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작곡가 박영근[朴英根] / 음악춘추 2016년 6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7. 1. 2.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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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작곡가 박영근[朴英根] 


작곡가 고 박영근은 한양대학교 음악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매네스음대에서 공부하였다. 1976년 동아콩쿠르 작곡부 1위, 1979년 미국 N.M.Y.E. 작곡콩쿠르 2위 입상(주최: New Music for Young Ensembles, Inc. New York), 1999년 최우수교수상(한양대학교)을 수상하였다.

정기연주회(1980), 동아일보사 주최로 열린 작곡발표회(1983), 한국타악인회 정기연주회(1984), 7인 작곡발표회(1985) 등을 통해 실내악곡들을 발표해 왔고, 코리안심포니 정기연주회를 통해 관현악곡 <향수>와 <비가> 그리고 제10회 아시안 게임을 기념하는 문화예술촉진 서울국제음악제에서 관현악곡 <세계를 가슴에 안고>, 제24회 올림픽을 기념하는 문화예술촉진 88서울국제음악제에서 칸타타 <올림피아드>를 선보였다. 이 밖에 국립오페라단의 위촉에 의한 소극장 오페라 <보석과 여인>, 국립합창단 위촉에 의한 칸타타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한 혼례곡>, 합창조곡 <황진이의 사랑>과 성남시립합창단 위촉에 의한 <유민의 노래>, 제29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관현악곡 <떠남, 상실 그리고 돌아옴>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김용진, 박중후, David Loob 교수를 사사하였고 아시아 작곡가연맹 한국위원회 이사, 한국작곡가협회 이사, 한국교회음악협회 이사(부이사장 및 이사장)로 활동 하였으며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일시 : 2016년 5월 9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 악기사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이상만_(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만방_(작곡가, 숙명여대 음대 명예교수)

이종구(한양대 명예교수, 남북문화예술원 원장)

이근형(작곡가, 한양대 겸임교수)

김두영(작곡가)


***박영근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박영근 선생님은 갑작스럽게 타계하셨는데, 그분의 업적을 우리들이 같이 이야기 해볼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분은 대외적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한 분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대단히 내실 있는 작곡가로 평가 받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박영근 선생의 제자들과 함께 선생님의 업적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먼저, 박영근 선생의 성장과정에 대해 제자들이 얘기들은 적 있나요? 


이근형: 선생님께서는 평안북도 비현에서 1947년도에 태어나셨고 한국 전쟁 중에 월남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몰래 빠져나와야 했기 때문에 소리가 나면 안 되니까 어린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였다고 하는데요. 선생님 역시 어린 나이에 똑같은 상황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제가 듣기로는 두 번 정도 시도하셨다가 실패하였었고 세 번째에  월남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후에 그 당시에 수장했던 많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작품도 쓰셨습니다. 이후에 휘문고등학교 밴드에서 플롯을 연주하면서 음악을 시작하셨고 작곡을 공부하셨습니다. 1960년도 한양대 음대에 입학하시고 1978년도에 미국으로 유학 가서 1982년도에 귀국 후에는 한양대에서 재직하셨으며 2015년에 정년퇴임하셨습니다. 


이용일: 박영근 선생님의 부모님의 직업은 뭐였나요?


이근형: 직업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론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같이 넘어오셔서 10년 전 까지 모시고 사셨습니다. 음악적인 배경이 부모님을 통해 있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이용일: 선생님의 형제들은 어땠나요?


김두영: 형님이 있었지만 음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용일: 어느 선생님에게 사사를 받으셨나요?


이근형: 박중후 선생님의 제자이십니다.


김두영: 선생님의 성장과정에서는 영락교회를 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상에서 월남을 하셨던 분들이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해방촌을 이루셨고 선생님이 거기서 성장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락교회를 통해서 음악적인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들은 에피소드들로 미루어 볼 때, 교회에서 받은 영향이 적지 않을 거라 짐작정도 하고 있습니다.


***박영근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김두영: 저는 대학교 입학해서 처음 뵈었습니다. 


이근형: 박영근 선생님은 고등학생을 레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뵈었습니다.


김두영: 그 당시에는 보통 대학을 입학해서 선호하는 선생님을 순위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때 뵙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선생님의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김두영: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MT 첫날 이였는데, 저는 MT 장소인 콘도의 수위아저씨가 들어오신 줄 알았습니다. 권위의식이 느껴지지 않았고 편안한 옷차림을 하셔서 자유로우신 느낌 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교육가로서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상당하셨습니다. 제자 입장에서는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외부적으로 조용하게 지내셨다는 것을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제자들끼리도 ‘깨비스’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돈독하게 지냈습니다. 


