뀌었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접근 방법에도 변화를 준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음악가들은 아직도 옛날 것 그대로 쓰거나 번역을 사용하여 연구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컨텐츠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만방 : 제가 학교를 다니던 때, 교수님들께서 워낙 바쁘다 보니 저희는 책을 보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대학교육이 출판사에서 만드는 내용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지금 현재도 학생들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보고 스스로 공부하여 새로운 지식을 갖습니다. 새로운 지식의 길라잡이 역할을 출판계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제대로 만들어지는 책은 파급효과가 매우 큽니다. 강의실 안에서 학생들이 책을 보고 습득한 지식을 가지고 교수와 토론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현 30-40대 음악가들이 토론문화에 익숙해지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는 대학 강의실보다는 세광을 비롯한 음악 출판사 때문이라고 봅니다.  

김형주 : 여하튼, 박회장에게 고마운 것은 음악계의 행사에 꼭 참여하여 조금이나마 지원을 해준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엘더로 이끌어온 국민음악회 활동에도 도움을 주셨다는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음악계에 대한 협조도 남달랐고 성의 있게 한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아드님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난 후에는 파주에서 농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터리클럽을 이끌고 있는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초청받아 몇 차례 음악문제 강의를 했습니다. 꾸준한 봉사활동과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을 계속 하신 것은 따라야 할 인생과정을 마치신 분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세원 : 아버님은 회사에서 은퇴하신 후에는 새마울문고중앙회를 하시면서 이동도서관 운영과 벽지도서 보급에 앞장서서 1991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출판업계에서 오래 동안 일하신 공로로 1985년에 한국일보 주최 한국 출판문화상(문공부 장관), 국무총리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재무부장관상등을 수상하셨습니다. 그 밖에 70평생 동안 수많은 단체의 봉사와 협력으로 공로패, 상장, 감사장 등 200 여점을 각종 단체에서 받았다. 

이상만 : 새마을 문고로 지역의 문화를 일으키셨고 이것에 열정을 많이 쏟으셨습니다. 

이용일 : 이것은 대단한 업적입니다. 

이만방 : 저는 세광에서 앞으로의 악보 출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음악 출판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해서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지만 서구나 미국에서는 되는 것은 각 대학 도서관과 공립 및 사립 도서관과 기록되어야 할 장소에서 구입을 해서 저장을 합니다. 대학에서도 10부정도 사서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학생본과 전문가 지휘자 본이 따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도서관에서는 모든 책들은 더러워 져야한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구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제는 우리나라도 전자 악보가 세계시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역할을 세광이 앞장서서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 : 이 부분에 대해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박세원 : 저희가 그쪽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부터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나 상황이 맞지 않아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건이 형성이 되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용일 : 우리나라의 작품이 데이터베이스가 되어야 할 텐데, 새롭게 데이터를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만방 : 그러한 문제들은 현재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을 통해서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컴퓨터를 잘하고 악보를 만드는 분들이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과 협업을 하면서 출판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세광이 범위를 넓혀서 국제 시장에 우리나라 음악의 악보를 출판하는 일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용일 : 물론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대한민국의 음악가들이 공부를 안 합니다. 그렇다 보니 이러한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출판사에서는 출판을 하려면 뭔가 전망이 보여야 작업을 하는데 음악가들이 까다롭기만 하고 연구를 하지 않으니 선뜻 출판을 하기가 꺼려지는 것입니다.

이만방 : 제가 언급한 전자도서관은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 외국의 출판 사이트들에서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악보를 뽑고 있습니다. 또한 외국에서도 우리의 것을 요구 하는데 데이터가 없어서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작업을 예술문화 산하에서 하고 있는데 이를 세광과 협업 한다면 좋은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이용일 : 그 이전에 음악가들이 먼저 반성하고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술지상주의를 만들고 자꾸 강요하다보니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까지 음악 출판이 이어져 온 것도 출판사들이 잘 참으셨기에 이만큼 되었다고 봅니다. 앞으로의 세광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신 다면요?

박세원 : 저희 회사 입장에서는 주변 여건도 많이 바뀌고 아이티 분야도 많이 발전이 되어서 나름대로 상황에 맞춘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되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외국의 방식처럼 방대한 자료를 취급하는 것은 저희 회사 규모로는 조금 힘든 일입니다. 수요예측이 정확히 되지 않고 저희는 기업이기 때문에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는데 투자대비 수익이 얼마큼인지 예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저희가 만들고 있는 책자에 아이티 기술을 이용하여 시대에 발맞춰 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출판되는 책자에 바코드를 넣어서 인터넷에 저장된 자료를 연결하는 작업을 시도 하고 있습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5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김형주_(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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