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지휘자 박은성
오랜 세월 쌓아온 음악으로 나눔의 삶 실천
언제 어디서든 유머 감각 있는 사람이 인기가 있지만 요즘에는 더욱 그러하다. 재미있는 농담을 통해 대화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거나 밝게 만드는 것은 특히, 리더들에게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박은성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서 지휘자로서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뛰어난 음악성에 더해 탁월한 유머 감각도 지녔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솔직함은 기본이고, 필요하다면 성대모사도 구사하며, 재치있게 이야기하는 선생과의 대화는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어졌다. 하지만 선생은 필요하다면 국내 음악계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베테랑 인터뷰이(interviewee)인 선생은 "예전부터 여러 곳에서 커버 스토리 인터뷰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이번에는 하게 되었네."라고 운을 뗀 후 편하게 이야기나 하자며 카메라, 커피 등 이런저런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이끌기 시작했다.
오페라 지휘에도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다
올해로 칠순을 맞이한 선생은 강단과 악단에서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맡으며 청중과의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춘천시향, 강남심포니, 부산시향 등의 연주가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선생이 한참 젊었을 때에 비하면 1/10도 안 되는 무대 횟수이다. 한창 젊었을 때에는 일 년에 60회 연주를 하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당시 우리나라에 지휘자가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지휘자라고 해도 평생 지휘 한 번 못하는 지휘자도 많고, 이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던 때는 내가 원하는 작품을 원하는 협연자와 연주했지만 이제는 내 오케스트라가 없어 그렇지 못해 아쉬워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시스템에서는 자기 오케스트라가 있더라도 오페라 무대는 갖기가 어려워요. 지휘자라고 해도 한국과 외국에서 생각하는 지휘자상에는 큰 차이가 있지요. 일단 외국에서는 지휘자라고 하면 어디 극장(오페라 하우스) 소속인지부터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디 극장 소속"이라는 말 자체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현재 이스라엘 필하모닉의 종신 지휘자인 주빈 메타를 예로 든 선생은 "일반인들은 주빈 메타를 그저 지휘자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넓은 오페라 레퍼토리를 가진 지휘자 중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지휘자라고 하면 교향곡만 지휘하는 걸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지휘 공부 중 50% 이상이 오페라예요. 하지만 국내에서는 오페라 지휘는 실력이 부족한 지휘자가 한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박은성 선생은 국내에서만 해도 창작 오페라 7편을 포함해 36편의 오페라를 지휘한 경험이 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팔리아치」, 「세빌리아의 이발사」, 「안드레아 세니에」 등을 비롯해, 창작 오페라 「초분」, 「결혼」, 「춘향전」 등을 지휘하며 오페라 지휘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휘자들이 오페라 지휘에도 중점을 많이 둬야한다"는 선생은 "오페라단의 운영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요즘 국내 오페라 공연 중 한국인 지휘자가 지휘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고, 우리의 창작 오페라도 외국인이 지휘하는 것은 넌센스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특별히 좋아하는 오페라는 무엇인지 묻자 선생은 많다며,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경우 수십 번을 지휘한 경험이 있고,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살로메」 등 지휘해보고 싶은 오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부를 다 마쳐놓고 지휘를 못한 작품도 있다며, 서재에 가서 두꺼운 악보를 갖고 와 첫 장을 펼쳐 보여줬다. '1996년 시립 오페라 연주를 계획하다가 오케스트라 관계로 중단함. 6월.'라고 적혀 있었던 이 악보는 바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이다. 이미 비엔나 유학시절 공부한 경험이 있고, 좋아하는 오페라였지만 아쉽게도 중단했던 이유는 턱없이 부족한 연습 횟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장미의 기사」 같은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 리허설만 20회 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때 6회 연습만 하라더군요. 어려운 작품이고,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는 작품도 아닌데 그런 연습 횟수로는 무리지요. 우리나라에서 이상한 것 또 한 가지는 '연습을 많이 하면 못하는 오케스트라'로 알고 있는 것이에요."
선생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하던 시절 지휘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오페라 하우스 상주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서 오랫동안 일한 덕분에 오페라 공연만 연간 200회씩, 5년 반을 경험했다. 오페라를 지휘자, 연주자로 접해 작품만이 아니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어떻게 제작하는지에 대해서도 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찾아온 지휘 경험, 인생을 바꾸다
성악가였던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음악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박은성 선생은 9살 때 바이올린으로 음악을 시작, 6․25 전쟁 당시 서울시향의 전신인 해군정훈음악대의 악장이었던 이봉수 선생을 사사했다. 그리고 부모님을 따라 여러 음악회를 접하며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키웠고, 서울대 음대에 진학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음악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중에 하이페츠 같은 연주자가 되고 싶다' 같은 이야기는 해도, "지휘자가 되겠다"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만큼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지휘가 낯선 분야였지요."
하지만 박은성 선생의 인생을 바꿔놓는 지휘의 기회가 우연히 찾아 왔다. 당시 임원식 선생이 서울대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서울예고 교장,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등 1인 다역으로 바빠, 수업에 늦은 날이 있었다. 그래서 악장이었던 박은성 선생은 일단 우리끼리 해보자며 앞에 나가서 마음대로 지휘를 했고, 늦게 도착한 임원식 선생이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평소 지휘에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지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라 용감할 수 있었던 거죠(웃음).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 4악장」을 엉망진창으로 지휘하다가 선생님께 들켜 얼굴이 새빨개졌는데, 선생님께서 계속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는 조만간 서울예고로 찾아오라고 하셔서 찾아뵈었더니, 당시 4학년이었던 저에게 졸업 후 예고 오케스트라를 맡으라고 하시더군요. 출세한 거죠(웃음)."
