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음악교육자 박재훈 선생 / 음악춘추 2012년 8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7. 30. 16:29

 

인물탐구 / 음악교육자 박재훈 선생

 

  음악교육자 박재훈 선생(1924년 2월 11일 ∼ 1982년 8월 ?일)은 강원도 삼척군에서 출생하여, 1942년 3월 25일 삼척 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삼척 미로공립초등학교 교사, 장성 공립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한 선생은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 기악과에 입학하여 1949년 7월 15일에 졸업하였다.
   서울대를 졸업한 후 태백중학교, 춘천중학교, 삼척여자중학교, 삼척여자고등학교, 강릉사범학교 병설중학교 교사를 역임하였고, 1962년 3월 31일 춘천교육대학 교수로 부임한 선생은 재임 중 관동향토문화연구소 소장, 시청각 실장을 역임하였다.
  본래 첼로 전공인 박재훈 선생은 1970년 일본 최우수 교육 논문으로 뽑힌 다나카 요시노리 선생이 리코더를 주제로 작성한 논문을 읽고 난 후 리코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72년 다나카 요시노리 선생의 방한을 계기로 친교를 맺은 선생은 1974년  전일본리코더교육학회에 참석한 후 국내 음악교육계에 리코더 보급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하였다.
  춘천교육대학에서 리코더를 중심으로 음악교육을 시작한 선생은 강원도 일대뿐만 아니라 대구·전주·여수·울산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습회를 열었다. 또한 1975년에는 한국리코더교육연구회를 조직하여 전일본리코더교육연구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자료교환, 리코더 연주지도 등에 힘쓰며 리코더 보급에 열정을 쏟았다.
  이 외에도 춘천교육대학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리코더 합주단을 창단하여 새로운 음악교육을 전개한 박재훈 선생은 그 교육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12월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은 바 있으며, 1982년 8월 타계하였다. 
 
일시: 2012년 6월 14일(목)
장소: 춘천교육대학교 총장실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김선배(춘천교육대학교 총장)
     이한돈(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조진희(춘천 고음악축제 음악감독)
     이상섭(가평초등학교 교장)
     최찬규(전 진광고등학교 교사)

 

박재훈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이번 8월 호에서는 리코더를 한국 음악교육에 처음으로 도입하시고 확산시키는데 공헌하신 박재훈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박재훈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리코더에 대해 아무도 눈뜨지 못했을 때 처음으로 리코더를 음악교육계에 들여오셨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도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지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이렇게 음악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신 박재훈 선생님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번 좌담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 들으신 바가 있으신 분이 계신가요?

 

이상섭_ 저는 1973년 춘천교육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음악 감상실에서 학생들이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음악을 선택하고 들려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때 음악감상실 바로 옆방이 박재훈 교수님의 방이라 자주 찾아 뵙고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성장과정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용일_ 당시 전국 어느 교육대학에도 음악 감상실이 없었는데, 그 시대에 음악 감상실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춘천교육대학이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네요. 제가 박재훈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군산교대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였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육대학 교재 중 오르간 교본 한 권, 이론 교재 한 권을 통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이를 위해 교대 교수진들이 모여 회의를 갖게 되었지요. 그 때 박재훈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제가 편집 위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분이 박재훈 선생님이셨습니다. 다른 분들의 원고는 사정하고, 재촉해야만 겨우 기한 내에 받을 수 있었는데, 박재훈 선생님은 항상 마감 전에 원고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박재훈 선생님께서는 강릉사범학교에 계셨던 걸로 아는데, 이후 춘천교육대학으로 곧바로 오셨던가요?

 

김선배_ 1962년도에 종래의 사범학교가 2년제 국립 교육대학으로 승격, 개편되면서 춘천 사범학교는 춘천교육대학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범학교 선생님 가운데 자격이 있는 분은 승격된 교육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긴 분들이 계시고, 박재훈 선생님 또한 강릉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근무하시다 춘천교육대학으로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강릉사범학교는 곧 바로 강릉교육대학으로 승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69년도에 강릉사범학교의 정신을 이어 받은 강릉교육대학을 비롯하여 안동, 목포, 군산, 마산교육대학이 새롭게 개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교육대학들은 1977년도 이후에 일반 대학으로 전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용일_ 다른 분들께서는 어떻게 박재훈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조진희_ 저는 박재훈 선생님의 직접적인 제자는 아닙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리코더 공부를 하게 되었고, 현재 리코더 연주자로 활동 중입니다.

