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창작음악 세계화 토대 마련한
작곡가 김순애 선생(金順愛, 1920년 12월 22일∼2007년 5월 6일)
1920년 황해도 안악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김순애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찬송가와 오르간 음악을 가까이했고, 일찍이 선교사들로부터는 영어뿐 아니라 피아노를 배우며 기독교 학교인 성진 보신여학교와 함흥 영생여고를 거쳐 서울 배화여고로 편입했다. 1937년 이화여전 음악과에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한 김순애 선생은 작곡가 김세형 선생의 권유로 1939년 전과하여 최초의 여성 작곡전공자가 되었으며, 1941년에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이후 대구 신명여고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고, 그 뒤 서울의 경기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김순애 선생은 1946년 제1회 작곡 발표회를, 1951년 제2회 작곡 발표회를 가졌다.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스트만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졸업한 김순애 선생은 1953년부터 30여 년 동안 이화여대에 봉직하였으며, 1960년 이화여대 음악과가 음대로 승격되면서 1973년까지 초대 작곡과장을 맡기도 했다.
한편 김순애 선생은 1961년부터 1962년까지는 유네스코 장학생으로 파리에서 도이치 교수에게 작곡을 사사했으며, 1962년에는 DAAD 방문교수 및 네덜란드 문교부 방문교수를 지냈고,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서 장학생으로 박사과정을 수학했다. 로체스터 대학교로부터 이스트만 작곡상(1957년), 이스트만 명예 동창상(1996년), 제13회 서울시 문화상(1964년), 제1회 한국작곡상(1974년), 문화훈장보관상(1984년), 국민훈장모란장(1986년), 제13회 대한민국 예술원 예술상(1986년), 제10회 문화방송 한국가곡 공로상(1990년), 제34회 3·1문화상 예술부문(1993년)을 수상했다. 그리고 한국작곡가협회 부회장을 거쳐 예술원 회원과 新음악학회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이 외에도 김순애 선생은 이화여대 창립 110주년 기념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114주년에는 교성곡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를 완성하여 2000년 5월 23일 초연하였으며, 음악대학 창설 75주년 기념에는 ‘2000대 음악회’를 위한 작품을 위촉받아 발표하기도 했다.
가곡 작품으로는 「네 잎 클로버」, 「그대 있음에」, 「4월의 노래」 등 38곡, 기악작품으로는 피아노 독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4중주, 교향곡 등 9곡, 그리고 오페라 「직녀」와 교성곡 「당신은 새벽에 나의 목소리를 남기고 있다」가 있고, 1957년에는 동요곡집, 1969년 두 번째 가곡집 『그대 있음에』, 1973년에는 에세이집인 『성의 꽃 너머로 그 노래 소리가』를 펴냈다.
일시: 2012년 1월 9일(월)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작곡가 이영자(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한국여성작곡가회 명예회장)
음악평론가 이상만(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작곡가 강순미(성신여자대학교 교수)
작곡가 임진(평택대학교 교수)
작곡가 박은혜(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음악이론가 정소희(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주)음연 대표이사)
김순애 선생의 성장배경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지금까지 진행해 온 지 5년여 정도 된 음악춘추의 〈인물탐구〉는 우리나라 근세 음악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음악사에서 중요한 일을 하셨던 분이 이 자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후학들에게 알려진다는 생각으로 좋은 말씀들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순애 선생님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이상만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상만_ 김순애 선생님은 1920년 12월 22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안악이라는 곳은 김구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하지요. 김순애 선생님의 부친은 목회를 하시던 김성노 목사님으로 아주 존경받는 분이셨습니다. 당시 김순애 선생님의 부친은 목사로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니 이사를 많이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김순애 선생님은 다섯 살 때까지는 안악에서, 그리고 함경북도 길주, 성진에 이어 함흥으로 거처를 자주 옮기셔야 했지요. 그렇게 해서 함흥 영생여고와 서울 배화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피아노과에 입학하셨는데, 목회자이신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음악을 가깝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또 노래와 오르간 연주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이셨는데, 1937년 이화여전 피아노과에 입학하신 선생님은 당시 작곡과 교수이셨던 김세형 선생님의 화성학 강의에 매료되어 대학 2학년 무렵 작곡과로 전과하셨고, 그 때 첫 작품으로 「네 잎 클로버」를 남기셨습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능하셨던 선생님은 당시 작곡가로서도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셨습니다. 그 시절 함경도에는 캐나다 북 장로교회와 감리교의 두 교구가 있었는데, 김순애 선생님께서 다니셨던 배화여고는 감리교 계통으로, 그 때 선교사들을 만나 영어를 배우게 된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순애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오늘 자리한 선생님들께서는 김순애 선생님을 언제 처음 뵈었나요?
