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인천 창업회장
故 박성용 명예회장
박삼구 회장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창립 40주년, 그 발자취를 따라서
일 시: 2017년 4월 5일 오전11시
장 소: 금호아트홀 3층 접견실
진 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 널: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의명: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신수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용연: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부사장)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미래가 차세대 음악 영재의 발굴 및 육성에 달려 있다고 믿는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올해로 재단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회장이신 故 금호 박인천 회장이 1977년 재단을 만들어 장학 사업과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창업회장께서는 ‘기업의 오늘을 있게 한 지역과
지역민들에게 그 이윤의 일부를 되돌려줘야 한다.’라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재단을 설립하여 장학금을 수여하였고 광주, 전남의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것으로 재단의 사업을 시작했다. ‘영재는 기르고, 문화는 가꾸고’라는 사업 취지를 가지고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창업회장의 경영철학을 물려받아 클래식 음악, 미술, 장학 사업을 아우르는 우리나라 문화재단 가운데서도 모범적인 문화재단으로 성장했다.
故 박인천 회장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예술인에게도 아낌없는 지원을 해왔다. 특히 동양화와 음악을 사랑했던 박 회장은 임방울 선생을 집으로 초청해 음악회를 열기도 했으며, 광주시립국악단을 적극 지원하였다.
故 박성용 회장은 先親인 박인천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서울로 옮기면서 클래식 음악지원에 특별히 힘을 쏟게 되었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에도 베토벤 교향곡을 즐겨 들을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박 회장은 한국 메세나 운동에 앞장서는, 손꼽히는 문화예술 후원자였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기업가 최초로 예술의전당 이사장, 통영국제음악제 이사장, 한국메세나협회 회장을 지냈다. 또한 1990년 실내악단 금호현악사중주단을 창단 하였고 60개국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2000년엔 금호아시아 사옥 내에 전문 공연장인 금호아트홀을 열어 연주자들에게 무대를 열어줬다.
특히 가장 애착을 가지고 진행한 사업은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갈 음악영재를 발굴하여 후원하는 음악영재 발굴이다. 1998년 ‘금호영재콘서트’ 시리즈, 1999년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를 개설하여 금호영재로 선정된 아티스트들에게는 장학금, 악기, 무료 항공권, 외국 교향악단 협연 기회 등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역대 선발 된 금호영재로는 김선욱(피아노), 김태형(피아노), 손열음(피아노), 조성진(피아노), 故권혁주(바이올린), 이유라(바이올린), 김봄소리(바이올린), 신지아(바이올린), 임지영(바이올린), 조진주(바이올린), 최예은(바이올린), 고봉인(첼로), 문태국(첼로), 조성현(플루트), 함경(오보에), 김한(클라리넷)이 있다.
박성용 회장은 2003년 한국메세나협의회장 취임 이후 문화예술지원활동의 흐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2004년 독일 몽블랑 문화재단이 주는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받기도 했으며, 2014년 박삼구 회장이 동일한 상을 수상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영재는 키우고 문화는 가꾸고’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창업회장인 박인천 회장과 박성용 명예회장의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국의 메세나 운동의 앞장서는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앞선 회장들의 노고가 대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故 박인천 회장과 故 박성용 회장이 문화예술계에 끼친 영향을 지면에 싣는다.
박인천 회장의 문화재단 기틀마련 사업
이용일: 한국 음악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탐구를 해오면서 순수음악가 이외에 음악 서적 및 악보를 출판하셔서 음악계에 공헌을 주신 분들, 악기를 제작해서 기여하신 분들을 비롯하여 그 외에 음악계에 기여하신 분들을 생각하니 박성용 회장님을 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전 이사장님이신 박성용 회장님의 음악사랑 정신과 업적에 대해서 논해 보겠습니다. 이미 우리나라 음악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박 이사장님의 업적은 대단합니다만,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박성용 이사장님이 활동할 수 있게 하신 선친 금호 박인천 회장님의 업적입니다.