 

최찬규_ 저는 1967년도에 춘천교육대학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음악반장을 하면서 선생님과 직접적으로 많은 교류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탁구를 좋아해서 교대 탁구 대표선수를 하려고까지 생각했는데, 선생님께서 안 된다고 반대하시며 심화전공으로 음악을 하라고 하셔서 음악을 선택하게 되었고, 음악반장까지 맡게 된 것이지요. 그러한 인연으로 선생님께서 합창이나 리코더를 학문적으로 최초로 받아들이셔서 연구하셨고, 저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연주 활동을 하곤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매사에 어찌나 철저하신지 빈틈이 전혀 없으셨어요. 또한 저희가 졸업 후에 선생님이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스승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제자가 제대로 안 된다”는 확고한 교육관으로 저희들을 매우 엄격하게 교육시키셨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내놓을 수가 없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고요. 저는 졸업 후 현직에 나가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교직 생활을 한 지 어느덧 40년이 지나 퇴임을 했지만, 그 동안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저에게 주신 영향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지요. 불행하게도 선생님께서 병세가 악화되셔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신 것이 오늘따라 더욱 아쉽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선생님이 모아오신 자료들입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왠지 선생님의 자료가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에 보관하겠다는 생각은 당시에 하지 못했었고,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사라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아드님께 선생님의 자료를 얻고 싶다고 부탁드렸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더군요. 박재훈 선생님께서 평생 모으시고 연구하신 그 방대한 자료들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너무나 아쉽습니다.

 

김선배_ 최찬규 선생님은 저보다 3년 위이시고 이상섭 선생님은 3년 아래이시니 제가 가운데 연배이네요. 저는 음악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술을 심화 선택하였는데, 교육대학은 심화 선택 이외에도 모든 과목을 거의 동일하게 교육받아야 해서 저 또한 박재훈 선생님께 음악 교육을 받았었지요. 제 기억 속에 선생님은 과묵하신 분이셔서 강의를 하실 때도 꼭 필요한 것만 말씀하시고 너스레를 떨지 않으셨고, 늘 음악관 2층 안쪽 방에서 지내시면서 강의가 있으시면 시간 맞춰서 그 방에서 나오시고,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들어가 버리시곤 하셨어요. 그래서 음악을 잘 하지 못했던 저로써는 다가가기 힘든 분이시기도 했지요(웃음). 저는 미술교육과의 한진구 선생님 밑에서 그림을 공부했는데요. 가끔씩 한진구 선생님과 함께 대화할 때면 선생님께서 친분이 깊으신 박재훈 선생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 기억이 납니다. 박재훈 선생님께서 본인의 개성대로 인생을 사시는 것과 독특한 가치관 등에 대해서 애교 섞인 말씀을 하셨습니다(웃음).

 

박재훈 선생의 교육철학

 

이용일_ 그렇다면 박재훈 선생님께서는 평소 어떤 철학을 가진 분이셨다고 기억하시나요.

 

이상섭_ 박재훈 선생님의 철학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음악 감상실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 때 선생님과 교내 방송반 간에 트러블이 있었어요. 방송반에서는 주로 대중적인 음악을 틀다 보니 선생님께서 “클래식한 음악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왜 이런 음악을 교정에서 틀어주느냐”라고 하셔서 관련 학생들과 갈등을 빚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선생님은 “음악은 클래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철학을 가지신 분이셨고, 본인이 가지고 계신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시는 분이셨습니다. 결국 방송반하고 결론이 안 나는 싸움을 계속해 나가셨지요.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일이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평창에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교통편도 여의치 않아 6km를 걸어 나와야 하는 산골이었기에 자주 나올 수가 없어서, 집에 다니러 올 때에 맞춰  한 달에 한 번씩은 교수님을 찾아뵙곤 하였는데요. 선생님께서는 바쁘신 와중에도 꼭 시간을 내주셔서, 리코더 음악계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평창에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았을 때는 이 학교가 전기는 물론 방송, 라디오도 안 나오는 오지에 있어서 적응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에서야 밝히는 것이지만,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너무 힘들어서 못 있겠다고 선생님께 편지를 썼지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정들면 고향이다”라는 딱 한 줄만 적어 답장을 보내셨더라고요. 그 글귀가 얼마나 힘이 되었던지, 오랜 시간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음악에 있어서는 절대적이셨지만 후배,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 못지 않은 분이셨다고 기억합니다.