이영자_ 1945년 해방 이후, 그 시절에는 한글로 된 음악 교과서나 서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7년에 문교부에서 만든 음악 교과서가 출판되었고, 그 책에 김순애 선생님과 나운영 선생님의 곡이 실렸었습니다. 김순애 선생님의 곡은 “바퀴는 슬스리 시르렁 슬르리 시르렁 흥겨이 돌아도 사람의 한세상 시름에 돈다오, 사람의 한세상 시름에 돈다오”라는 가사로 된「물레」였는데, 고1 때 한글 음악 교과서에서 제가 처음 접한 노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김순애 선생님의 작품 중 「물레」를 가장 좋아하는데, 현대적인 요소와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곡이며, 리듬 또한 한국적인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학창시절 이 노래를 공부하며, ‘김순애라는 작곡가는 여성일까?’, ‘나이는 50대쯤 되지 않았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존경심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0년 이화여전에 입학하였는데, 제가 입학한 후 한 달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해 기숙사에서도 쫓겨났고, 서울에 연고가 없었던 저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그 때가 1951년, 전쟁 중에도 여전히 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던 저는 우연히 부산 대청동에 있는 남성여고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고, 그 곳에서 자연스레 음악소리에 매료돼 여성합창단이 노래하고 있던 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던 사람은 젊은 여성분이었고, 저는 그 때 처음 여성 지휘자를 본 셈입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한 곳에 누워있던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으로 보아 약 30대의 나이에 불과해 보였고, 제 나름의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곧바로 강당을 나와 지금 지휘하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물어보자, 바로 김순애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내가 생각했던 「물레」의 작곡가는 50대여야 하는데…, 올린머리에 젋고, 예쁜 30대의 여성이었다니, 그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강순미_ 저는 처음에는 사진으로만 김순애 선생님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학교 캠퍼스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얼굴이 예쁘실 뿐만 아니라, 매력이 넘치는 멋진 예술가 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사진에서 뵌 모습에 이끌려 선생님이 계신 이화여대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연구실에서 선생님을 직접 뵈었지요.
임진_ 저는 이영자 선생님과 조금 비슷한데요.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저희 언니가 「4월의 노래」와 「물레」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것을 따라 부르곤 했습니다. 당시 저희 언니는 경기여고를 다니고 있었고, 김순애 선생님께 배운 노래였지요. 저는 그 당시 김순애 선생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968년도에 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며, 선생님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되었지요.
박은혜_ 제가 작곡을 시작하고 대학을 정해야 하는 시기에 부모님의 권유로 이화여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 어머니께서는 경기여중 다니실 때 음악 선생님이셨던 김순애 선생님을 무척 존경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네가 작곡을 공부할 것이라면, 김순애 선생님처럼 훌륭한 작곡가가 계신 이화여대로 가야 하지 않겠니?’ 라며, 이화여대로 진학하기를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손을 붙들고는 당시 후암동에 거주하시던 김순애 선생님의 자택으로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그 때가 1980년, 제가 고1 이 되었을 때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날이지요. 선생님 자택의 거실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그 곳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정소희_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1년 후에 김순애 선생님께서 퇴임하셨기에 저는 선생님을 학교에서 오래 뵙지는 못했습니다. 이 후 정년퇴임 하시고 미국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한국에 들어오셨을 때, 여러 가지 인연으로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되었지요.
