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한국 교향악계의 선두주자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운창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클래식 음악을 보급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한국 교향악계의 선두 주자이자 산 증인인 故 백운창 선생(1933.11.4~2016.12.18)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불모지와 다름없는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의 기초를 다져 놓았다. 또한 전후 세계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기 시작했던 실내악 운동을 우리나라에서 주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실내악단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백운창 선생은 한국의 클래식을 이끄는 2세대 음악인으로 서울 마포 동막(서강)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시작하였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기악과를 졸업하고 뉴욕 메네스 음악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956년 KBS교향악단 창설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공군교향악단 악장, 서울시립교향악단 악장, 국립교향악단 악장, 서울스트링 콰르텟 창단 멤버 등을 역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교향악단인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창단을 주도한 그는 1985년부터 1998년까지 악장을 역임했으며, 예술의전당에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하이든과 카발레브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하였으며 수차례의 개인 독주회와 서울시립교향악단, 서울챔버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하였다.
또한 계명대학교 교수(1968),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교 교수(1979~1999)로 재직하다가 정년 했다. 그 후 한국원로교향악단(2003)과 한국교향악단(2009)을 창단하여 악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끝없는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연주가로서 후배 음악인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일시 : 2017년 5월 11일 오전11시
장소 : 코스모스악기 7층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영준(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서울신포니에타 음악감독)
백미영(바이올린 연주자, 전 뉴저지심포니 멤버)
기주희(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
염은하(청주시립교향악단 수석, 카톨릭대 출강)
1. 백운창 선생의 성장과정과 음악의 출발
이용일: 오늘은 우리에게 항상 밝은 세상을 보게 해주셨고 낙천가이신 백운창 선생님의 업적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 교향악계의 선두 주자이며 바이올린 계에서 대단한 업적을 쌓고 후학들을 양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년 후에도 그치지 않고 연구하고 제자들과 함께 연주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저와는 공군교향악단을 같이 했고 한국교향악단에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기리기 위해서 선생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따님인 백미영 선생님이 함께 해주셔서 오늘 대담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백 선생님에 대해서 이상만 선생님 말씀해주신다면요?
이상만: 저는 중학교 때 백운창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백 선생님은 사대부고에 진학했었는데, 당시에는 바이올린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도 당시에 바이올린을 하고 있어서 공통점이 있었지요. 아무튼 고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으로서 알고 있었고, 저보다 1살이 많으신데 백운창씨가 늦게 학교를 다녀서 과는 달랐지만 함께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대학교 때는 친구들과 함께 만든 클럽이 있었는데, 그로인해서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 후에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절친한 관계로 지냈는데, 순 서울사람이고 모든 것이 바른 분이었습니다. 말씨도 순 서울 말씨를 써서 아주 깨끗하고 白(백)씨 같은 삶을 살아서 친구들에게 굉장히 존경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용일: 백 선생님의 대학교 진학이 늦은 이유는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초등학교 교사로 계속 지냈으면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와 친밀한 관계여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재미있고 적성에 잘 맞았는지, 굉장히 즐거워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상만: 당시 초등학교에서 재직한 것은 사대부고를 나왔기 때문에 비슷한 자격을 인정 받았을 것입니다.
이용일: 백운창 선생님의 원래 고향이 용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백미영: 네. 용인 신갈입니다. 원래는 포천에 기반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용일: 백 선생의 부모님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집안에 음악하시는 분들이 있었나요?
백미영: 저희 조부모님께서는 두 분 모두 교육자이셨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가 7살이 되던 해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 계속 교직에 계셨고 교장도 역임하셨습니다. 누나가 한분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고 아버님께서 3대 독자로, 아들이 귀한 집에서 자라셨습니다. 집안에 음악을 하는 분은 안계셨지만 할머니께서 교육을 많이 받으신 분이셨고, 귀공자처럼 자라셨기에 악기를 하나 배우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음악을 시작하신 것으로 압니다.
2. 백운창 선생의 첫 만남
이용일: 김영준 선생님은 백운창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어땠나요?