금호 박인천 회장님이 처음 1977년도에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을 만드실 때, 광주 언론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신문사 주필이었던 이강재씨를 스카웃해서 문화재단 부이사장을 시켰습니다. 이강재씨는 박성용 이사장님과 중학교 동기이기 때문에 꼭 아들처럼 대하면서 경영을 맡기며 신뢰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창업회장님이 당시에 2억이라는 거금을 주면서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전국 각 대학에 위촉하여 장학생을 선발하였습니다. 전국의 영재들을 기르자는 취지에서 진행하신 사업이었는데,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년 금호의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과 재학생이 광주에서 모여서 대축제를 했었습니다. 또한 금호에서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잡지를 만들어서 교수들과 학생들이 즐겨 쓰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광주 지역내에 예술지원에 힘쓰셔서 광주지역의 음악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박성용 이사장님은 음악분야에 더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박 이사장님이 하신 일을 오늘 이야기하면서 조명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상만 선생님이 보시는 박성용 이사장님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이상만: 세 가지로 압축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로 박 이사장님은 탁월한 경제학자입니다. 미국에서도 교수를 역임했고, 한국에서도 서강대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그리고 한때는 미국의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써서 천재적인 학자라는 평가도 받았고요. 두 번째는 훌륭한 기업인이라는 것입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선친께서 이루셔서 튼튼히 기반을 다지셨지만 그것을 더 크게 약진시켜 육상교통에서부터 항공 산업까지 넓혀 세계적인 기업가로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기업가이면서 탁월한 예술지원가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이용일: 김의명 선생님께서는 언제 이사장님을 처음 만나셨습니까?
김의명: 저는 박성용 회장님이 창단하신 금호현악사중주단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에 문화재단 측에서 현악사중주단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박성용회장님께서 학창시절에 현악사중주 곡을 특히 좋아하셨기에, 거기에 대한 꿈이 많아서 현악사중주단을 만들고자하는 집념이 강하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현악사중주단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였는데, 제 음악을 존중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셔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음악에 대한 애정과 조예가 상당히 깊으셨는데, 연주하러
해외에 가면 바쁘실 텐데도 직접 오셔서 연주자들과 함께 하셨고, 무대 뒤에서 타올과 물을 직접 챙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기도 들어주시고, 보면대를 무대에 직접 올려놓으실 정도로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이용일: 신수정 선생님은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신수정: 처음 회장님을 뵈었을 때는 1996년에 금호미술관을 열어 음악회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영재오디션을 하기 이전이었는데, 그때 뵙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사실은 전에 부이사장 하시던 이강재씨가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가 광주시향을 지휘할 때 광주시향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내 최고의 현악연주자들로 구성된 현악사중주가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광주시향단원들의 지도를 부탁할 목적이었는데, 이강재 부이사장의 거절하는 바람에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강재 부이사장이 갑자기 1억원을 지원 할테니 현악사중주단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박 회장님의 지시였습니다. 故 박평섭 선생에게 이야기 하였니 “선생님. 1억원을 받으면 국내 최
고의 연주가 나와야하는데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단한 연주자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되어서 손을 뗐습니다. 그러니 이강재씨가 광주에서 연주자 이형석씨를 중심으로 금호현악사중주를 창단했었는데, 미국 연주에서 평가가 좋지 않아서 해체되었습니다. 그랬다가 여기에 계신 김의명 선생에게 컨택해서 재 창단 되었습니다. 저는 금호 행사 때마다 이사장님을 뵙고 환담도하였지만, 그분이 현악사중 주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김의명: 현악사중주를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예일대에서 공부하실 때도 현악사중주 밖에 안 들었고, LP를 그렇게 많이 모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용일: 김용연 부사장님께서 보신 회장님은 어떠셨나요?