이용일_ 네. 김순애 선생님께서 이화여대에 재직하셨기에 많은 분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 선생님을 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김순애 선생님은 “깐깐하고 엄하셔서 제자들 입장에서는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강순미_ 아주 순수한 분이셨지요. 한 마디로 선생님은 예술가였습니다. 그리고 내면적으로 강한 면이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영자_ 그 시절에는 강하지 않고서는 절대 음악을 할 수 없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이상만_ 오늘 자리한 분들 중에서 제가 김순애 선생님을 가장 먼저 뵌 것 같은데요. 선생님께서는 1946년 배재학교에서 작곡 발표회를 가지셨는데, 당시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할 때 바이올린은 계정식 선생님이, 피아노는 작곡자이신 김순애 선생님께서 맡으셨지요. 저는 어린시절 바이올린을 공부했기에 계정식 선생님의 연주를 듣기 위해 작곡 발표회에 갔었습니다. 그 때 처음 무대 위에서 연주하시는 김순애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이영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얼굴도 예쁘시고, 피아노 연주도 수준급이셨지요. 그리고 연주에 반해 발표회가 끝난 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가자 선생님께서는 미소를 띠며 너무나도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작고하시기 전까지 선생님과 교분을 나눈 몇 안 되는 남자 중 한 명이지요.
김순애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김순애 선생님의 음악가적인 면모에 대해 이영자 선생님께서 감동적인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선생님의 음악관이나 작품세계에 대해 더 아시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영자_ 김순애 선생님은 저보다 나이가 11살 많으셨습니다. 그 시대에는 여성 작곡가가 많지 않았고, 저 또한 실력을 견줄만한 이렇다 할 작곡가가 없다 보니 마음 한편으로는 ‘작곡을 못해도 나밖에 없으니까 괜찮겠구나’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당시 김순애 선생님은 실력과 음악성이 없이 단지 이화여전을 나왔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1호 여성 작곡가가 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만한 인물이 결코 나올 수 없다고 할 정도의 역량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지닌 최고의 장점은 가슴에 음악을 품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실력을 가졌더라도 가슴에 음악을 품은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지요. 물론 저 스스로도 가슴에 음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김순애 선생님을 따라갈 수는 없다고 봅니다. 또한 나고 자라신 환경이 목회자의 자녀로 성장하셨기 때문에 찬송가를 접하며 자연스레 말과 노래를 동시에 배우셨고, 그렇다 보니 삶의 바탕에 감성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지금 음악인들 중에는 가슴에 음악을 품은 사람이 전체의 7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후에 기법을 연구하고 접목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정말 안타까운 것은 김순애 선생님이 자라던 시절에는 음악을 공부할 자료가 충분치 않았고, 오선지도 직접 그려가면서 악보를 그리던 때인데, 만약 선생님께서 몇 십 년 후에 태어나셨더라면 정말 대단한 작곡가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제가 프랑스 에서 유학했을 때, 김순애 선생님도 파리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유학하셨는데, 이미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신 후였기 때문에 자신이 지닌 음악적인 것을 더 키우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저처럼 음악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확립했더라면 그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역량을 지닌 분이시고, 그런 면에서 정말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용일_ 네. 그렇다면 강순미 선생님께서는 6년이라는 시간을 김순애 선생님 제자로 계셨는데요.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순미_ 김순애 선생님께서는 늘 “음악은 가슴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리고 선율을 그리는 것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가곡을 보면 느린 템포의 곡들이 많지요. 그런데 선생님의 가곡은 경쾌하다고 할까요? 대표적으로 「4월의 노래」를 보면 서정적인 진행이 되다가 도약하면서 활기차게 나가는 형식이 있는데, 이는 그 당시 다른 작곡가들에게선 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그리고 쇤베르크의 제자이기도 한 막스 도이치 선생님과 1년 동안 작업한 「심포니 교향곡」도 남기셨습니다. 김순애 선생님의 스승이신 김세형 선생님께서도 유학을 다녀오셨지만, 김순애 선생님은 이스트만 대학에서 유학하시며, 본격적으로 서양음악을 공부하셨고, 본인의 음악성에 서양의 기법이 더해진 탄탄한 기법을 확립하셨다고 하니, 제가 감히 언급하기에는 벅찬 분이시지요.