김영준: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대부분에게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어린나이에 쉽게 시작 할 수 없는 악기였을 것입니다. 저도 어릴 때 장난감 같은 악기를 가지고 놀면서 음악을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진로의 문제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백운창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계명대학교에 내려오셨던 백운창 선생님께 찾아가서 연주를 했는데 요즘말로하면 오디션을 봤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제 연주를 듣고 “전공을 하라.”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부터 선생님께 정식으로 스케일과 에튀드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 배우면서 한국일보 콩쿠르도 1등하고 한양대 콩쿠르 1등하고 서울대학교 음대를 들어갔습니다. 저에게는 음악을 하게 된 전환점, 제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해주신 분이 선생님이십니다.
동아콩쿠르 수상 후에 국립교향악단에 솔리스트로 서게 해주셔서 협연을 했고,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셔서 국립교향악단 1st 바이올린 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악장으로 계시던 이지연 선생님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두시게 되면서 악장대행으로 활동하다가 군대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케스트라 생활과 음악계에서의 사회생활을 굉장히 일찍 시작했는데 선생님께서 모두 끌어주신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엔나 유학 후에 서울시립교향악단 악장을 맡게 되었는데 백운창 선생님도 서울시립교향악단 악장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가는 셈이 되었죠. 그리고 원로교향악단도 창단하면서 백운창 선생님을 악장으로 모시고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이용일: 사실 백 선생은 기교만큼은 아무도 못 따라 갔습니다. 제가 지켜보았을 때 연습도 별로 안하는 것 같았는데요.
백미영: 남모르는 연습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이용일: 물론 연습을 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연습도 덜 했습니다. 이것은 타고난 재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집중력이 대단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주희 선생님은 언제 처음 선생님을 뵈었나요?
기주희: 저는 예원학교 재학 중이던,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선생님을 옮겨야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남수 교수님 사모님의 소개로 백운창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서울예고, 서울대학교 시절까지 선생님께 계속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교를 졸업 한때가 마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창단한 때라서 감사하게도 단원으로 추천해주셔서 유학가기 전까지 2년 정도 활동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선생님께 배운 셈입니다.
이용일; 백운창 선생님의 제자하면 기주희 선생님이 바로 나올 정도로, 선생님이 기 선생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기주희 선생님, 염은하 선생님, 두 제자의 이름을 항상 입에 달고 다니셨죠. 백 선생님 성격에 그저 자신에게 아부한다고 좋아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큼 제자들이 열심히 했기 때문에 좋아하셨겠죠. 염은하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염은하: 저는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 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김용일 선생님께 배우다가 숙대에 입학하고 나서 백운창 선생님께 가라고 추천해주셔서 선생님께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때 선생님 연세가 환갑이셨는데, 저를 손녀딸처럼 예뻐해 주셨고 부족한 점을 잡아주셨습니다. 제 기억에 항상 학교에 기주희 선생님께서 계셨고, 항상 따님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유학 다녀와서 선생님을 가끔 찾아뵈면, 스튜디오에서 선생님 악기도 연주하게 해주시고 함께 듀엣연주도 했습니다.
이용일: 백미영 선생님은 어떻게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백미영: 저희 아버지께서 저를 굉장히 예뻐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이올린이라는 어려운 길을 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바이올린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을 하셨죠. 제가 굉장히 늦게 시작했는데도 바이올린과 잘 맞아서 더 예뻐 해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기초의 중요성에 대해서 항상 말씀하셨는데, 스케일과 에튀드를 많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제가 기초연습을 흥미 있게 받아들였고, 이것이 제가 후에 줄리어드에 들어갔을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줄리어드에서 저를 가르치셨던 선생님께서 한국의 학생들이 유학을 오면 기초연습보다는 곡을 많이 연주해서 테크닉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셨어요. 그것은 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강조하신 스케일과 연습곡을 많이 시켜서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저희 아이가 공부가 끝나서 함께 한국에서 연주를 하려고 했는데... 저로서는 안타깝습니다.