김용연: 저는 경영 총책임자로 뵈었기에, 지금 패널로 오신 다른 분들께서 말씀하시는 차원에서의 기억은 없고 비슷한 분야에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저희가 영화제를 시작했고, 올해 15회를 맞았습니다. 16년 전에 영화제를 기안할 때, 박삼구 회장님께 결제를 맡으러 갔더니 "형님(박성용)께 승인을 받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명예회장으로 계셨던 박성용 회장님께 가서 보고를 드리고 최종 결정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외에도 다른 문화 전반, 특히 영화 쪽에 관심이 높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다
이용일: 제가 기억하기로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음악분야의 첫 투자는 광주시립국악원을 도와준 것으로, 광주시립국악원을 최고로 꾸며주었습니다. 그리고 선견지명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장학금은 그룹차원에서 하지않아도 할 사람이 많으니 사람들이 접근 안하는 쪽인 음악을 지원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음악가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다른 사람들이 받을 것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가 받은 감사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는 전국의 장학생들에게 지원해주는 사업을 놓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만큼 음악을 중요시 했다는 것입니다. 이상만 선생님 박성용 회장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이상만: 박성용 회장이 경영인으로 부각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문학청년이었습니다. 학교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다녔기 때문에 사회를 보는 시각의 폭이 대단히 넓었습니다. 사회학을 전공했으니 문학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등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리고 제가 듣기에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서 바이올린을 하고 싶어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일리노이 대학에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고 예일대학교 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는데, 당시 예일대를 함께 다닌 사람이 이홍구 전 주미대사 총리를 지내신 분입니다.
그분과 예일대학교에서 현악사중주 뿐만 아니라 베토벤교향곡을 계속 되풀이해서 듣고, 고전과 낭만 음악을 들으면서 예술 전반에 대해 폭넓은 심취를 했습니다. 아마 그런 것들이 창의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분의 경력을 보면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비서했고, 경제 기획원 장관 자문도 해서 우리나라 경제,행정에도 상당히 깊이 있게 관여한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다각적인 인문학적 관심에서 기인해서 처음 금호미술관을 만들고, 그 다음에 음악 쪽에 투자를 많이 하셨는데 우리나라 경제인이 문화재단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영재 지원 사업을 퍼트린 것은 아마 먼 장래를 바라보면서 이런 꿈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 분의 업적 중 탁월한 것 하나가 한중우호협회 회장을 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폭넓게 해석하고, 특별히 중국과의 경제협력에도 상당히 기여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한 그런 측면에서 중국예술인 학자들과도 깊은 교우 관계를 가지면서 중국과 심층적인 교류를 하는데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의명: 이야기를 보태자면, 중국과 경제협력도 하셨지만 당시에 중국의 공인들, 바이올린 메이커들을 찾아 가서 악기를 보고 좋은 악기를 구하셨습니다. 지금 금호에 있는 중국 악기들이 당시에 구입한 것입니다.
김용연: 저희가 올해로 중국과의 교류 25주년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교류를 시작하기 전해부터 이상만 선생님과 박성용 회장님께서 함께 홍콩을 거쳐 중국을 다니시면서 악기를 비롯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 600여점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5~6년 전에 이상만 선생님께서 박삼구 회장님과 상의 하셔서, 보관하고 있던 것들의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셨습니다.
이상만: 서울대 박물관에 기증한 유물은 박성용 회장이 지원한 것이 아니고, 제가 중국 다니면서 수집한 것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 2000년 5월에 무상 기증을 했습니다. 그것을 기증할 때 박성용 회장님이 2017년에 음악당을 짓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래서 그 뒤를 이어 김용연 부사장께서 기증처를 알아보시다가 서울대학교에서 기증을 받겠다고 해서 그곳에 기증했습니다. 마침 박성용 회장과 제가 모두 서울대학교 동문이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박삼구 회장과 상의하여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이용일: 제가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전남대 교수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일본의 교육축어의 군국주의 산물이 라고 반대 성명을 냈습니다. 이 일로인해 11명의 교수들이 파면을 당해서 생활이 어려워졌는데, 박성용 회장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연구비를 주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대상에는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도 도와주시는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김의명: 당시 87개국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했는데, 회장님은 피곤하셔도 각 나라의 박물관을 방문하시면서 그 나라에 대한 문화를 샅샅이 살피셨습니다. 심지어 5~6 시간 걸리는 거리도 가서 직접 보고 오신적도 많습니다.
음악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박 회장이용일 제가 아쉬운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금호현악사중주단원들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주 신 회장님께 섭섭함을 보여줬다는 것.그 이상 지원해줄 수 없는데... 저는 요
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음악가를 만들기 전에 인간을 만들어야죠. 그래서 후 학들에게도 음악을 하는데 도와주신 분을 가르치고 그분을 생각하며 감사함을 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술의전당입니다. 박성용 회장님께서 예술의전당 초대후원회장으로 계실 때, 콘서트홀에 파이프오르간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당시에 기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술의전당에서는 오르간 대신 음악분수를 만드는 잘못을 하였습니다.