 

이용일_ 이한돈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한돈_ 저는 박재훈 선생님의 그런 음악에 관한 고집스러움(?) 때문에 서운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제가 강원대학교에 부임한 후 춘천지역에서 음악활동을 하려고 보니 각 도시들이 연계가 잘 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아까 이상섭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평창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는 교통편은 물론 도로도 거의 비포장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음악으로 전 강원도를 통합해 보자는 생각에 ‘강원 브라스 앙상블’을 만들었고, ‘강원 브라스 앙상블’의 연주회를 춘천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홍천, 산천 등 강원도 곳곳에서 열기 위해 이왕이면 당시 한국음악협회 강원도지부장을 맡고 계셨던 박재훈 선생님에게 주관해 주실 것을 요청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마디로 딱 거절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당시 강원대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박재훈 선생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음악협회 회원이신 다른 음악 선생님들에게 “음악단체에서 연주회를 하겠다는데 왜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고 물어보니 “박재훈 선생님은 리코더 말고 다른 거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이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음악은 리코더뿐만이 아닌데…”라는 생각에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박재훈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뭐라 해도 박재훈 선생님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자신의 길만 고집스럽게 가신 분이라 결국은 쌓인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신 것이 병세를 악화시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가져 봅니다. 그럼 이어서 박재훈 선생님과 리코더에 대해서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이번 좌담회를 통해 박재훈 선생님 개인의 업적과 더불어 한국의 음악교육에 리코더를 도입한 게 춘천이 출발점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자 하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조진희_ 박재훈 선생님을 통해 한국에 리코더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1970년대 초반에는 박재훈 선생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춘천 리코더 합주단’이 창단되었습니다. 이 단원 가운데는 저희 친 형님도 계셨지요. 그래서 형님이 집에서 연습하시는 리코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저도 형님을 따라 리코더를 불면서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춘천 리코더 합주단’ 창단 연주회 때는 박재훈 선생님이 중학생인 저를 찬조 출연시켜 주셔서 독주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고요. 그러한 인연으로 리코더를 좋아하게 되었고, 일본에 편지를 써서 악기를 구입할 정도로 애착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일본에서 연주 팀을 초청하여 연주회도 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상섭_ 네. 나가츠카와 합주단을 초청해서 춘천에서 연주회를 가졌지요. 나가츠카와라는 곳은 일본의 소도시인데, 춘천과 같이 주변에 산과 호수가 있고, 인구도 비슷한 지역이었지요. 박재훈 선생님께서 다나카 요시노리 선생님과 친분이 두터우셔서 초청 연주회가 이루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선배_ 리코더를 한국 음악교육에 도입하셔서 아이들이 쉽게 음감을 익히고, 작고 소박한 악기지만 무궁무진한 음악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셨다는 측면에서 아주 훌륭하신 업적을 남기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용일_  제가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서울도 아니고 지방인 춘천에서 리코더를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자원 인력도 부족했을 텐데 가장 먼저 리코더를 들여오고, 일본과 교류했다는 것은 박재훈 선생님께서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노력한 결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상섭_ 네. 맞습니다. 박재훈 선생님은 본인이 하려고 마음먹은 일에 대해서는 옆으로 흐트러지는 일이 없으셨고, 저희 제자들 또한 그러기를 바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매번 “너는 어디를 가더라도 10년 동안 하나만 깊이 파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학창시절에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세요?”라고 여쭈어 보았더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놀면서 10년을 보내느니, 연주하려면 연주를 하던지 아니면 지도법에 대해서 연구를 하던지, 혹은 10년 동안 악보를 모아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10년 동안 무언가 하나만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를 항상 하셨거든요. 저 또한 선생님의 그러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이나 새로 발령 받아 학교로 온 선생님들에게도 “과거 나의 은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원하는 것 하나를 깊이 있게 공부하면, 그 분야에서 우뚝 설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이용일_ 박재훈 선생님께서는 언제 처음 리코더를 도입셨나요?