3. 백운창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 백 선생님이 기초가 워낙에 튼튼했기 때문에 죽기 아님 살기로 연습을 하지 않아도, 기본이 있는 사람은 쉽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듣게 되었는데, 활을 짓누르지 않고 일정한 소리를 내는 음악가를 보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우리나라 현악기 연주자들이 소리를 가볍게 내지 않고 짓눌러서 극적인 효과를 내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그 연주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연주자들이 작곡가의 음색을 연구하지 않는 것이 아쉽죠. 그런데 백 선생은 귀가 발달 되어 있었습니다.
김영준: 저는 아이들에게 꼭 명심해야 할 부분을 기초연습으로 삼습니다. 운동선수로 치면 아침에 일어나서 조깅부터 하고 줄넘기하고 체력단련부터 해야 하듯이, 가장 중요한 것이 기초 연습부터 하는 것입니다. 기초연습을 하루 종일 해도 충분하지 못한데, 요즘은 이러한 연습이 다 무너져 있습니다. 콩쿠르를 준비하기 위해서 곡만 잠깐 연습해서 내보내다보니 기초를 연습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백운창 선생님은 기초를 확실하게 잡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굉장히 많이 연습 했고요. 그 덕분에 지금까지 연주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용일: 김영준 선생님은 연습벌레라고 소문났습니다.
이상만: 저는 6.25전쟁 전에, 중학교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3학년 때까지 4년 동안 플루트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유명하지 않은 선생님에게 배우다가 나중에 북한으로 간 문학준 선생님께 배웠는데, 4년 동안에 곡을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스케일과 연습곡을 배웠습니다. 그때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백 선생님이 연습곡 위주의 연습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선생님들은 다 일본과 독일에서 배운 분들이라서 기교에 아주 철저했기 때문에, 기초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훈련받은 사랑 중에 하나가 백운창 선생님이죠. 그런 것을 가지고 김영준 선생님을 가르쳤으니 훌륭한 분이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4. 백운창 선생의 교육관
김영준: 아마 저부터 그러한 혜택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콩쿠르에 심사를 가보면 중간에 커트를 합니다. 백운창 선생님은 항상 끝까지 다 들어주시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다시 해보라고 격려를 하셨습니다. 레슨을 준비할 때도 한 악장만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전곡을 다 준비해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제가 유학 가서도 많은 효과를 봤죠. 지금 활동하는 젊은 바이올린 하는 친구들은 명심해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분야를 통틀어서 기초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용일: 스즈키 바이올린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전혀 연습하지 않는 토너리제이션이 있습니다. 사실 거기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데 보통 그걸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백 선생님도 토너리제이션을 아주 좋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니 음악을 표현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기교, 음악적인 능력의 향상이 거기에 다 들어있는 것이죠. 물론 그것이 전부 맞다고 할수 없지만,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토너리제이션인데 그것을 일반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사상누각이 되어서 김영준 선생님 말대로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주희: 백 선생님께서 저에게도 마찬가지로 연습곡과 스케일을 항상 중요하게 말씀하셨고, 제 기억에 80년대 나왔던 에튀드는 거의 다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예비연습과 응용연습도 다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학생들을 가르쳐보니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크로이처 에튀드까지만 하면, 학교도 진학해야하고 콩쿠르도 나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연습곡들을 꼼꼼하게 시키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당시에 선생님께 배운 기초들이 지금까지 연주생활을 할 수 있는 계기 가 되었고, 모든 것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오케스트라 악장을 오랜 시간 한 경력들이 저는 굉장히 대단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선생님이 핑거링이 굉장히 좋으셨습니다. 저도 유학 가자마자 모차르트 4번을 했는데, 보잉과 핑거링이 좋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백운창 선생님께서 좋은 핑거링을 많이 알려주셨고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교육을 많이 해주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용일: 백운창 선생은 천상 선생입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제자들을 다 생각해주십니다. 그런 선생님께 배웠기에 좋은 제자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백미영: 저희 아버님의 가장 좋은 점은 자기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셨습니다. 유학하실 때 브론스틴 선생님께서 “우리는 시간이 많이 없으니 시대별로 하자.”고 하셔서 바로크부터 가장 최신 시대까지 하나씩 정해서 다 연습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연습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하신 거예요. 브론스틴이 나이가 많은 학생이 연습을 성실히 하니까 대견해서 모든 것을 다 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유학을 갔더니, 브론스틴 선생님이 “어떻게 나한테 네가 안 올수 있냐?”고 화를 내셨습니다(웃음).
