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평론가 박용구[朴容九]
문화예술평론가 박용구 선생은 1914년 경북 풍기에서 태어나 평양고보(平壤高普)를 거쳐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중앙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1937년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음악평론사에 입사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일제 식민 지배와 6.25 동란을 겪은 한국의 척박한 토양 속에서 음악, 무용 평론가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극작가와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로 활동을 펼쳤다.
박용구 선생은 도쿄에서 음악 전문 잡지 <음악평론> 기자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평론을 써내려가면서 광복 직후 음악교과서 <임시중등음악교본>을 펴냈다. 또한, 1948년 국대 최초 음악평론집인 <음악과 현실>을 내놨다.
1942년에는 평양에서 극단 공연을 성공적으로 펼쳤으며 1944년 해방직전까지 경성 동흥실업학교에서 교사로 생활 했다. 1960년에는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를 연출하는가 하면 1962년 창단한 예그린악단의 고문위원이기도 했다. 예그린악단은 서울시뮤지컬단의 전신이며 그는 단장도 역임했다. 1966년 한국 최초의 창작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의 제작을 맡아 히트를 친 그는 「꽃님아 꽃님아」, 「바다여 말하라」 등을 제작하며 창작뮤지컬의 문을 열었다.
그는 1976년에 발족한 음악팬클럽의 회장을 역임했고 1976년도 일간지 또는 월간지에 평론을 발표하였다. 1977년에는 김형주, 이상만, 이성삼 등과 함께 평론활동을 펼쳤으며 주로 <공간>과 <현대예술>에 평론을 발표했다.
서울신문에 음악평을 발표했고 한국일보에 음악평을 발표했으며, <음악동아>, <객석>, <공간>, 일간신문 등에 음악평을 발표하였다.
일시 : 2016년 6월 8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건용(서울시오페라단 단장)
남정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박용구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저희 음악계를 위해서 작곡과 연주로 음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분도 계시지만 평론으로 음악계의 발전을 도와주신 분 가운데, 지난번에 유한철 선생님을 모셨고 오늘은 박용구 선생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제가 어느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듣는데 가장 나쁜 사람이 ‘나 뿐인 사람’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걸 생각하면서 박용구 선생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을 위한 분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좌담을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예술계, 무용계, 음악계에서 폭넓게 활동하셨으며 그 업적도 대단한데, 후학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리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박용구 선생님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은 어땠나요?
이상만: 원래 박용구 선생은 경상북도 풍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옛날에 정감록비결에 십승지지(十勝之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십승지지는 조선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장소를 말하는데 그 중 풍기가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안도분들이 대거 풍기로 이사를 갑니다. 그래서 박용구 선생의 선친이 풍기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죠. 풍기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평안도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면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던 유명한 냉면집도 두 군데나 있습니다. 박용구씨 집안이 교육적으로 깨어있는 집안이라서 박용구 선생은 풍기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평양으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당시 풍기 사람들이 평양으로 유학을 많이 보냈습니다. 평양으로 유학을 가서 평양의 명문인 평양고보 혹은 평이중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평양고보는 우리나라에서 국무총리를 네 사람을 낸 유명한 곳입니다. 노신영, 이영국, 육군 참모총장이며 육군 군악대를 창설한 김계원도 그 학교를 나왔습니다. 또한, 요즘 매스컴에서 많이 튀는 김동길씨도 박용구 선생의 평양고보 후배입니다. 그런 평양고보의 명문에서 공부를 하면서 체계적인 학문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의 중앙음악학교라고 하는 곳에서 성악을 전공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일본대학교 문과에 들어가서 일본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일본어 필체라던가 이러한 것들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 당시 <음악평론사>라고 하는 일본의 잡지에 기자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 <음악평론사>의 주관이 일본의 유명한 평론가인 야마네긴지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박선생이 그곳을 마치고 나와서 우리나라에 와서 음악평론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용일: 박용구 선생님이 일제 강점기 때 서울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나요?
이상만: 서울에서 음악 평론 활동도 이미 시작을 했고 안기영씨가 하는 악극단 관계를 하게 됩니다. 또한 1944년 해방직전까지 경성 동흥실업학교에서 교사로 생활 합니다.