김의명: 그때 다들 나이가 어리다보니, 아마 커리어를 쌓는 개념으로 생각했지 현악사중주에 머물러서 계속적인 연주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정신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정도의 생각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수정: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죠. 저는 박성용 회장님이 객관적으로도 훌륭하지만 인간적인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백혜선 선생님 독주회에서 백 선생님이 “이 음악회를 박성용 명예회장님을 추모하면서 회장님께 바친다.”라고 했을 때, 박회장님이 뿌리신 것들이 계속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백 선생님은 회장님을 어떤 기업인보다도 점잖으신 신사분이시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재능이 보이면 최선을 다해서 지원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손열음, 이유라, 김선욱까지...
그리고 일본과도 음악적 교류를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보고 일본 음악가를 섭외하자고 하셔서 회장님과 함께 가서 나카무라 히로코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고 우리나라에 초청했습니다.
음악 천재들에게 절대적으로 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기성 연주자들에게도 많은 지원을 해주셨는데, 제가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과 관계할 때 센다이에서 협연을 한다고 하니 어머님 모시고 직접 와주셨습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많은 추억을 주셨기 때문에, 커다란 기업인보다도 인간적인 분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카무라 히로코가 한국에 와서 저희 집에서 디너를 할 때도 몸이 편찮으셨지만 식사자리에 잠시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게 전적으로 음악가들을 사랑 하셨습니다. 아마 그런 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김의명: 전혀 권위주의적인 행동을 못 봤습니다.
신수정: 금호아트홀을 새로 지었을 때도 본인이 직접표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음악회에서도 제일 먼저 기립박수를 치셨습니다.
이용일: 같이 차를 탈 때도 뒷자리에 회장님이 타실 자리를 제게 내어주셨습니다.
김의명: 당시에 리셉션 할 때도 20~30명이 방에 함께 모이는데, 회장님이 먼저 뛰어가셔서 방석을 놓으셨습니다.
이용일: 금호현악사중주 연주를 할 때도 우리의 과제는 뱃속을 비우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입니다. 연주가 끝나고 회장님이 바쁘면 먼저 가시고 아니면 함께 연주자들과 온 손님들을 위로해서 기분 좋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음악회에 박 이사장님이 좋아서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김의명: 어느 비행장인지 기억이 나진 않는데, 회장님은 제 악기를 뺏어서 본인이 드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가실 때, 야구모자를 쓰고 제 악기를 들고 나오니 직원들이 제가 회장인줄 알고 저에게 인사했습니다. 당시에 악기를 직접 들고 계시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셨고, 유머도 많으시고 장난도 좋아하셨습니다.
박성용 회장 음악영재들과함께 컴퓨터 결제 시스템, 금연빌딩_ 선진기업을 만들기 위한 노력
이용일: 그런데 제가 보니까 보통 보면 부드러우신데업무에서는 아주 확실하셨습니다. 작은 빈틈도 없었습니다.
김용연: 기억될만한 사항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가장 먼저 컴퓨터 결제 시스템을 만드셨습니다.
과거에 결제라는 것은 종이에 써서 가져가 설명하고 승인을 받는 행위인데, 대면하지 않고 컴퓨터로 결제를 받는 다는 것은 당시 저희들에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무려 20년 전에 일이었다.
김의명: 그리고 처음으로 금연빌딩을 만드셨죠.
김용연: 또 한 가지 기억이 남는 것은 업무회의를 아침7시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모이면 회장님의 뿔테안경이 몇 개가 부러지느냐가 화재였습니다. 회장님은 원서로 보시니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계시는데 저희가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보니 그 차이에 답답함을 느끼셔서 애꿎은 안경만 부러트리셨습니다. 비서들이 똑같은 안경을 여러 개 가져다 놓을 정도였습니다(웃음). 급하신 의사결정으로 인해 안경을 많이 깨트리신 분이라는 기억이 있습니다.
