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커버스토리-음악학자 노동은 / 음악춘추 2012년 2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2. 2. 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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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학자 노동은
역사를 바탕으로 이 시대를 밝히다

 

“처음부터 내 관심은 ‘나는 누구인가’였다. 그리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눈을 뜨고 있었다. 이 물음은 이후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와 ‘우리는 누구인가’가 서로 짝을 이루며 묻는 물음이 되어 버렸다.”

노동은 선생에게 음악이란 그 자체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에서 나아가 그 음악을 가능케 한 역사적 바탕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삶과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로 확대된다. 역사학자 E. H. Carr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이번 커버 스토리에서는 한국음악사 연구에 그 누구보다도 큰 열정을 쏟아 왔으며, 이 시대의 ‘음악 하기’를 올바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노동은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인터뷰를 위해 노동은 선생이 설립한 한국음악연구소를 방문했다. 이 곳에는 노동은 선생이 누구인지 대변해 주는 방대한 양의 사료와 서적, 그리고 음반 등이 빼곡해 마치 도서관에 온 기분이었다. 그 중에는 박물관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오래된,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음악 교과서, 사진 등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자료들이 많았다.  

 

우리 음악을 향한 진지한 물음과 성찰


노동은 선생은 최근 두 가지 프로젝트를 마친 상태이다. 우선 지난 해 11월 18일에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 항일음악회의 총감독 직을 맡아 주최했다. 이는 해방 이후 처음 마련된 자리로, 민족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고, 당시의 음악이 오늘날 이 시대에 어떤 의미와 희망을 주고 있는지를 조명했다. 특히 음악회에서는 노동은 선생에 의해 발굴된 신흥학우단 단가가 처음으로 공연되는 등, 1930∼1940년대의 대표적인 항일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뜻밖에도 많은 분들이 이런 뜻깊은 작품이 있었냐며 좋아하셨고, 또 음악회가 개최되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셔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음악회에는 독립 운동을 하신 분과 후손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사회의 덕목으로 발전시키려는 뜻 있는 분들도 참석하셨습니다. 의외로 10대들이 와서 감상하는 것을 보며 이 사회의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지난 해 12월 10일에는 〈재인청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학술회의를 좌장으로 이끌었다. ‘재인청’은 우리나라 민속 음악의 최고(最古), 최대의 ‘음악 예술 종합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국가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조직 형태, 공연 내용, 성격 등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음악을 어떻게 발전시켜 왔는지 학술적으로 접근했다.


현재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항일 음악에 관련된 작품집을 준비 중이며, 경기음악 프로젝트에서 대표 연구 수행자로 집필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경기도에서 근대까지 행해진 모든 음악, 예를 들어 경기 시나위, 경기 판소리, 경기 산조, 경기 민요, 경기 좌창, 경기 입창 등에 연구한 것을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또한 『윤이상 평전』과 『지영희 평전』을 비롯해 1910년부터 현재까지의 우리 음악 역사를 담은 한국 근대 음악사도 발간할 계획이다.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음악사의 방대한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윤이상 선생님이 1917년 출생한 통영에서부터 유럽으로 건너간 1960년대까지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윤이상 선생님의 삶과 예술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려 합니다. 그분은 항일 운동을 하시는 등 굉장히 민족적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 가곡인 「그네」, 「달무리」, 「편지」 등이 민족적인 어법으로 창작된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 것이 왜 가능했고, 그것에 유럽사회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어떻게 더해져 세계적인 음악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는가 등을 연구합니다.”


사실 지난 해 말 윤이상 선생의 북한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은 선생은 “정치적인 사항은 평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아니고, 윤이상 선생의 작품을 중심으로 예술적인 세계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라며 말을 이었다.
“분단 이후 냉전 체제 속에서 남과 북이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워왔지만 1990년 범민족 통일 음악회가 개최된 데에는 윤이상 선생님의 공이 컸습니다. 남북의 오랜 갈등을 화해로 이끌었고, 상생해서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것을 마련하게 한 당사자이셨지요. 그래서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평전의 주인공인 지영희 선생은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의 명인이며, 국악예술학교 교사시절 유망한 신인들을 많이 길러냈다. 또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했고 1973년에는 시나위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지영희 선생님은 소위 말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로, 오늘날 한국 국악계의 중진들이 그 분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왜 가능했는지를 알기 위해 지영희 선생님의 음악적인 태생, 음악적 고향, 학습 방법 등을 살펴볼 것입니다. 손을 댄 분야마다 열정적으로 획득했고, 그것을 또한 제자들에게 전수, 훈련시킨 분으로, 한국 음악의 근대성을 새롭게 발전시킨 장본인입니다.”
덧붙여 노동은 선생은 “오늘날 한류 열풍의 중심에 있는 케이팝(K-Pop)처럼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음악 중 하나가 즉흥 음악인데, 지영희 선생님은 그 즉흥 음악의 시조라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또한 시리즈로 계획되어 출판된 『한국 근대음악사Ⅰ』의 다음 책들을 완성하는 계획도 갖고 있다. 1995년 출판된 첫 번째 책에서는 1860-1910년까지를 다뤘으며, 『한국 근대음악사Ⅱ』에 실릴 1910-1945년은 금년 안으로 탈고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1945-1950년인 해방 이후부터 분단 전이며, 마지막은 1950-현재로, 남북의 통일, 나아가 음악에서의 통일을 지향하는 내용을 담아 총 네 권으로 구성된 『한국 근대음악사』을 펴낼 것이다