이용일: 백운창 선생님께서 용인청소년교향악단의 지역원로음악가와 함께하는 연주회에서 악장을 하신 것은 대 히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해프닝입니다. 할아버지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연주하시면서, 그것도 좋아서 긴장을 했습니다. 저는 좋은 음악가들이 음악적인 정년이 아니고 연령 정년으로 그만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백 선생님을 보면서 했습니다. 선생님처럼 나이가 들수록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만: 백 선생이 음악적인 것도 좋았지만, 사람관계에 인품이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주변에 친구들이 따랐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물론 말은 빠르고 싫은 것은 싫다고 분명하게 표현 하셨지만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러한 인품을 가졌기 때문에 아마 오케스트라에서 악장도 하고 교수도 하실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 받는 것이 아마 그분 음악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용일; 오케스트라 악장을 한다는 것은 엄청 힘든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2~3년이면 제 발로 나오는데 백 선생님은 오랜 시간 악장을 하셨습니다. 배병호씨가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로, 백운창 선생님이 주도해서 대단하시다고 했는데 백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아쉽습니다. 아직도 하실 일이 많이 있었고 그 스튜디오를 활용을 못해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백 선생님께 이제는 좀 쉬시라고 말하면, 저에게 “내가 연습을 안 하면 뭐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음악가들이 백 선생님처럼 꾸준하게 음악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미영: 아버지 스튜디오에 가면 뮤직 스탠드가 있는데, 악보가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두께가 꽤 두꺼웠고요. 그래서 “아버지는 여기 있는 악보를 전부 연습하세요?” 라고 물으면 “응, 다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당일 연습할 악보는 그것만 뽑아서 연습했는데, 아버지는 좋아하는 곡의 악보를 모두 준비해 두시고 항상 리마인드 하시는 것 같았어요.
이용일: 백 선생님이 가장 처음 연습시키신 곡이 무엇인지 생각나시나요?
기주희: 하이든의 G Major Concerto이었습니다.
염은하: 저는 대학교 때 뵈었기에, 바흐를 계속 시키셨습니다.
이용일: 바흐나 하이든을 시킨 것은 현악기 연주자에게서 활이 중요하다고 본거죠?
백미영: 그것보다도 음악적인 세계에서 음악의 기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죠. 하이든과 바흐의 음악을 좋은 소리로 연주하기 어렵죠.
이용일: 그러니까 화려하고 경쟁에 가서 이기게 하는 곡을 시킨 것이 아니라, 롱런하는 기반을 닦기에 주력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준 선생님은 어떤 곡을 처음 배웠나요?
김영준: 아마도 조반니 비오티 같습니다. 요즘 그런 곡들을 잘 안하지요.
5. 백운창 선생의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악장을 하신 것은 당시의 계보로 봐서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요?
김영준: 그때 홍연택 선생님과 함께 창단을 하셨고, 당연히 악장을 하신 것이 맞았죠.
이용일: 당시에 KBS에 백운창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잖아요?
김영준: 그렇죠. 서울시향에 악장을 하시다가 그만 두시고 국립교향악단이 KBS교향악단으로 이관 되면서 홍연택 선생님이 같이 창단을 하셨죠.
이용일: 백 선생님은 서울시향 쪽이니까 하셨죠. 그런데 라인으로 봐서는 홍 선생님하고 맞지 않는데요?