김형주: 박용구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음악평론을 시작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신문과 잡지에 신랄한 비평을 가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해방 후에 우리나라에는 좌우의 정치적 갈등이 심했고 그 영향이 음악계에도 미쳤습니다. 우익은 대한음악가협회가 있었고 좌익에는 조선음악가동맹이 있었습니다. 박용구 선생은 좌익 쪽에 있었기 때문에 우익 음악가들에 대한 비평을 읽는 사람이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직설적으로 하셨습니다. 특히 그중에도 대한음악가협회 회장이었던 현제명 박사에 대한 비평이 매우 심했습니다. 박용구 선생은 적당히 꾸미는 것이 없이 날카로운 비평을 하였는데 이것이 하나의 비평문화의 시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좌우의 정치적 갈등이 심해서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1948년에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어 정부가 수립 되면서 좌익을 탄압하기 시작해서 지명수배가 나오면서 음악계도 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명수배 명단에 올랐던 조선 음악가 동맹 회원들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러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음악가들이 월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학교를 다니는 학생 이었지만 좌익파와 교섭하면서 작곡가인 김순남씨와 안기영씨를 많이 만났습니다. 사실 그 당시 좌익 쪽에 있는 음악가들은 뚜렷한 정치색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었으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좌익 쪽에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순수한 음악평론을 집필하여 우리나라의 음악평론을 개척하신 분이 박용구 선생입니다. 그분은 우리나라 음악평론의 개척자이자 시초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이용일: 그렇다면 박용구 선생님도 도망 다니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나오셨나요?
김형주: 이 분이 월북하지 않고 도망 다니고 있는 와중에, 어느 날 제가 조간신문을 보니 크게 ‘음악평론가 박용구씨 투신자살’이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신발과 유서를 낙화암에 두고 투신자살했다는 내용과 함께 사진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들려오는 소식이 그분이 일본에 가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투신자살이라고 위장을 하고 일본으로 밀항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시나리오도 쓰고 일을 하면서 10년간 지내다가 4.19혁명 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일 년 조금 못가서 5.16 군사 혁명이 나면서 다시 잡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금방 다시 나와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박선생님이 1962년 즈음에 결혼을 한다고 해서 제가 사회를 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 서울 장안에 유일했던 양식집에서 결혼을 하셨는데 당시에 사모님이 지금 봐도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전형적인 한국 스타일이고 점잖고 이상적인 한국의 전형적인 부인이었습니다.
***박용구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 오늘 이 자리에 남정호 선생님이 오셨는데, 무용계에선 어떻게 보나요?
남정호: 저는 박용구 선생님을 음악평론가라기 보다는 무용 평론가로 처음 만났고요. 선생님이 100여 년간 살아오시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다 겪으셨기에, 그분이 무용평론이나 매체에 글을 쓰실 때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의미들이 역사가 함축되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박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명사 하나도, 동사 하나도 어느 하나 뺄 것이 없는 것이 어느 하나도 뺄 것이 없는 언어를 구사하시는 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제가 1982년도에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소극장인 공간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 당시 “박용구 선생님이 보러왔으니 영광으로 알라.”는 말을 누가 저에게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는 그분이 누군지 몰랐지요. 그리고 1983년도에 박용구 선생님과 조동하 선생님을 주축으로 한국무용펜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드셨는데 박용구 선생님께서 저를 회원으로 추천해주셨습니다. 제 공연을 한 번 보셨고, 제가 쓴 글을 몇 개 보신게 전부인데 저를 추천해주신 것을 보고 저에게 거는 기대가 있으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그분이 까다로우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절묘한 비평을 제 작품에 2번이나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나를 믿어주시고 이해해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용평론가로도 활동하셨지만 작가도 하셨고 연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본디 예술가적 기질이 충만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가 시대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했기에 평론가로 활동하셨지 예술을 하셨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용일: 이건용 선생님이 박용구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라고 들었습니다. 박용구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언제였나요?
이건용: 저와의 첫 만남은 선생님께서 공간에 자주 계실 때 이었습니다. 제가 1975년~1976년에 처음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저는 대학원생이었고 나중에 저희 집사람이 된 친구가 거기서 잡지 편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저희 집사람을 많이 귀여워해주셨던 것으로 기업합니다. 공간에서 모였던 펜클럽과 자주 만나게 되면서 선생님도 뵙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바탕이 되어 제가 서울대학교 교수임용을 위해 추천서를 받아야할 때 선생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작곡에 음악이론 파트가 처음 생겨서 제가 임용을 신청하려고 할 때 이론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께 부탁을 드리고 하나는 박용구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선생님께서 너무나 흔쾌하게 한지에다가 붓펜으로 세로로 조선조에서나 볼법한 추천서를 써주셨습니다. 그 분께 제가 교수임용 추천서를 받을 정도이니까 당시에 선생님의 글이 많이 읽혔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 저도 평론을 막 시작하여서 공부를 하는데 그 분이 쓰신 글 정도의 것들이 없었습니다. 참 놀라운 글입니다. 대부분 1940년대에 쓰신 글인데 당시 환경이 이런 글을 쓸 만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글을 용감하게 쓰실 수 있었을까 놀랍습니다. 특히 무소르그스키에 관한 글은 제가 인용할 정도로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박용구 선생의 음악세계와 국내 예술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박 선생님이 무용 평론을 일본에서 10년 동안 하셨습니다. 제가 1958~1959년에 공군에 있었는데 당시에 우리나라 발레단에 남자가 없어서 공군에서 시간적으로 여유가있는 하사관을 선발하여이 발레를 할 정도였습니다. 월북하신 최승희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한 분도 계시지 않고, 아주 열악하고 무용의 이론적인 배경이 바탕이 안 된 상황에서 박용구 선생님이 무용계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신 분이 아니신가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일본에서 10년 동안 무용단에 계셨기에 우리나라의 무용계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미리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무용계가 바로 잡게 해주신 것이 아닌가합니다.