 

최찬규_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리코더를 공부하지 않았고,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붐을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상섭_ 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한국리코더교육연구회가 처음 발족되었습니다. 1975년도쯤으로, 제1회 전국교원리코더연수회를 설악산 밑에서 가졌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요.

 

김선배_ 저는 1977년도에 1정 강습을 받을 때 박재훈 선생님께 꽉 잡혀서 매일 오후 레슨시간에 리코더를 배워야 했습니다(웃음). 아무튼 리코더는 1976년부터 1980년도까지 강원도에 널리 보급되었지요. 지금도 생생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원주에서 교직생활을 할 때, 당시 리코더계에서 최찬규 선생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김기홍 선생님이라는 분이 함께 재직하고 계셨고, 그 학교에는 50여 명으로 이루어진 리코더 합주단이 있었지요. 그 때는 정말 온갖 리코더를 구경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지요.

 

이용일_ 사실 우리나라 사정상 브라스 밴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재력을 가진 학교가 많지 않습니다. 리코더는 교실에서도 합주가 가능한 악기이고, 학부모에게 부담도 가지 않을 뿐더러 악기가 독특한 소리를 가지고 있고요. 결국은 우리가 음악을 한다는 자체가 고운 소리를 낼 수 있고, 그것을 듣고 향유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소리를 내지 못하면 음악활동을 할 수가 없지요. 그런 면에서 볼 때도 브라스 밴드는 악기의 전문가가 와서 가르쳐야 하는 반면, 리코더는 교사들을 조금만 훈련시키면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도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무리 박재훈 선생님이 시작을 하였더라도 제자 분들이 함께 따라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테고요. 그렇다면 현재 한국 리코더계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요.

 

조진희_ 지금 우리나라에는 리코더 연주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도 20여 명 정도 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도 2002년부터 리코더 전공이 개설이 되었습니다. 백석 콘서바토리에도 4, 5명의 연주자가 있고요. 이처럼 계속해서 리코더 전문연주자들이 배출되고 있고,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학생들도 여러 명 있지요. 제 제자였던 춘천출신의 학생이 최초로 모차르테움 국립음대에 입학하여 지금 도로테 오베를링어 선생에게 사사받고 있는데, 지난 5월에 유럽에서 있었던 수제 악기 전시회에서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이 공부를 잘 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입에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이번에 국제 콩쿠르에 출전한다는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에 온 후에 그 학생한테 벨기에 국제 리코더 콩쿠르에서 1위를 했다고 전화가 왔는데, 너무나 뿌듯하고 기뻤습니다. 이 학생뿐만 한국 학생들이 연주부문에서 국제적으로 두각을 많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 중에는 임종완, 신윤희 선생님 등 춘천 출신들이 많이 계시지요. 이렇게 춘천 출신의 연주자들이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박재훈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선배_ 네. 박재훈 선생님이 씨앗을 뿌리신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이용일_ 현재 국내에도 리코더 콩쿠르가 개최되고 있습니까?

 

조진희_ 네. 몇 개의 콩쿠르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박재훈 선생님이 만드신 한국리코더교육연구회가 주최하고 있는 전국리코더콩쿠르도 근 30년 동안 개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코더 콩쿠르 가운데 큰 콩쿠르로는 대전과 춘천, 서울에서 열리는 3개가 있고요. 하지만 다른 콩쿠르와 다른 점은 대부분의 콩쿠르는 초·중·고등학생 가운데 음악을 전공하고,  혹은 꿈꾸는 학생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리코더는 굳이 전공하지 않을 아이들도 콩쿠르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말하자면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콩쿠르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콩쿠르의 목적부터 경쟁심을 자극하기보다 리코더를 보급한다는 취지로 상도 많이 주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막상 전공생들이 콩쿠르에 참여를 안 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람이라면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콩쿠르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최찬규_ 서울에는 현재 2, 3군데의 리코더 단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모두 한국리코더교육연구회에서 같이 활동하시다가 몇몇 분이 독립해 나가셔서 지역별로 그 곳의 특색을 살려서 창단하여 운영하고 계시지요. 1970년대 중·후반에는 박재훈 선생님 중심으로 모였다가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지역별로 나름의 재원을 확보하고, 구성원들이 의기투합하여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콩쿠르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 덕분에 리코더가 더 널리 보급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전국적으로 다 파악은 못하지만 많은 지역에서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이 활동하고 있고, 어른들도 소규모 앙상블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 지금 음악춘추에서도 전국 학생 음악콩쿠르를 열고 있는데, 혹시 리코더 부문을 첨가하게 된다면 학생들이 많이 참가를 할까요? 