김영준: 그 당시는 여건이 그랬습니다. 백 선생님이 악장을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셨고 요. 당시에 민간인 교향악단 창단했을 때 경악을 했습니다.
이용일: 민간인 교향악단은 한국교향악단이 먼저 있었죠.
이상만: 한국교향악단은 1960년대에 생긴 것입니다. KBS교향악단에서 나온 일부 단원들을 모아 홍연택씨와 같이 민간인 교향악단으로 코리안심포니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죠. 백운창씨처럼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음악계에 있었기 때문에 음악계에 상당히 중요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용일: 백운창씨가 있었기에 김영준 선생님이 나왔죠. 저는 이를 하나의 계보로 봅니다. 아버지께서 안병서씨에게 처음 배웠나요?
백미영: 네 배우셨습니다.
이상만: 안병서씨 제자가 나온 사람이 두 사람인데 미국 간 김찬영과 백운창씨입니다.
김영준: 백 선생님 시대에서는 지금 제자로 치면 김남윤, 김영준, 피호영이 오랫동안 배웠고, 어떻게 보면 제 또래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백 선생님께 안 배운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젊은 연주자들의 미래를 열어주고 개척해준 역할도 하신 분이죠.
요즘에는 레슨이 돈벌이로 변한 모습도 간혹 보이지만, 백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모처럼 사회로 끌어주셨습니다. 그것을 외국의 사례를 보면 많은 대가들이 혼자 연주 잘하고 사라진 경우도 많은데, 뉴욕의 아이작 스턴 같은 경우에는 펄만, 슈크, 요요마 등등 기라성 같은 사람들을 연주를 시키고 키워주면서 자신도 연주하고 가르쳤습니다.
백운창 선생님과 대입을 시키면, 백 선생님도 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가 연주 하기 쉽지 않은 어려운 곡인데, 제가 직접 다 들었는데 당시에는 그 곡들을 듣기 좋게 연주하는 경우는 참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실내악이나 오케스트라 등의 본인 연주를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키워주는 것을 보면 한국의 아이작 스턴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이용일: 좌우지간, 연주가로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왜 서울대학교 교수를 못했을까요?
백미영: 교수하시는 것을 꺼려하셨습니다. 교수보다는 본인을 연주자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김영준: 학교는 교육기관이고 오케스트라가 연주기관이니 학교가 두 번째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도 물론 지금도 그렇고요. 백 선생님은 학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어찌해서 숙대에 초빙되어 가셨습니다. 일부러 막 가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우연히 가신 것이죠.
백미영: 전혀 그쪽이 아니라고 생각하셨어요. 숙대도 사실은 어머니가 강력 추천해서 가신 것 같아요. 본인이 하려고 하신 것은 아니라서... 아마 그래서 시간이 지연 된 것 같습니다.
이용일: 이것이 바로 후학들이 들어야할 말입니다. 모두들 대학 교수가 되고 싶어 하고 그것으로 평가하는 우리사회에서 남다른 생각을 가지신 백 선생님의 모습을 조명 해봐야합니다.
백미영: 저희 아버님께서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라도 자신의 생각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별로 비중을 많이 안두셨습니다. 남들이 가고 싶으면 가지만, 내 자신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김영준: 음악가로써 마음 뜨겁게 살 수 있는 곳은 무대입니다.
이용일: 백 선생님이야말로 뜨겁게 무대에서 살다 가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백미영: 이번에 저희 가족과 제자들이 함께 아버님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어서, 일 년에 한 번씩 아버님 기일에 맞춰 음악회를 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사회봉사도 하려고 계획 중에 있고요.
김영준: 이번에는 12월 17일 세종체임버홀에서 ‘故백운창 교수님 추모음악회’라는 타이틀로 제자들이 모여서 연주를 합니다. 현재 추모곡도 포함하여 프로그램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일단은 일년에 한번으로 시작하지만 점차 활성화 시켜 2번까지 진행하려고 하고, 제자들의 제자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백 선생님 이름으로 계속 가려고 합니다.
정리_김진실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6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행 :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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