이용일_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요소에 서양음악을 접목시켜 처음으로 활발히 활용하신 분’, ‘한국음악을 세계화 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전에는 멜랑콜리하게 쓰고 특정 부분만을 우리의 장단에 맞추어 쓰는 등, 특징적인 것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김순애 선생님은 한국적인 정서를 제대로 담아 표현하신 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강순미_ 네. 그것은 직접적으로 표현 하셨다기보다 우리의 음악을 미화 시키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진_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어려운 한글을 가곡에 사용하시어 쉽고, 재미있게 부를 수 있게 하셨고, 큰 모임에 가실 때면 꼭 한복을 곱게 차려입곤 하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애국자다운 분이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목사님의 따님으로 성장하시면서 종교적인 것, 철학적인 것이 선생님의 음악에 자연스레 녹아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_ 과거 오케스트라 가곡 반주 지휘를 하는데, 음역 안에 없는 음이 있어 ‘아, 제자를 시켜 편곡했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김순애 선생님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임진_ 감히 제가 김순애 선생님의 음악관을 논하기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저희가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음악분석과 관현악법을 배웠고, 베토벤의 9개 심포니를 전부 피아노로 연주하시며 노래까지,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신 대단한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이영자_ 서양의 음악사를 보면, 드뷔시 이후 쇤베르크가 활동한 1945년 이후를 현대음악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렇게 서양에서 현대음악이 시작되던 1945년의 우리 한국은 참으로 빈곤한 나라였고, 김순애 선생님도 이미 성년이 되어 음악이 무르익었을 때입니다. ‘무르익었다’는 것은 ‘가장 한국적이면서 우리의 것을 미화했다’는 것을 말하고, 가곡 「물레」에도 나타나듯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순애 선생님의 작품을 현대음악이라고 단정짓기보다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에 와서 한국 음악학자들의 글을 보면, 한국의 현대음악을 1960년부터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1950년대부터 나운영 선생님이 현대음악을 강조하셨고, 저 또한 그 때부터 배웠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지요.
박은혜_ 저는 1983년도에 이화여대에 입학하였고, 김순애 선생님께서는 3년 뒤인 1986년에 은퇴하셨습니다. 은퇴하실 무렵 선생님의 관현악법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학생들을 늘 귀여워 해주셨고, 수업시간에는 언제나 넘치는 열정으로 수업에 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늘 음악에 있어서는 사랑과 열정을 보여주신 분이지요. 아직까지도 선생님의 수업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요. 감정이 굉장히 풍부하신 분이라 꽃, 나무를 보시며 자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유학시절 겪었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작곡가로서 제 인생 최고의 역할 모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정소희_ 저는 김순애 선생님께 직접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라 음악관에 대해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제가 뵈었던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과 작품들, 그리고 선생님의 인품을 떠올려보면, 선생님의 작품세계 역시 대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은혜_ 네. 은퇴하시고 난 후 80세가 넘어서도 특강을 하시곤 하셨는데, 그때마다 어린 후배들에게 큰 격려와 도전을 주셨습니다. 또 이화의 114주년 기념음악회 때 선생님께 작품 위촉을 했는데, 그 작품을 수개월에 걸쳐 열정적으로 작곡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다시 한번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용일_ 보통 은퇴하신 선생님에게는 곡을 위촉하거나 박사학위를 주지 않는데, 그런 면에서 볼 때 김순애 선생님이 가지신 재능은 끝이 없었나 봅니다.
이상만_ 저는 김순애 선생님이 우리나라 ‘여성 작곡가 1호’라는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작곡가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작곡가의 한 사람이자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앞에서도 말씀해 주셨지만, 그 당시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선생님의 작품이 평가 절하된 것뿐이지, 우리나라 음악계에서는 위대한 작곡가임에 분명합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분처럼 음악을 몸소 체험하고, 전심을 다해 곡을 쓴 작곡가가 없지요.
그 시대가 아무리 남성에 비해 여성이 평가 절하되었던 시기라지만 김순애 선생님은 마치 ‘나디아 블랑제’같은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곡사에 비추어 볼 때 선생님의 작품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분이시지요. 뿐만 아니라 언변과 글쓰기에도 빼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당대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라고 할 정도였는데요. 1966년 최초의 TV가 나오고 1972년 이후 일반가정에 보급되었을 때였습니다. 한 번은 선생님이 음악회 해설을 하시는 것이 TV에 방영되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분을 멋진 여성이라고 칭송했고, 남성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습니다. 선생님의 결혼식은 신문 사회면에도 크게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4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의 결혼생활을 마치고 혼자의 몸으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김순애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여성 작곡가 1호’가 아니라 ‘우리나라 작곡가 중 최고’라는 말씀에 저도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작품을 쓰신 선생님의 교육관은 어떠셨나요?