이근형: 저도 1989년도 입학해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합격자 발표이후에 입학까지 2달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좋은 선생님하고 공부하고 싶어서 선배들한테 물어봤는데 많은 선배들이 박영근 선생님을 추천해줘서 그때 처음 뵈었습니다. 김두영 선생님 말씀하셨지만, 교수님이라고 하면 높은 지위에 따른 존경심이 생겨서 보통 다가가기 조심스럽고 어렵기 마련인데, 선생님은 그런 것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안하신건지 제자들이 당황할 정도로 권위의식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시고 허물없이 저희들을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무섭거나 권위적인 이미지보다는 큰 형님 같은 느낌으로 따랐습니다. 졸업 후에 선생님과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지속적인 만남을 갖는 모습이 큰 형님 같은 이미지로 저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용일: 이종구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이종구: 저는 대학을 다닐 당시에는 박영근 선생을 직접적으로는 몰랐지만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기에 ‘어느 대학에 누가 있다’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한양대 부임하면서입니다. 박선생님이 저보다 일 년 먼저 부임해 계셨습니다. 박영근 선생의 사고는 냉철하고 논리적입니다. 내성적이기도 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부분이 없었고 확실한 성격 이였기에 다른 사람과 부딪힐 일이 없는 분이였고 저와도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이용일: 이만방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났나요?


이만방: 저도 이종구 선생님 같이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갔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알지 못해도 어느 학교 누구라고 하면 대부분 알았습니다. 그러던 와중, 박영근 선생이 1976년 동아 콩쿠르에 입상하던 해에 본선 연주에서 처음 박선생의 작품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음악회에 오며가며 보다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제가 사단법인 작곡협회 이사장 할 때 박선생님이 부 이사장 할 때입니다. 그때 박선생님을 보니까 전체 회의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탁월했고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종구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성격적으로도 아주 깔끔하고 뒤끝이 없었고 일처리가 처음과 끝이 명확해서 믿음이 갔습니다. 


이용일: 이상만 선생님 말씀해주십시오.


이상만: 제가 한양대학교에서 강사로 있을 때,「엘리야」를 작곡한 박재훈 선생이 박영근 씨를 아주 참한 학생이라며 소개해주었습니다. 또한, 박중후씨가 제 친구인데 아주 괜찮은 학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휘문고등학교 선생을 하던 친구인 조동재씨가 플롯을 잘 연주하는 친구가 있다며 박영근씨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어렸을 때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제가 주목을 하게 된 것은 1976년 동아콩쿠르를 통해서였고 88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같이 일하면서 빈틈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영근 선생의 음악세계와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선생님의 음악세계는 어떤 것 같나요?


김두영: 말씀 드리기 어려운 부분인데 우선, 소위 말해서 교과서 적으로 이야기하면 표현주의에 속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제가 졸업을 하고 나서 선생님의 작품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근형: 제가 선생님 음악을 접하고 느꼈을 때는 곡에서 반음계주의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19세기말에서 20세기 넘어오면서 나타났던 무조보다는 조금 더 확대된 조성음악으로 느껴졌습니다. 앞서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셨던 뚜렷하다는 점이 박영근 선생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음악에서도 모호함보다는 정확함을 추주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어떻게 보면 예상되는 음악이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을 작가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이 가장 원하셨던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쉽지 않은 행보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많은 음악학회가 있는데 학회에서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많이 선호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연주를 아예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쭤봤었는데 당시 선생님께서는 바빠서 그렇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만 학회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외부연주를 굉장히 많이 하시고 오페라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카데믹하고 진보적인 소리를 발표하는 장에는 연주를 잘 안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듣고 뚜렷한 무언가를 가질 수 있는 음악을 하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음악의 방향성을 굉장히 명확하게 가려고 하셨습니다. 


