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춘추 기획대담
음악교육자.작곡가 정세문 선생
한국 음악교육의 발전 토대 구축
<정세문 선생님 10주기 추모 음악회 추모 글 중>
'어린 새싹들에겐 동요를 가르치면서 청소년 젊은이에겐 가곡을 통해 밝은 얼굴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길렀습니다. 1999년 1월 8일 선생님은 우리 곁을 떠나실 때까지 욕심 없이 살면서 많은 노래를 지으시고, 많은 책을 쓰시고, 많은 모임에 웃어른이 되어 주셨기에 우리는 그리운 마음, 정겨운 마음으로 선생님의 자취를 되새깁니다.'
엄기원(한국아동문학연구회 대표)
'정세문 선생님은 이 땅의 음악후진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큰 나무이셨습니다. 넉넉한 마음이며, 소탈한 웃음이며, 후배들을 아낌없이 격려하시고 베풀어 주셨습니다. 비탈에 선 겨울나무처럼 아무 가식 없이, 꾸임의 잎새 하나도 남김없이 나누어 주시던 선생님. 오늘밤은 선생님의 체취가 가득 묻은 그리운 노래를 가슴 가득 안고 싶습니다.'
신진수(한국동요문화협회 공동대표)
정세문 (鄭世文, 1923년 3월 25일~1999년 1월 8일)선생은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강원도 철원군에서 성장하였으며, 춘천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한 후 1944년부터 춘천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춘천초등학교와 춘천사범학교에서 교사를 지낸 정세문 선생은 1947년 서울로 이주하여 청계초등학교, 서울사범학교, 배재고등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등 초, 중, 고등학교를 두루 거쳤으며, 1950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경기도교육위원회 음악장학위원,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음악장학사를 거쳐 1961년 문교부 음악담당 편수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1973년 편수국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음악교육의 개척자로써 1976년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한 바 있으며, 여러 대학에 출강하여 음악교육학을 가르쳤고, 음악교육의 학습방안에 대한 실험적인 연구개발에 공헌하였다.
또한 정세문 선생은 동요와 가곡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선생이 작곡한 200여 편의 동요작품 가운데 대표적 작품으로는 「어린이행진곡」(길묘순 작사),「무궁화」(김한배 작사),「고향」(이원수 작사),「겨울나무」(이원수 작사) 등이 있고, 대표적인 가곡으로는「옛이야기」(김소월 작사),「비로봉」(정지용 작사) 등이 있다.
정세문 선생의 동요작품은 『은구슬』(1954),『산길』(1959),『그리운 언덕』(1991),『교실의 노래 200곡집』(1992)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며, 후진을 위해 한국음악교육연구회와 한국동요작곡연구회를 조직 운영하여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20여 권의 음악교육 관련 저서와 논문이 있으며, 1974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7년 KBS동요대상, 1989년 대한민국동요대상, 1992년 반달동요대상을 수상하였다.
일시: 2012년 5월 10일(목)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이홍수(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김준수(전 여의도고 음악교사)
이동훈(단국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정미령(전 성신여대, 상명여대 작곡과, 서울예대 국악과 강사)
정세문 선생의 성장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음악춘추 인물탐구 난은 돌아가신 분들의 업적을 기리고자 시작되었으며, 임원식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어 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가 훗날 현대 음악사를 공부하는 음악도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음악이 발전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어 주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웃음과 사랑으로 대해 주신 정세문 선생님에 대한 좌담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정세문 선생님 좌담회가 늦어진 것은 선생님에 관련 된 자료를 찾기가 힘들었고, 음악가 중에서 연주가나 작곡가가 중심이 되어 교육가에는 소홀했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늦었지만 정세문 선생님에 대한 좌담회를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정미령 선생님께서는 아버지의 성장과정에 대해 들으신 바가 많겠지요.
정미령_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큰아드님이 어려서 하나둘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태어난 후에는 자식의 건강을 위해서 금강산에 들어가서 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금강산의 유점사라는 절 근처에서 살게 되셨는데, 유점사의 스님께서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보시고 총명하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아버지를 절에서 키우게 달라고 하셨더래요. 그런데 할머니께서 단번에 거절하셨고 학교에 보낼 시기가 되자 그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철원의 초등학교에 입학시키셨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식 교육을 위해 산골에서 아들을 데리고 철원 시내로 내려온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철원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셨고, 이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자식을 더 큰 도시에서 공부시키고자 춘천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아버지가 춘천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용일_ 당시 사범학교를 간다는 것은 대단한 수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이었던 것 같나요?