남정호: 박용구 선생님께서는 당시 국립 발레단에 혹평을 가하기로 유명하셨습니다. 임성남씨 입장에서는 척박한 땅에서라도 공연을 지속적으로 올려야 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박용구 선생님이 참다못해서 직접 유니버셜 발레단에 개입하시면서 유니버셜 발레단 「심청이」의 대본과 연출을 맡으셨습니다. 또한 외국인 안무가와 댄서들을 데리고 와서 연출을 하셨고 이러한 일들로 인해서 박용구 선생님이 생각하신 미학과 발레 수준에 맞춰 나가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생님께서는 발레단에 있으면서도 한국 창작 무용에 우리의 민족성이 깃든 작품을 누군가가 만들어 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라로 대본을 만드시고 안무가 안은미씨가 안무를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역사성 있는 한국적인 작품을 만들기를 원하셨던 것 같아요. 본인도 그런 쪽으로 무용가들한테 어느 정도 방향도 제시를 해주셨습니다.
김형주: 선생님은 원래는 음악 평론가이십니다. 당시 일본으로 밀항해서 시나리오도 많이 쓰셨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들로 음악뿐 아니라 발레에도 관여하셨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음악평을 쓰셨는데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는 주로 무용평론을 쓰시면서 음악평론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상만: 아까 김형주 선생님 말씀에 덧붙이자면, 일제 강점기시대에 활동했던 음악 평론가인 김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 굉장한 혹평으로 유명했고 해방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박용구 선생이 글쓰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매우 각박했다. 하지만 그분의 통찰력과 문장력이 대단한 힘을 가직 있었기 때문에 박용구씨의 손을 들었습니다. 이전에 말씀하신 <음악과 현실>이라고 하는 음악평론집은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음악평론집을 낸 것입니다. <음악과 현실>에서 현제명 선생에 대한 날카로운 혹평을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과 현실>은 판매 금지가 되었다. 박용구씨 주위에는 음악가들도 상당히 많이 있었지만 가까운 사람 중에 문학하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설정식, 김동석씨 입니다. 그분이 음악학교를 다녔지만 일본대학에서 문학적인 수련을 했기 때문에 평론에 대한 기초적인 능력이 갖춰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선생님이 해방 후에 중요한 작업인 중등음악교본을 편찬을 했습니다. 그 교본에 실린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어서 음악교육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초창기에 우리나라의 음악적 풍토들을 평론으로 정리한 분이 박용구씨가 최초이고 그 필력이 대단히 강해서 신문을 통해서 사회목탁이라는 것을 실현한 분이 그분입니다. 당시에 동아일보가 매체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는데 그곳에 평을 쓰시면서 천하무적의 필봉을 내둘렀습니다. 또한, 그분은 체구가 작았지만 속에는 평안도 기질이 굉장해서 욱하면 사람들이 꼼짝 못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강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분이 여러 가지 문학적인 식견과 문장력을 가졌고 세계를 보는 역사관들이 뚜렷했기 때문에 전무후무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박용구 선생님은 많은 오페라를 연출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업적은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써 1962년에 가무극(오늘날의 뮤지컬)을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1988년에 88올림픽 개회식에 「벽을 넘어서」라는 대본을 쓰신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피력한 사상이 천지인 사상입니다. 이 작품을 통하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사관이 많이 바뀌었는데 이 분은 이 작품으로 인해 빛을 보지는 못하셨습니다. 또한 이 분은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는데 음악계뿐만 아니라 무용계에도 많은 대본을 쓰셨습니다. 한 가지 여담으로 얘기하면, 1960년대 외국 영화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박용구 선생님이 하셨습니다. 그 당시 외국 영화는 주로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일본어에 능통하신 선생님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활동하는 영역이 폭 넓었지만 처음에 글을 많이 쓰게 된 것은 <공간>이라는 작품이며 김수근씨와 일본에서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김수근씨가 공간을 운영하는 부분에 대한 아이디어를 박용구씨에게서 많이 얻었습니다. 공간사랑을 만든 것이 박용구씨의 아이디어입니다.