이용일: 이종구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종구: 저나 이만방 선생님이나 박영근 선생님은 모두 비슷한 연대입니다. 저희들 선생님들의 음악경향은 서양음악이라는 첨단을 지향하는 세계와 경쟁을 하는 느낌 이였습니다. 아방가르드 음악을 하더라도 서양과 비교하여 지기 싫어하여 대립적이고 경쟁적이지만 뭉쳐지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또래에서는 그것에 대해 조금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면이 대표적으로 나타난 것이 박영근 선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음악작품을 표현한다면 인본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사람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이 암암리에 한양대에서 좋은 제자들과 함께 하나의 학풍으로 고정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젊은 작곡가들에게 인본주의적인 경향이 많이 확대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근대 음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용일: 선생님의 말씀은 항상 문화는 충돌에 의해서 반동이 생긴다고 말씀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만방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이만방: 이종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 음악사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저희의 선생님들 세대까지는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대였고 지금의 후배들은 그것을 넘어서 세계적인 기술적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세대에는 현대음악이라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음악이 현대음악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저희가 배울 때는 항상 이야기를 어떻게 썼는지 방법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유학을 가고 다양한 나라의 음악적 흐름을 접하면서 방법보다는 무엇을 쓰는지가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던 에코그린, 지속가능한 것, 지역의 문화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현대음악 내에서도 고민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흐름이 달라져서 개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중국식 한자어로 기록되어진 우리나라말이 보편화되면서 큰 글을 담으려고 했을 때 일제감정기로 인하여 모든 사상언어와 학술용어가 일본식으로 담겨지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주옥같은 예술가들이 짧은 기간에 확대되게 되지만 한국 전쟁이 벌어짐에 따라서 미국식 영어로 된 사상과 예술이 우리나라 글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고 난 후, 우리의 생각을 한글로 담는 흐름이 저희들 세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사유를 어떻게 우리말로 담을 수 있는지를 여기계신 이종구 선생님이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만들어 활동한 것이 제3세대 운동 이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움직임 속에서 중립을 지킨 것이 박영근 선생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영근 선생님이 그 어느 그룹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이용일: 네. 이상만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상만: 이전에 김두영 선생이 말했지만 박영근 선생의 음악의 본질은 종교성입니다.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는 그분의 음악을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경향으로 봐서는 신보수주의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분이 태어난 곳이 신의주 근처였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대단히 강한 급진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선생님은 종교라는 테두리를 가졌기에 그것을 억누르고 자기 내적인 연소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은 영락교회 당회 서기를 맡았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인데 그 직분을 맡으면서 영락교회를 평화롭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음악계에서도 어느 학회에 속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타협주의자 이기도 합니다. 앞서, 한양대학의 학풍을 정립했다고 말씀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작곡 교육의 큰 틀을 만들어 놓은 것은 부단한 자기희생과 자기연소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우연히 한양대를 나온 김병진이라는 중앙일보 콩쿠르에 입상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봤는데, 절대 자기 주장을 학생에게 주입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열린 측면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 이런 이야기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것은 문헌에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제자 분들은 선생님 작품을 소개해주세요.


김두영: 선생님 곡 중에 관현악 곡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 평생 동안 흥미를 가지신 곡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선생님 작품 중에서 특별히 하나를 언급하기 보다는 늘 선생님의 악기를 정교하게 다루는 방법들을 작품을 통해서 즐기고 배웁니다.


이근형: 저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의 오페라 작품 중「보석과 여인」의 리허설도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리허설을 보면 공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셔서 가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제가 오페라 작품을 쓰다 보니 이러한 영향을 모두 선생님께서 주신 것 같습니다. 오페라는 오케스트라, 챔버, 보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선생님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곡 중에서 관현악 곡도 종교적인 성향을 띄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쓰신 오페라 중「내 잔이 넘치나이다」도 종교적인 작품입니다. 오페라「보석과 여인」은 이후에도 많이 연주된 작품으로, 앞서 말씀하신 선생님의 음악적 언어와 접근 방법, 악기에 대한 이해, 교육적 측면도 꼼꼼하고 디테일하게 다루셨기 때문에 기억에 가장 남습니다. 


이용일: 이종구 선생님은 어떤 작품이 기억에 남나요?


이종구: 저도 오페라를 들고 싶은데요. 박영근 선생은 교회에서 한평생을 산 사람이기에 교회 성가대를 오랫동안 지휘했습니다. 그래서 성가대에서 합창과 인성을 다루는 테크닉을 자연스럽게 습득했고 또, 고등학교 때부터 한 밴드부 활동과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서의 활동을 통해, 오케스트라를 작곡할 때 가장 중요한 관악을 다루는 문제에 대해 탁월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종합적으로 이어져서 오페라가 이 분의 가장 큰 장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페라야 말로 베르크가 언급했듯이 사람 목소리로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가장 인본주의에 적합한 재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은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두영: 실제로 선생님은 사람을 참 좋아하셨고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이를 드라마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기승전결 구조가 명확하여 이야기가 있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이 기악곡과 오페라 모두에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이용일: 이만방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이만방: 제 개인적으로는 종교곡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종교곡이 어느 특정 종교에 치중되어서 우리 근대사회에서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떠나 너무 한쪽으로 평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영근 선생의 기악곡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종구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케스트라 곡에서는 금관악기를 그 특성에 맞게 다루면서 음향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가 관건입니다. 이점에 우리나라 작곡가들이 취약한데 박영근 선생은 이를 잘 다루었습니다. 또한, 박 선생님의 음악이 인품을 따라 너무 깔끔해서 장점이면서 단점이 되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분의 음악은 교과서 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박영근 선생은 혹시 국악기를 안 썼습니까?