정미령_ 농사를 지으시던 평범한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에 음악을 하시던 분도 없으셨고요.
이용일_ 정세문 선생님은 춘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계실 때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를 치셔서 당시 학생들은 저렇게 열심히 하는 선생님이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무렵에 사모님을 만나게 되신 거지요?
정미령_ 네. 아버지께서는 교사로 계시면서 매일 아침과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를 정말로 열심히 치셨다고 합니다. 그 때 새로 부임한 여 선생님 두 분이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은 일본인 선생님이셨고, 한 분이 저희 어머니이셨습니다. 그 두 분은 피아노를 열심히 치는 총각 선생님을 몰래 창문으로 들여다보면서 은근히 관심을 갖게 되신 거지요. 그러던 중 내성적인 어머니를 대신해 일본 여선생님이 아버지께 ?길묘순 선생님이 당신을 아주 좋아하고 있어요.?라고 대신 고백을 해주셨다고 합니다(웃음). 본인도 좋아했지만 아마 일본 사람이어서 양보하셨겠지요. 그렇게 해서 연애를 시작하시게 되셨답니다.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께서는 노래도 잘 하셔서 사범학교시절 춘천시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그 여학생 중 한 분이셨겠지요(웃음).
이홍수 - 정 선생님께서는 아주 건강하셨고, 운동도 잘 하셨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는 단거리 육상선수셨고, 수영을 잘 하셔서 한강을 헤엄쳐 건너신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어린 자식들을 자꾸 잃으시니까 선생님을 건강 체질로 키우신 모양입니다. 선생님은 춘천사범학교에서 일본인 음악선생님으로부터 음악을 배우셨고 피아노도 치기 시작하셨지만, 서울에 계시던 김순남 선생님에게 오셔서도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미령 - 네. 춘천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김순남 선생님 댁에 레슨을 받으러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레슨비 대신 가끔 닭 한 마리 가지고 가셨다고 합니다(웃음). 아버지께서는 제가 자라면서 여러 번 김순남 선생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당시 김순남 선생님의 곡은 금지 곡이어서 잠금 장치가 되어 있는 캐비넷 속에 선생님이 직접주신 작품집을 갖고 계시다가 내가 작곡을 전공할 때서야 한번 꺼내 보여주셨지요.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김순남 선생이 작곡하신 아름다운 노래들을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장가로 불러주셨던 기억도 나고요. 언젠가 김순남 선생님이 월북 후에 서울에 한번 몰래 내려오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당시 어떤 분을 통해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정릉의 어느 집 마루 밑에 숨어 계신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어떤 이야기 주고 받으셨는지는 모르나,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본인이 격은 이런저런 여러 이야기들을 책으로 정리하시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해서 아쉬웠지요.
이용일_- 그렇게 춘천에 계시면서 어렵게 김순남 선생님께 작곡 레슨을 받으셨고, 이후에 학교를 사직하시고 서울대학교 작곡과로 입학하시게 되어 서울로 올라오신 것인가요?
이홍수_ 춘천초등학교와 춘천사범학교 교사를 지내시다가 서울 청계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어 1947년에 서울로 오셨다지요. 후에 서울대학에서 공부하시고 서울사범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와 서울시교육청 장학사를 지내셨고, 서울대학교의 중등음악교사 양성과의 주임교수를 거쳐 문교수 음악편수관, 편수국장 등으로 활약하셨고요.
이용일_ 당시에는 음악교육법이라는 것도 없었고, 오직 정세문 선생님께서 일본 책을 보고 정리하신 것을 프린트해서 나누어 주신 자료뿐이었습니다. 음악교육법이 있다는 것 자체도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에서 음악교육법을 강의한 것은 선생님이 처음이셨으니까요. 다른 교수들은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었으니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기틀을 잡으셨다고 봐야겠지요. 제가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을 선생님이 총괄하셨기 때문에 중등교사 양성과의 주임교수가 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후 문교부는 어떻게 해서 들어가게 되셨나요?
정미령_ 김성태 선생님이 문교부에 들어가 음악교과서 편수에 관한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셔서 들어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세문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네. 정 선생님이 문교부에서 행하신 업적들은 잠시 후에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홍수 선생님께서는 정세문 선생님과의 인연이 꽤 깊으시지요?