이용일: 박성용 회장님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이강재 부이사장과 중학교 동기였습니다. 서로 의견차이가 있기도 했는데, 결국 회장님의 의견대로 했습니다
(웃음). 처음 의견차이 난 것이 금호문화잡지인데, 종이 재질을 가지고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결국에는 박성용 회장님의 의견을 따랐는데, 지금 보니 그 결정이 회장님이 앞서나가신 것이죠. 또한 당시 광주 금호문화재단 홀에 피아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 예산에서 외상으로 피아노를 샀습니다. 그리고 음악계 지원을 재단차원에서 하기 힘드니 광주악회를 도와주어 광주지역에 음악회가 열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재단이 서울로 올라오고 제가 정년퇴임을 하면서 광주에서의 활동이 끝났습니다.
음악영재 발굴을 위해 힘쓰다
김의명: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을 만들어 음악후원을 시작하면서 다른 기업들이 음악사업을 후원하는 것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회장님께 서 현악사중주를 하신 후에는 영재를 키우자고 하시면서 1998년 7월에 가능성이 있는 영재 발굴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반에 발굴된 영재들이 이유라, 권혁주,손열음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른 기업들은 이러한 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기업에 가서 문화 사업을 도와 달라고 하면 “금호로 가지 왜 우리에게 오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기업들도 많은 문화 후원 사업을 하지만 예전의 금호문화재단 정도는 아닙니다.
이용일: 우리나라 30대 초반의 연주자들 중에 자신감있게 귀국 독주회를 하는 연주자는 대부분이 금호영재 출신입니다. 금호영재 사업은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김의명: 조성진도 여기 출신이죠.
신수정: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이 설 무대가 많지 않다보니, 오로지 이 아이들의 최고의 목표는 금호아트홀에 서는 것이죠. 통영국제음악제도 박 회장님의 중요한 업적이죠.
이용일: 통영국제음악제의 초창기 스폰서였죠.
신수정: 그럼요. 모든 음악가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셨죠.
이용일: 그런데 그렇게까지 음악가들에게 해줄 수 있을까 싶습니다.
김용연: 저희 후배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출한 재능을 가진 천재 같은 인재를 아끼고 그것을 잘 유지 시킬 수 있는 수준의 국가가 소위 문화적인 선진국이라고 하지 돈을 가진 국가가 품격 있는 국가가 아니다.
이용일: 원래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캐치프레이스가 ‘영재는 키우고 문화는 가꾸고’ 아닙니까? 처음에 선친께서 하신 것을 이어간 것입니다. 선친인 금호 회장님께서 문화적 후원의 틀을 가꾸고 닦아 놓으셨기에, 박성용 회장님이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메세나 운동에 앞장선 금호아시아나그룹
김용연: 5월 23일이 박성용 회장님 12주기입니다. 박성용 회장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 회장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사업을 신수정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0년 전에 국악하시는 신영희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박삼구 회장님을 뵈었습니다. 신영희 선생님께서 10살 정도 되었을 때 창업 회장님 댁에 가서 노래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소리하시는 분들을 모셔서 마당에서 공연도 하고 했는데, 박삼구 회장님이 어릴 때 직접 보시면서 녹음도 하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흔적을 본다면 1977년 문화재단 이전에 기록은 남지 않지만 이미 선친 회장님부터 소셜 액티비티는 시작 된 것 같습니다. 저희도 박성용 회장님이 세우신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사업들이 발전되기는 쉽지 않지만 변질되기는 쉬운데, 이것이 변질되지 않기위해 신수정 선생님이 이사님으로 계시면서 잘 이끌어가 주고 계십니다.
신수정: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웃음). 박삼구 회장님의 캐치프레이스가 ‘형님보다 잘하도 않고 형님 하신 것을 그대로 유지 한다.’ 입니다.
김용연: 5월이 박성용 회장님 12주기입니다. 회장님의 사업을 잘 유지하는 것이 저희에게 가장 큰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김의명: 문화 사업에 대한 첫 발걸음은 선친 회장님이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단 설립한다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가장 제대로 운영하는 예이니 그곳에 가서 보고 문화재단을 설립할지 말지 결정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신뢰가 가게 운영한 만큼 후학들이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까? 앞으로 박성용 회장님이 하신 일이 후세에 전달되어 이런 일을 할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신수정: 그래서 메세나 운동도 박회장님이 제일 먼저 하셨잖아요?