 

한국 근대음악사 바로 알기


교육자로서도 올곧은 길을 걸어온 노동은 선생은 1981년 목원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한국음악과를 신설했으며, 이후 1999년부터는 중앙대학교로 적을 옮겨 박범훈, 최태현 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과 국악대학·국악교육대학원·박사과정을 신설하고 중국 중앙음악학원과 결연을 맺는 등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리고 지난 해 여름 정년퇴임을 맞이했다. 그의 주변 교수들, 그리고 제자들은 그가 얼마나 남다른 애정으로 제자들을 위했고, 인재양성과 국악교육 발전에 힘써 왔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노동은 선생은 퇴임 후 지난 날을 돌아보니 제자들에 대한 ‘헌신’이 부족했노라고 고백했다.


“사실 인재를 키우는 일에 목적을 갖고 가르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자들을 더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스승으로서 최고의 덕목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역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 동안 노동은 선생은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창작음악학과에 재직하며 우리나라의 수백 년 전 음악부터 근대 양악사를 포함한 한국 음악사를 지도해 왔다. 그리고 한국 음악사 중에서도 ‘근대 양악사’는 선생에게 있어 최정점에 있는 연구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은 선생이 설정한 근대는 1860년대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흔히들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 그들의 찬송가, 창가를 전파한 시기부터 우리나라 양악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아는데, 그에 앞서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자명금(오르골), 양금(덜시머) 등을 국내에 보급했고, 서양 음악 이론을 한국 체제에 맞게 연구, 체계화했습니다. 그러한 활동을 통해 중국 중심의 세계관, 음악관을 벗어나 우리나라도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우리 양악사의 출발만 바르게 알아도 오늘날의 음악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한결같이 걸어가는 길


노동은 선생이 ‘나’의 음악에서 ‘우리’의 음악으로 나아간 과정은 이렇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한 선생은 피아노를 쳤던 누나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초등학교 시절 음악부장을 맡아 노래를 하며 작곡가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에 진학해 음악부 활동을 하며 테너이자 학교의 교사였던 이을우 선생에게 성악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밴드부 생활을 하며 2학년 때 클라리넷을 잡은 선생은 전북도교육위원회가 주최하는 음악경연대회에서 기악부 1등을 수상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휴학과 복학을 반복한 끝에 학업을 마치고 한양대 음대 관현악과에 4년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베토벤의 교향곡, 현악4중주 등을 들으며, 수백 년 전 존재했던 작곡가의 음악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고, 어린 시절 그려왔던 작곡가로서의 꿈을 되찾았다. 그래서 3학년 때 당시 작곡과 교수였던 박중후 선생에게 작곡 레슨을 받고 학내에서 작품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그리고 4학년 때쯤 한국학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해 한국철학, 한국사, 한국민속학을 중심으로 독학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해 군악대에서 교육, 지휘, 편곡을 담당하고, 제대 후에는 음악 교사 생활을 하는 한편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70년대 출판된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 읽고 정신적인 혼란을 겪었다. 그가 존경했던 이광수 선생 등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두 가지 관심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음악학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음악계에도 이 같은 친일 음악의 흔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한국인들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죽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당시 겪은 광주 항쟁은 그에게 도화선과도 같았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1981년부터 음악 관련 글들을 발표하기 시작, 지금까지 다양한 저서를 비롯해 600여 편의 논문·비평문·글들을 발표했다. 선생은 개화기 음악, 친일 음악, 그리고 해방공간의 음악, 북한 음악으로 이어지는 연구 활동을 통해 음악사 재평가 연구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노동은 선생은 음악계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의 친일 음악을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아킬레스건이 ‘좌익, 우익’ 이념인 줄 알았는데, 친일 음악에 대해 연구하며 자세히 들여다 보니 ‘친일이냐, 민족이냐’를 덮기 위해서 좌익, 우익 논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친일, 분단 구조 속에서 민족 갈등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유신 정권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하나씩 접근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누가 친일을 했느냐’를 따지고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잘못된 부분은 바르게 잡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정치적, 식민지 상황에서의 음악 행위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 어떤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나가길 원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은 선생은 1988년 월북 작가 해금조치가 있을 당시 월북 작곡가인 김순남, 이건우 등에 대한 해금 요청을 하고 음악회, 심포지엄 등을 열기도 했다. 당시 해방과 분리 공간의 음악사를 연재하는 한편, 『김순남 그 삶과 예술』(낭만음악사), 『민족음악론』(한길사, 이건용 공저)을 펴내 우리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우리 음악사에 여러 가지 아픔이 있었는데, 역사를 바르게 세우고 알아감으로써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악계도 사회의 여러 분야와 통합되고, 더불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봅니다.”
배움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학문의 목적이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공허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 음악계의 감추고 싶은, 어두운 구석까지도 환히 비추고 치열하게 나아가는 노동은 선생의 존재가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이유이다.

 

글·배주영 기자 / 사진·김문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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