이홍수_ 정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71년입니다. 어느 날 집근처 다방에서 친구를 기다리다 연구수업계획서를 보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다방으로 들어오셨어요. 벌떡 일어나 인사를 드렸지요. 내 앞에 앉으시더니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시고 음악수업계획서를 보셨어요. 그리고는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분에게 음악을 배웠는지 이것저것 물으셨지요. 강릉사범학교 박재훈 선생님의 제자라는 말씀에 아주 반가와 하시더니 토요일에 묵정동에 있는 피아노학원으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날 찾아갔더니 칼 오르프소녀합창단을 지휘해 보라고 하셨고, 지휘를 했지요. 그랬더니 ?오늘부터 부지휘자로 임명하네.? 하시더군요(웃음). 그 후로 선생님은 학교를 방문해서 제 수업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시고, 이화여대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오셔서 참관과 토론을 하게 하셨습니다. 문교부 수석편수관이 되신 다음부터는 일이 바쁘시니까 음악편수 일을 저에게 시키셨고요.
이동훈_ 저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구로남초등학교에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호출하시고는 교과서를 집필하시면서 교정보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다 저는 군대를 가게 되었고, 휴가를 나와서도 선생님의 일을 돕곤 하였지요. 제가 선생님의 모습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늘 노래를 하시던 모습입니다. 일을 시켜 놓으시고도, 앉아 계셔서도 계속 노래를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선생님께서는 음악을 삶속에 가지고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김준수_ 저는 1971년 가을, 유덕희 교수님과 장창환 교수님이 지휘하는 서울교사합창단에서 총무를 맡고 있었지요. 합창단은 한국음악교육연구회의 산하단체였고, 그로 인해 두 교수님을 통해 당시 연구회 회장님으로 계셨던 정세문 선생님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에 대해서 이야기만 듣고 처음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는데, 워낙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라 만나 뵙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지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960년대에 정 선생님께서 서울시교육위원회 장학사로 계실 당시 서울에 재직하는 교사들로 서울교사합창단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셨고, 그 후 문교부 편수관으로 재직하실 때는 유덕희 교수님이 합창단을 이어 받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세문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그렇다면 여러분들께서는 정 선생님이 문교부에 들어가시면서 변화된 상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홍수_ 정 선생님이 문교부에 들어가시기 전에는 이유선, 이승학, 나운영 선생님이 음악교육을 주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들어가셔서는 각종 서적과 보고서를 통해 미국과 일본 음악교육계의 현황들을 파악하신 후에 우리나라의 음악과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정비해 나가셨습니다. 제2차부터 5차까지 음악과 교육과정은 선생님의 주관 아래 만들어졌지요.
김준수_ 네. 또한 음악교육의 방법론에서 실음 교육의 중요성과 다양한 영역을 통한 접근방법을 강조하셨고, 특히 초등학교에서의 독보력을 기르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초등학교와 중학교 음악교과서에 리코더와 같은 교육용 악기가 새롭게 등장하게 됨으로써 다양한 기악교육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음악교육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 역서, 초중등 음악교과서, 지침서 등을 집필하심으로써 불모지였던 한국의 음악교육의 방향과 학문적 기초를 정립하셨습니다.
이홍수_ 교사의 재교육에 관심을 가지셔서 연구회를 많이 만드셨지요. 대표적인 것이 한국교육음악연구회인데, 현제명 선생께서 창설을 제안하셨답니다. 1950년대 초에 미국에 MENC(음악교육협회)가 활동하는 것을 보시고는 우리나라에도 만들자고 제안했고, 김성태, 정세문 선생님이 주도하셔서 연구회를 조직하셨지요. 정세문 선생님이 회장직을 맡으시면서 교사들을 위한 연수회를 자주 열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국동요작곡연구회를 조직해서 손대업 선생님을 중심으로 활동하도록 지원하셨어요. 교육부와 교육청이 해야 할 교사 연수를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하셨다고 볼 수 있지요.
정미령 - 제가 알기로도 개인 사비를 많이 쓰셨지요(웃음).