김형주: 제가 오늘 가지고 나온 책이 박용구 선생이 쓰신 <음악과 현실>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평론집입니다. 이 책의 절반은 음악평론이고 나머지는 수필입니다. 평론들이 정리가 잘 되어있고 신랄하며 내용의 가감이 없습니다. 이는 박용구 선생님의 기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분의 성품이 적당히 넘어가고 타협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분이 일본에서 나와서 평론을 하다가 1964년에 처음 우리나라에서 음악평론 단체라고 하는 ‘음악평론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박용구 선생님이 회장하고 저와 이상만 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활동하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평론을 하고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5.16혁명이 일어나자 처음으로 정부의기관인 중앙정보부가 생겼습니다. 그때 김종필씨가 부장을 했었고 거기에서 예그린악단을 직속으로 조직하여 만들었습니다. 예그린악단을 만든 이유는 그 당시 북한에서 유명한 오페라인 혁명오페라를 세 가지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당시 정보부 직원들이 보고 우리도 만들자라는 의견이 나와서 예그린악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공연을 시민회관에서 했는데 공연의 내용이 부실하고 재미가 없어서 손님이 없었습니다. 제가 지켜보다가 4회차 공연을 보니까 안되겠구나 싶어서 동아일보에 비평을 썼습니다. ‘예그린악단에 바란다’라는 제목으로 운영상 현재 체계로는 안되며 공연에 흥미가 없으니 오페라단을 만들어 시대극을 하라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석간이였는데 아침에 바로 정보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날 중앙정보부 서울 분서로 가서 그 사람들을 만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저를 내보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바로 예그린악단이 문을 닫았고 그 이듬해 새롭게 박용구 선생님을 단장으로 세워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 4회차에 연출을 맡은 분이 박 선생님이였는데 제가 운영을 비평한것이였지만 그 공연을 비평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박용구 선생님이 다시 시작하였을 때 시나리오를 쓰신 것이 「살짜기옵서예」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뮤지컬입니다.
이용일:「살짜기옵서예」의 원작은 무엇이였나요?
김형주: 소재는 <맹진사댁 경사>와 비슷하였고 시나리오를 선생님이 짰습니다.
이용일: 이건용 선생님은 선생님과 어떠한 영향을 받으셨나요?
이건용: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제가 새해에 인사하는 세분이 계셨는데, 김달성과 이성재 선생님이고 다른 한분이 박영구 선생님이셨습니다. 매해 가족을 전부 데리고 가서 같이 세이장(洗耳莊)으로 가서 가면 늘 예술계에 대한 담론, 시국에 대한 담론을 하셨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음악과 현실>을 새로 만들자고 했을 때, 제가 가지고 있던 선생님의 많은 저서들을 다 동원하여 공부하여서 논문을 하나 냈습니다. 그 논문을 퍽 좋아하셔서 <음악과 현실>을 새로 만들 때 그 글을 넣자고 제안해주셨습니다. 이 책이 수십년 만에 재판이 나왔는데 그 글이 들어가 있습니다. 세 번째 인연은 1997년인데 그 당시 한창 무용대본을 많이 쓰셨습니다. 바리데기 설화가 정말 좋은 춤의 소재인데 왜 작품이 없는지 모르겠다며 당시에 국립발레단의 최태지 단장을 설득하셨고 저에게 오케스트라 무용음악을 쓰면 좋겠다고 저를 설득하셔서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로 발레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한 시간이 넘는 분량의 오케스트라 곡을 작곡해야했고 미리 녹음까지 해야 하는 작업 이였으니까요. 그때 당시 제가 지휘했던 코리안심포니가 연주하여 연습녹음을 하였고 후에 공연 때는 최승현 선생님이 지휘하고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선생님과의 세 가지 기억입니다.
이용일: 이건용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 오는 길에 박 선생님이 길목마다 지키고 계신것이네요.
이건용: 해마다 새해가 되면 인사를 드렸는데 나중에는 선생님께서 저희 부부의 주례를 서주시거나 저희를 만나게 해주신 것으로 착각을 하시더라고요(웃음).