이근형: 태평소와 피리를 다룬 작품이 있습니다.


이용일: 이상만 선생님은 작품을 어떻게 보셨나요?


이상만: 제가 보기에는 아주 상식적인 작품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국악기를 위해서도 음악을 썼지만 국악기의 특성을 살린 다기 보다는 자신의 작품 안에 국악기를 포용하는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제가 앞서도 강조했지만 한국 교회음악을 한 단계 올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음악협회를 이사장까지 지낼 정도로 오랫동안 관계하였는데 조직을 통해서 개신교 음악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하는 공로도 작품 못지않게 훌륭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박영근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 박영근 선생의 교육관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이근형: 선생님의 교육관 중에 티칭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할 수 없으면 선생을 그만 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레슨을 들어오지 않으면 직접 나가셔서 데리고 올 정도로 적극적으로 레슨 하셨습니다. 곡을 써 가면 발표를 해야 할 정도로 노트 하나 하나에 집중하셨고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으면 혼났습니다. 이유가 명확해야 했고 악기에 예민하셨기 때문에 악기공부를 하고 곡을 쓰게 하셨습니다. 곡을 쓰면서 모든 아티큘레이션을 다 챙기시는 등 꼼꼼하게 레슨을 하셔서 8마디를 레슨 받아도 한 시간이 모자를 정도 였습니다. 너무나 진지하게 레슨을 해주셨기 때문에 저희들도 진지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또한, 이것은 저도 학생들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곡을 쓰고 나서 연주를 하지 않은 작품은 작품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연주 연습도 시켜주셨습니다. 제 작품을 리허설 하면서 연주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용일: 아주 좋은 말입니다. 지금 작곡과 교수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레슨 한다고 보면 됩니다. 당연히 곡을 써오면 음악적인 아이디어를 물어봐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심하게 제동을 걸거나 간섭하면 개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작곡과 교수들이 그 경계를 어렵게 찾고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박영근 선생님은 어땠습니까?


김두영: 정교하셔서 숨 한번 쉬기 어려울 정도로 사석과 수업 안에서의 선생님이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일반 수업에서도 어려운 과제물들을 수행해야했고 엄격했으며 아주 실질적 이였습니다. 개념을 이야기하고 뜬구름 잡는 주의 개념이 아니라 작곡에서 만큼은 리허설도 중요한 수업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종이위에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주하여 울리는 소리까지가 레슨이였습니다. 


이용일: 교육은 잘못된 것을 교정해주고 방향을 제시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 작곡가들이 방향을 잘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선생님들이 어떻게 레슨을 하는지를 많이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물론,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도 있었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옳은 방법이냐는 수용하는 학생에게 알맞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박영근 선생님을 높이 평가 할만 합니다.


이상만: 이야기 중에서 가장 와 닿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 한양대 설립자 모토인데, 박영근 선생이 그것을 철저하게 이행했다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제가 레슨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박선생은 굉장히 집요하면서도 학생들의 의사를 꺾지 않았고 어떻게든지 스스로 자기가 고쳐서 하도록 유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해준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만방: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박영근 선생님의 유족에게 선생님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니 ‘목표를 세워서 그것을 실행하며,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간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전에 안익태 선생 후원회에서 이사를 초빙하는데 다른 작곡가들이 가지 않아서 저와 박 선생님이 4년 동안같이 활동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저에게 우리 죽을 때 가족들을 고생시키지 말자고 말했는데 선생님이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박 선생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나눔과 배려를 하자’라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남한테 줄 것을 주고 항상 감사하자라고 말했고 남의 말을 항상 귀담아 들었습니다. 영락교회에서 성가대를 어려서부터 했고 장로 직분을 맡으면서도 지휘를 계속 하였습니다. 사모님도 나눔과 배려를 충분히 한 사람이기에 슬프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도 배울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6년 6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고 작곡가 박영근[朴英根]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상만_(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위원)


이만방_(작곡가, 숙명여대 음대 명예교수)


이종구(한양대 명예교수, 남북문화예술원 원장)


이근형(작곡가, 한양대 겸임교수)


김두영(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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