김용연: 제가 박삼구 회장님 모시고 메세나 일을 하다 보니까, 우리나라 문화예술 영역에 국가 공공예산이 5조가 안되는데, 실제로는 1조원 미만이지 않겠는가 하는 추정이 됩니다. 그렇다보니 실제 문화예술 영역에 돌아가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국세청 등재된 재단 숫자가 2000개입니다. 한 재단이 10억 쓴다고 가정하면 2조정도 되는데,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민간 예산이 중요합니다. 그만큼 문화예술영역은 공공예산뿐만 아니라 민간 예산도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크다고 추정 할 수 있습니다. 재단을 운영한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만: 제가 두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박성용 선생은 굉장히 효자입니다. 장남으로서 그렇게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의 인간상으로 볼 때도 지금 이 시대에서 굉장히 덕과 인이 없어진 마당에서 귀감이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이 깊었어요. 어린아이들뿐만 아니고 금호 주변의 관여하는 사람들을 깊이 사랑을 했어요. 그것이 굉장히 인간적으로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문호 선생이 제가 깜짝 놀란 것은 그분의 통찰력 사람을 보는 눈, 이런 것이 비범했다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을 크게 유지를 시키셨습니다. 문화예술 지원가로서 몽블랑 상을 받았습니다만, 우리나라 장래를 위해서 문호 선생의 삶과 역할은 대단했고 세계에도 널리 자랑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용일: 지금 현재 금호 악기 은행에서 대여해준 악기가 몇점입니까?
김용연: 8점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연주자들이 바이올린에 이수빈, 김다미, 김동현, 김봄소리, 첼로 한 점이 김범준이 쓰고 있습니다.
김의명: 대여 오디션도 치열합니다.
이상만: 김의명 선생님 악기 살 때 조언을 해주셨겠네요?
김의명: 많이 조언을 했었죠. 그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시고 싶어 했는데 당시 상황에선 힘들었습니다.
이용일: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이 서울로 이전하면 서 광주 음악계에 지원이 끊어지니, 금호아시아나문화재
단에 대해서 섭섭한 감이 있습니다. 최근에 광주에 금호아트홀과 기획연주를하여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김용연: 과거에 비해 질적인 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광주에서도 주니어 선발 콘서트도 하고 재단도 함께 지었습니다. 서울로 옮오면서 광주분들이 서운한 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희도 서울에서 최선을 다해 발원지 광주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창업회장 박인천
기업인 故 박인천(1901~1984)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회장이며 전라남도 나주 출생이다. 1920년 20세 때 나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광주에 나와 목화, 즉 실면을 취급하는 장사를 시작하였으며 이어 잡화상을 시작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상경 후 오성강습소에서 5개월, 중동학교에서 3개월을 수학하였다.
28세 때인 1928년 보통문관시험·고등문관예시에 합격하였다. 1946년 2월 2대의 미제택시를 보유하고 택시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하였으며 1948년에는 2개 노선(광주∼장성, 광주∼담양)의 면허를 얻어 버스운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뒤 운수·제사(製絲)·타이어제조 등의 사업을 통해 오늘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일으켰다. 금탑·석탑·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출처: 박인천 [朴仁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회장 박성용
기업인 故 박성용(1932~2005)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재학 중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Illinois)대를 졸업하고 62년과 65년 예일(YALE)대에서 각각 경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귀국해 대통령 경제비서관, 경제기획원 장관 특보 등 공직생활을 거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창업주인 부친 박인천 회장의 권유로 1972년 당시 금호실업 부사장 취임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했다. 84년 고 박인천 회장 타계 직후 그룹 총수에 올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제2창업을 주도했다.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문화예술 후원자였다. 특히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갖고 있던 분야인 클래식 음악계의 발전과 음악영재 발굴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0년 실내악단 금호현악사중주단을 창단, 세계 60개국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2000년엔 금호아시아나 사옥 내에 전문 공연장인 금호아트홀을 열어 연주자들에게 무대를 열어줬다. 이같은 공로로 박명예회장은 지난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독일 몽블랑 문화재단이 주는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을 받기도 했다.
정리_김진실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7년 5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문기의 포토랜드>
진 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신수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의명: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이상만(음악평론가, 국제델픽위원회 명예회원)
김용연: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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