강순미_ 선생님의 화성학 수업은 미국에서 인정받는 책 메코스저 『18세기 하모니』를 바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책은 화성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배경의 뿌리가 있는 책이지요. 그리고 쇤베르크의 제자이신 막스 도이치 선생님께 배운 좋은 기법들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셨고요. 그리고 레슨하실 때나 작품을 쓰실 때, 늘 피아노로 직접 연주 하셨습니다. 즉, 살아있는 음악을 하신 분 이였습니다.
이용일_ 저는 동경예술대학에서 음악교육을 공부했는데, 당시 그 곳은 독일적인 것과 프랑스적인 것을 철저히 구분시키고자 프랑스 계통과 독일 계통의 두 교실로 나뉘어져 있었지요. 왜냐하면 ‘전통’이라는 것을 연결하기 위한 교육에 힘썼기 때문이지요. 현재 우리의 음악교육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고, 예를 들어 코다이 같은 경우도 일본에서 배우고 들어온 사람이 본래의 뜻을 배제하고 한국화 시켰기 때문에 결코 우리 문화 창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물론 김순애 선생님께서도 쇤베르크의 다양한 현대적 기법들을 공부하셨지만, 당시의 시대 정황상 체계적인 작곡기법을 구축해야 했기에 유학 당시 배우신 것과 자신의 음악적 기법, 그리고 뛰어난 음악성을 접목시키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강순미_ 모차르트도 J.C 바흐에게 직접 배웠고, 하이든과 모차르트와의 교류도 있었잖습니까?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음악성과 기법을 더해 그분만의 토양을 만드신 것이지요.
이영자_ 네. 그렇죠. 그 토양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서양의 기법과 선생님의 음악성을 합쳐 주셨습니다.
이용일_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서양의 전통적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유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지녔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임진_ 제가 선생님의 직속제자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선생님의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도 ‘모차르트의 천재성보다는 베토벤의 꾸준함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99%의 노력과 1%의 천재성을 바라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김순애 선생님은 엄격한 분이시기도 했지만 반면에 날씨가 추울 때면 ‘오늘 날씨가 너무 춥죠,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실 정도로 감성이 풍부하신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박은혜_ 선배님들의 세대와는 달리 저희 또래에서는 김순애 선생님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 없는데요(웃음). 김순애 선생님은 분명히 감성이 풍부하신 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저희들에게 수업 중에 “너희들은 오늘 푸른 하늘을 보았니? 음대 올라오는 길에 어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고, 어떤 나무가 있는지 보고 다니니?” 라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삶의 매 순간 순간 모든 자리에서 흘러 넘치는 예술가의 감성을 느끼시며 저희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영자_ 1997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제자들이 모여 선생님의 희수음악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오현명, 안형일 선생님이 찬조 출연하셨고, 소프라노 3∼4명, 그리고 알토가 2명 이렇게 준비해서 진행되었고, 그 당시 몸이 불편하여 제대로 걷지도 못하실 때였는데, 즐거워하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후 음악회를 하지 못하셨고, 2000년에 들어서야 3개월간 미국에서 작업하신 관현악곡을 한국에서 발표하셨습니다.
김순애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그 외에도 나운영 선생님과 함께 한국적인 정서를 서양 음악에 접목했다는 것이 큰 업적인데, 김순애 선생님께서 국내 음악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셨나요?
이영자_ 먼저 ‘가곡’하면 김순애 선생님을 빼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가곡정립에 있어서는 대단한 분이십니다. 서양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홍난파 선생님 때부터 한국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제가 볼 때 가곡 안에서 홍난파 선생님을 이을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김순남, 김성태, 김순애 선생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나운영 선생님이 17살의 나이에 쓴 「가려나」는 정말 훌륭하지만 나 선생님께서는 기악곡도 많이 쓰셨기 때문에 구태여 ‘성악곡의 최고다’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김성태, 김순애 선생님이 한국 성악작품에서는 확고한 기반을 확립했다고 봅니다. 저도 작곡을 하지만 젊은 사람들도 곡을 쓸 때면 음악이 휘청거릴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가곡에는 짜임새를 가졌고, 이런 것을 보면 ‘공부를 많이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순미_ 김순애 선생님의 가곡은 정말 독창적입니다. 우리나라의 가곡을 살펴보면, 서양의 곡을 그대로 가져다가 한국 가사를 붙인 곡들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셨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감각을 살리셨습니다.