 

최찬규_ 현재 전국적으로 청소년들로 구성된 리코더 합주단 50여 개와 초등교사들로 이루어진 리코더 합주단이 50여 개가 있는데, 리코더 부문을 첨가한다면 보다 많은 분들이 참가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한돈_ 사실 제가 강원대학교에 재직할 때 저희 학교는 배당 학생수가 적어서 음악학과에는 다른 전공을 둘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학원에 리코더 전공을 뽑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문의가 많이 와서 몇 년 동안 리코더 전공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리코더가 전문 연주 악기라는 인식이 부족하여 왜 뽑느냐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결국 1명만 졸업을 시키고 없어지게 되었는데요. 리코더를 하나의 음악 분야로 생각해야 하는데,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본인의 악기만 귀중하게 여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른 분야는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이용일_ 그래도 시도했다는 자체가 존경할 만합니다. 그것 또한 박재훈 선생님의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저는 최근 고향에서 아트 서커스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어서 가 보았는데요. 서커스가 옛날하고 너무나 다르더군요. 오페라 아리아도 들리고,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한 천막에다 내용도 스토리가 있는 볼 만한 것이더라고요. 이처럼 현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빠르고 다르게 흘러가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과거의 시각을 깨지 못하고 “왜 쓸데없이 이런 것을 하느냐”는 말을 계속 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춘천에는 어떤 음악축제가 열리고 있는지요. 혹시 강원도 선생님들이 중심이 되어서 박재훈 선생님의 이름을 붙인 리코더 페스티벌을 전국적인 행사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없으십니까?

 

조진희_ 음악축제로는 제가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고음악축제가 있는데, 고음악축제는 2005년부터 열리고 있습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는 춘천 리코더 페스티벌이었지요. 그런데 진행해 오다 보니 언제나 재원문제에 부딪히고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하다 보니 추진해 오던 스텝들 모두가 많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저 또한 박재훈 선생님의 추모 음악회나 기념행사 등은 꿈꿔왔던 바이지만 현재는 역부족이라 생각합니다. 혹시 저희가 적극적으로 일을 돕는다면 춘천교대에서 진행할 수는 없을까요? 

 

김선배_ 조 교수님 말씀대로 인적자원은 이제 충분하기 때문에 대학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후원한다면 좋겠지만 결국 대학 또한 재원이 문제이지요. 또한 국립대학에서 특정인을 추모하는 행사를 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준비하면 불가능하거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용일_ 네. 이러한 자리를 통해서 제안된 여러 안건들에 대해 선생님들께서 대화를 나누고 머리를 맞대어 박재훈 선생이 뿌려놓은 씨앗이 잘 자라서 열매맺기를 바랍니다. 혹시 덧붙이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최찬규_ 먼저 정말 존경하는 스승님이신 박재훈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말씀을 나누다 보니 선생님에 대한 기억에 가슴이 아련합니다. 선생님께서 직장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제 손을 꽉 잡으시면서 “왜 이렇게 아파야 되냐”라고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무엇보다 박재훈 선생님의 공적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고, 선생님의 업적이 많이 알려져서 선생님이 기여하신 바가 대한민국 음악역사에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상섭_ 네. 저 또한 박재훈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지 어느덧 30년이 되어 기억 속에서 아물아물했는데,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새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교직에 있으며 계속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생활해 나가겠습니다.

 

이용일_ 비록 우리나라 음악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재훈 선생님과 같이 보이지 않게 공헌을 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요. 이 좌담회를 통해 그분들의 업적 또한 후배 음악가들에게 되새겨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쁘신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흔쾌히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_ 박진하 기자 / 사진_ 김문기 부장

 

 좌로부터 조진희, 이상섭, 최찬규, 김선배, 이한돈, 이용일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한돈(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최찬규(전 진광고등학교 교사)

 

 김선배(춘천교육대학교 총장)

 이상섭(가평초등학교 교장)

 조진희(춘천 고음악축제 음악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