이용일: 이 교수님 대단하십니다. 그만큼 박용구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뜻인데, 그게 따라 배우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요즘 오페라단 운영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박 선생님의 일화나 실수담 같은 것은 없었나요?
이상만: 박용구 선생님이 결혼을 3번 하셨습니다마는 박용구 선생님의 주위에는 언제나 여자들이 많아서, 여자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분이 굉장히 탁월한 역사학자입니다. 특히, 역사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삼구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우리나라 관악파들이 쓴 역사관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분이 문필이 대단한 것은 많은 책을 섭렵하셨습니다. 특히, 일본에 관련된 책 같은 것은 그분의 집에 가봐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까 이건용 선생님께서 세이장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건축가인 김수근씨가 집을 지어준 것입니다. 글을 쓰면서 살아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고 문화방송진흥에서 이사장을 3년간 하실 당시에만 여유로웠습니다.
이용일: 박선생님이 결국 역사를 공부한 것은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위한 것 보다는 그분의 예술세계를 펼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만: 그런 것도 분명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남정호 선생님이 열심히 탐독 하셔습니다. <어깨동무를 해야 살아남는다>라는 책인데요.
남정호: 선생님께서 집에 가면 가끔 저서를 저에게 선물로 주셨는데요. 그중에 <어깨동무를 해야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 책은 한중일 문명적인 관계 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같이 사이좋게 살 수 있는지를 어깨동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만주에 잠시 계셨으며 일본에서도 오래 동안 생활하셔서 선생님 본인의 생각이 깊이 있지 않으셨나 싶습니다. 그분이 가지고 계신 내적인 생각은 일본의 문화적 자양분을 많이 섭취하셨기 때문에 본인이 그것을 이겨내시려고 굉장히 노력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용: 동의합니다. 간혹 어떤 느낌을 받았냐면, 저분이 일본어로 나오는데 그것을 한국말로 하신다고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사고는 일본어로 더 빨리 되셨는데 내색을 안하시고 한국말로 바꿔서 생각하시냐고 시간이 걸리신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당시 유명한 가부키 배우의 은퇴공연 중계를 집에 방문했을 때 보고 계셨습니다. 엄청 느리게 진행되는 그것을 켜놓고 보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과 일본 양쪽이 다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일본을 확실히 알고 계셨고 그게 한국에서 어떻게 자리 잡아야하는 의식도 있으셨습니다.
이용일: 정리하자면, 우리보다는 일본이 훨씬 먼저 정착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10년 동안 발레단에서 있으시면서 발레에 대한 내용을 다 섭렵하셨을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발레리노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분이 보시기에는 정말 너무 아쉬울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나서지 못하시고 뒤에서 보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악은 그래도 당시에 무용계보다는 상황이 좀 더 나아졌기 때문에 무용계에서 활동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용: 선생님께서 88세 되셨을 때, 친구 분들과 다함께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 백수(99세)이실 때 <새로운 것을 내다보면>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하나 내셨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 그때 감동적인 장면은 먼저 돌아가신 부인에 대한 사랑의 고백 시가 있었는데 이것을 낭독하시는데 목소리가 쌩쌩했습니다. 그 시를 읊어주시고 박수를 받으시면서 꽤 감동적으로 그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남정호: 그 당시에 제가 그 모임에 참여하지 못해서 나중에 따로 뵈러 갔었는데, 장수교본을 쓰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그 다음에 나올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건용: 선생님의 장수비결을 제가 세 가지를 들었는데 하나는 냉수마찰이고 하나는 물구나무서기 이었습니다. 80세쯤 되셨을 때, 제 앞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셨습니다. 마지막은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소식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이상만: 박용구 선생님이 멋쟁이였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옷을 제일 잘 입는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 분의 서체가 독특했습니다. 나중에 붓글씨로 전시회를 하셨습니다. 또한 이 양반이 철봉을 잘하십니다. 정신이나 육체적으로 103세를 살만큼 요건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술을 못하셨습니다.
김형주: 박 선생님이 물론 무용 비평도 쓸 만하셨지만, 저는 음악 비평을 안 하신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불만을 직접 이야기하기도 했죠(웃음). 제가 기억하기에 박용구 선생님은 지조를 지키시며 불의를 참지 못하고 타협이 없으셨습니다. 말 그대로 적당히 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인 우리가 배워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분의 이러한 성품은 평론에도 나타납니다. 그분의 평론은 직설적이고 날카로우며 그 당시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직설적인 평을 할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웠습니다. 이러한 타협 없는 비평은 우리가 배워야하지 않겠느냐 생각이 됩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7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김형주(한국원로음악가협회 회장)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건용(서울시오페라단 단장)
남정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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