조성희_ 이화여대 작곡과 박사과정에서 처음 4명의 박사가 배출되어 첫 발표회를 가졌을 때 당시 미국에 계셨던 김순애 선생님께서는 직접 격려편지까지 보내주시면서 큰 응원을 보내주셨고 이와 같은 선생님의 영향은 직접 배우지 못한 까마득한 후배들에게까지도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이유도 그런 부분을 이어나가야 할 사명감이지 않나 싶은데요. 신음악학회주최로 임진 선생님께서 회장직을 맡으셨던 기간에 제1회 김순애 창작가곡 콩쿠르가 2009년에 개최되었고, 작년에 제2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렇게 창작 가곡을 통해 선생님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나가고자 하는 활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김순애 선생님의 인간적인 삶의 정신을 오늘날에 새롭게 발굴한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이상만_ 한국에서 줏대를 가지고 작품을 쓰는 사람이 아주 드뭅니다. 딱 두 사람이 있는데 김순애 선생님과 이영자 선생님이지요. ‘줏대’라는 것은 자기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김순애 선생님은 한국 언어에 대해 남다른 감각을 지니셨고, 김순애 선생님처럼 한국말을 아름답게 미화시킨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만큼 가곡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고요. 그렇다면 그러한 음악적 기초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살펴보면 한글 서적을 많이 읽고, 문인들과도 교분을 쌓아오면서 문학성을 길렀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작가 피천득 선생님도 김순애 선생님을 따라다니실 정도로 활발히 활동하셨고, 아마 연정도 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화여대 출신들은 잘 의식하지 못하는데, 한국음악을 제일 먼저 가르친 곳이 바로 이화여대입니다. 이렇게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르치던 곳에서 배움에 정진하셨기에 기초지식 확립에도 많은 도움이 되셨을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여담을 말씀드리자면 김순애 선생님은 달라피콜라, 슈톡하우젠과 교분이 많았는데, 정말 선생님께서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호바네스로 매우 친분이 두터우셨습니다. 나중에 그분을 한국으로 초청하기 위해 한국민회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호바네스가 한국에 머문 일주일 동안 작곡한 것이 「교향곡 제14번」입니다. 이 곡은 가야금 협주곡으로 황병기 씨가 맡아 연주하였고, 제가 KBS에 재직하던 시절 초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음악을 외국에 알리는 데에도 큰 공헌을 하셨고, 유네스코를 통해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영향을 끼치셨지요.
강순미_ 선생님께서는 이화여대에서 강의하시면서, ‘1도 화음과 5도 화음’ 등 화음의 명칭을 꼭 영어인 ‘Tonic과 Dominant’로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요한 음악적인 용어를 직접 영어로 말하게끔 하신것이지요. 물론 중국 사람들은 바이올린, 첼로를 자기네 식 한자로 바꾸어 표기하고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주체성이 있어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의 김치가 해외에서도 김치로 불려 져야 하듯 본래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일찍부터 트레이닝을 시키셨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그런 가르침 덕분에 나중에 유학 가서 영어 강의를 들을 때에 쉽게 이해 할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화여대에서는 그런 선생님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지금도 화음의 명칭을 ‘Tonic과 Dominant’ 등 영어로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용일_ 그 때는 김성태 선생님이 쓴 『화성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일본에서 공부하신 분이라 어쩔 수 없었지요. ‘전과음, 변과음’이라 하여 단어도 통일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잘못 번역된 것도 많았으니 오히려 원어로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봅니다.
강순미_ ‘Parallel Key’의 경우 나란한조, 또는 딴이름 한조 등 여러 말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본래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용일_ 하나로 통일된, 알아듣기 쉬운 우리말로 된 음악용어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현재로서는 잘못된 우리말 음악용어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말인 ‘다장조’로 표기한 다음 ‘C Major’로 바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영자_ 저도 ‘가, 나, 다, 라, 마, 바, 사’를 몰라서 헷갈릴 때도 많았습니다(웃음). 용어들을 원어로 공부하다 보니 바로바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이용일_ 우리는 주로 교회를 다니니까 찬송가에서 은혜를 받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다 보면 곡이 저절로 써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쓴 곡을 가져가 선생님께 혼이 난 적도 있는데, 도저히 저에게는 현대적인 어법이 떠오르지 않고, 떠오르는 것은 그저 찬송가를 듣고, 부르며 은혜 받았던 것만이 생각날 뿐이었지요. 지금 현대 작곡가들을 보면, 음악의 첫 출발이 순수하게 교회음악에서부터 출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감동이랄까, 소위 ‘은혜’라는 것을 모르고 쉬운 단계들을 거치는 것 같아요. 대표적으로 현재 새로이 편찬된 찬송가집을 보면 한국 작곡가들의 곡이 100곡 정도 들어가 있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교회음악으로서 많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마 김순애 선생님이 살아계셨더라면 매우 안타까워 하셨을 겁니다.