이후 지휘자로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졸업 후, KBS교향악단이 국립교향악단이던 시절, 그 단원으로 활동하던 중 서울시향 협주곡의 밤을 지휘해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고, 25세 되던 해에는 드디어 국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의 지휘 기회를 얻기도 했다.
여기저기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린 선생은 정식으로 지휘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오스트리아 유학 길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촉망받던 젊은 음악가였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레슨을 받고 나와서는 눈물을 훔치며 도나우 강을 건너는 일이 부지기 수였다.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지휘자였던 쿠르트 뵈스 선생님이 내한했었는데, 당시 그분이 나들이를 원하셔서 다른 단원과 함께 모시고 다녔고, 여러 가지 대화를 하다가 지휘 이야기도 나왔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사실 나는 이 다음에 지휘자가 되고 싶은데, 한국에는 지휘자가 많지 않고, 지휘를 배울 수 있는 학교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이후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신 후 저에게 초청장을 보내셨습니다. 그 덕분에 1974년 오스트리아에 가서 브루크너 교향악단의 정식 단원이 되었고, 선생님 댁에서 지휘 레슨을 받기 시작했어요. 벌써 40년 전이네요. 내 나이가 그렇게 많이 들었어요. 속상한데 할 수 없지요(웃음)."
하지만 박은성 선생은 내심 비엔나 아카데미(현재의 빈 국립음대)에 진학하길 원했다. 주빈 메타,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을 비롯해 유럽의 웬만한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 중 상당수가 그 학교 출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쿠르트 뵈스 선생은 박은성 선생이 자신과 더 공부하길 원했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간곡하게 부탁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신이 평생 받은 졸업장, 증명서 등을 무게로 재면 1kg이 넘지만 지휘생활 40년 동안 그 중에서 단 한 장의 종이도 써먹은 적이 없다고요. 그러면서 학교에 가기보다는 자신과 여기서 계속 공부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빈 아카데미에 진학하지 못한 선생은 단원으로 활동하던 브루크너 오케스트라의 휴가 기간 동안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국제 여름 아카데미에서 지휘공부를 시작했고, 거기에서 그의 은사인 오트마 주이트너를 만났다. 그는 스승과 함께 찍은 사진을 서재에서 갖고 와서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여름 아카데미에 50여 명의 학생이 왔고, 몇 명만 연주를 시켰는데 저도 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어요. 그 때 선생님께 개인레슨을 받고 싶다고 했더니 자신과 공부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입학 시험을 보라고 하시더군요."
지휘과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화성학, 대위법, 오페라 반주, 지휘 실기 등 준비해야 할 과목이 많다. 그래서 박은성 선생은 낮에는 오케스트라 단원 생활을, 그리고 밤에는 입학 시험을 준비해야했고, 한국어로 공부해도 어려운 화성학, 대위법 등을 독일어로 공부하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원래 사사하고 싶었던 분은 주빈 메타, 아바도의 스승이었던 전설적인 지휘자, 한스 스바로프스키였어요. 그래서 오스트리아에 갓 왔을 때 제자가 되고 싶었다고 그분에게 편지를 썼지만 답장이 없었는데, 몇 달 후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났더라고요. 그래서 빈 아카데미에서는 그분의 후임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오트마 주이트너 선생님께 친서를 보내서 교수로 모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빈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셨고, 저도 입학 시험을 치러 그 분의 첫 제자가 되었지요."
쿠르트 뵈스 선생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에 갔던 것이 1974년이었고,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지휘자가 되어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이 1981년이었다.
여러 악단을 이끌며 국내 음악계 발전에 공헌하다
귀국 후 박은성 선생의 공식적인 지휘자로서의 시작은 서울시립소년소녀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였다. 이후 국내외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했으며, 서울대, 추계예대, 이화여대 등에 출강하던 선생은 한양대 음대의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1990년 대통령 표창, 1991년 한국음악협회에서 '올해의 음악상' 지휘 부문을 수상했으며, 2005년에는 음악비평가협회 제13회 음악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0년 4월에는 한국 지휘자 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을 지냈다.
지휘자 박은성 선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2001년 수원시향, 2007년 코리안심포니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활동한 것이다. 선생이 수원시향을 맡을 당시 수원시향은 전임 지휘자와 단원간의 불화가 있었고, 단원도 20여 명이 줄어 60명 정도에 불과한 상태였다.
"사실 처음 수원시향을 보고 눈앞이 캄캄했어요. 오케스트라가 상당히 정돈이 안 된 상태여서 우선 재건하고자 했지요. 그리고 수원시향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주력하기 시작했고요."
그래서 선생은 수원시향과 녹음 작업을 통해 여러 장의 CD를 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한 경험을 살려, 당시 국내에서 잘 조명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브루크너, 말러를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수원시향을 비롯해 한국의 젊은 지휘자들을 대외적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수원시와 함께 2005 국제지휘콩쿠르를 개최했다. 국제 규모의 지휘 콩쿠르가 국내에서 개최된 것은 처음이었으며, 33개국 출신 134명이 참가하는 등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박은성 선생은 "제2회가 개최될 즈음 내가 코리안 심포니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렇다고 콩쿠르가 사라진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글_배주영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2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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