이상만_ 김순애 선생님은 찬송가를 작곡하지 않으셨나요?
이영자_ 그 시절에는 찬송가를 작곡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이미 기존의 찬송가가 주를 이루었었죠.
강순미_ 김순애 선생님의 가곡들은 대부분 선생님이 젊은 시절에 작곡한 것입니다. 비록 찬송가는 작곡하지 않으셨지만 다양하고, 좋은 가곡들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만으로도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물론 가곡사에 있어서는 훌륭한 분이지요. 하지만 나운영 선생님은 원불교 곡도 작곡하시고 다방면으로 활동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김순애 선생님께서 찬송가집을 내셨더라면 정말 걸작이 나왔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영자_ 당시 찬송가에 나운영 선생님 곡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아마 넣었다 뺐다 했었지요? 제가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은 성당에 미사를 보러갔는데, 6/8 박자의 찬송가를 3/8 박자로 바꾸어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고, 또 한 가지는 어느 날 찬송가가 385장이었다가 건너뛰어서 390, 400 이렇게 된 것을 보고 ‘이거 찬송가가 왜 이러냐?’라고 묻자, 저작권 때문에 다 빠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노래를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순미_ 또 한 번은 육군사관학교의 교가 공모에 작품을 내어 당선되기도 하셨습니다. 육사출신들의 말을 들어보면, 3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가 우승한 후 교가를 부르면 승리의 곡으로 느끼게 하고, 또 질 때면 슬픔을 느끼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박은혜_ 김순애 선생님이 미국에서 돌아가시고 한국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 육사 생도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직접 운구하였습니다.
이용일_ 육사생도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데요. 또 선생님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없을까요?
이상만_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굉장히 고운 얼굴이셔서 인기가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김순애 선생님을 따라다닌 분들도 많지요.
임진_ 김순애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졸업연주에서 「바이올린 소나타」를 발표하셨고, 바이올린은 계정식 선생님이, 피아노는 김순애 선생님이 직접 연주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그 때의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고 하셨지요. 선생님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음반이 귀하던 시절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대선율에 감동받아 쓰신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계정식 선생님께 화성학을 배우시며 음악에 눈을 뜨기도 하셨는데요. 한 번은 “작곡과로 전과를 하니까 곡이 잘 안 써진다. 다시 피아노과로 옮길까?”라며 우스갯소리도 하셨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박은혜_ 김순애 선생님과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을 마주칠 때면, 여러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선생님을 알아보고는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은 선생님이 경기여중에 계실 때 선생님께 배웠던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 수업을 들었던 다른 학과 학생들 이셨습니다. 한마디로 선생님의 인기는 남녀를 초월하여 최고이셨습니다.
이상만_ 오늘 이 자리에서 꼭 해드리고 싶은 말씀은 김순애 선생님이 경기여고에 재직하실 때 교내 합창 경연대회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반마다 합창단을 만들어 교내 경연을 하신 것이지요. 그 당시 음악교육적인 면모로 보았을 때 정말 획기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_ 우리나라에서 학급별 합창 경연대회를 처음 시도하셨는데, 우리 음악계에 큰 별이셨죠. 그리고 가곡의 방향도 제시하셨고요. 이상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기신 김순애 선생님에 대한 인물탐구를 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앞으로도 좋은 소식으로 김순애 선생님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리·장혜령 기자 / 사진·김문기 부장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작곡가 이영자(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한국여성작곡가회 명예회장)
음악평론가 이상만(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작곡가 임진(평택대학교 교수)
작곡가 강순미(성신여자대학교 교수)
음악이론가 정소희(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주)음연 대표이사)
작곡가 박은혜(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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