김준수_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명성 또한 공적으로 활용하셨다고 볼 수 있는데요. 지방에서 혹이 리코더를 잘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거나 합창을 잘 가르치는 교사, 또 작곡을 잘하거나 창작 지도를 잘하는 교사가 있으면 연락해서 불러올리시거나 하셨지요. 지방에 출장을 가실 경우에는 직접 찾아 만나셔서 음악교육연구회활동을 권유하거나 지방별 지부활동의 역할을 맡기시는 등 전국적으로 유능한 교사들을 영입하여 모으셨고 음악교육의 활성화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이용일_ 당시 선생님께서는 초중등학교 교사 중에 재능 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길잡이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크셨고, 지방에 있는 교사들에게도 ?경비를 대줄테니 나와.?라고 한 말씀을 하시면 이 말 듣고 안 나올 사람이 없었지요(웃음). 제 기억에 그 당시만큼 우리나라 음악교육계가 단합된 때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연수를 할 때에 수강생들도 보람되게 들었었고, 강사들도 정말 열정을 다하였고요.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홍수_ 제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음악교육학회 총무 일을 했는데, 당시에는 학회가 회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강사들도 정세문 선생님이 부탁을 하시면 교육할 내용을 본인이 4~500장을 복사를 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후에 유덕희, 장창환, 신계휴 교수님이 회장을 맡으셨는데 정 선생님은 여전히 학회를 열심히 지원하셨지요. 1994년부터는 저가 회장직을 맡았는데 그때에도 선생님은 항상 학회에 참석하시고 맨 앞자리에 앉으셔서 젊은 강사들의 강의를 빠짐없이 들으셨어요. 1997년경에는 회원이 1,000명에 이르렀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순수했한 음악교육 열정과 명분은 원칙과 실리, 편리와 용이함에 밀려나기 시작했어요. 1980년대 중반 어느 해부터인가는 회원들에게 회비를 받아야 학회 운영이 가능해졌고, 연수회 강사료를 지불해야 했지요. 연수회 장소도 리라초등학교에서 연수를 했던 초기에는 선풍기 한 대 없는 강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무도 불평 없이 강의하고 수강했는데 1990년대 초부터는 교수들도 교사들도 냉방이나 난방 시설이 좋지 않은 곳을 아주 싫어했어요.
김준수_ 시대가 많이 바뀐 탓도 있지만 당시에는 정세문 선생님과 같이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 계셨기 때문에 그 분의 이름을 보고 모여들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지금은 그렇게 사람을 전국적으로 끌어 모을 수 있을 만한 명성이 뒷받침되는 인물이 계시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동훈_ 저 또한 며칠 동안 생각해 본 것이, 만약 정세문 선생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우리나라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음악수업의 존재가치가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20여 년 전에는 대학입학 학력고사에 음악이 한 과목으로 있었기 때문에 음악이 초중고등학교까지 다 일관성을 가졌고, 음악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은 음악의 가치가 미미해져서 음악선생님들 자체가 의욕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음악교육이 예전보다 못한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정미령_ 제 생각에 아버지께서는 단체를 이끄시면서 모든 일을 혼자 생각 하신 대로 진행하셨던 것 같습니다. 단체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같이 운영하던 분들과 의견들도 달라지기 시작하자 아버지께서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후 아버지가 하실 때와는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그 당시 아버지는 연수에 오신 분들 중에서도 남다르고 똑똑하다고 생각이 드시는 선생님을 보시면 매우 적극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끔 그분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찾아내시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기도 했지요. 강습회가 끝나고도 한동안은 화성풀이, 작곡 등을 우편으로 받으시고 일일이 체크해서 답장을 하셨는데, 많이 올 때는 저도 옆에서 거들곤 했답니다(웃음).
이홍수_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정세문 선생님께서 남달리 특별하신 점이 젊은 인재들을 잘 발굴해서 그 사람들을 공부하게 만들고 일을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정미령_ 네. 어느 날 모임에 다녀오시면 강원도 어디서 오신 분이 정말 똑똑하다시며 집에서도 혼자 내내 감탄하시며 칭찬하시곤 하셨어요(웃음). 나중에 보면 그런 분들이 어느 틈에 서울로 전근 와 계시더라고요.
이동훈_ 저 같은 경우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 다시 대학을 가고, 대학원은 물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지요.
이용일_ 정 선생님이 문교부 편수국장님이 되셨을 때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제가 목포에 있을 때였는데, 갑자기 이유도 말씀 안 해 주시고 내가 편수국장이 되었어. 자네 내일 서울 좀 올라와.라고 하시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급히 올라오니까 선생님께서는 10만원을 주시면서 고기를 사서 이것은 김성태 선생님 댁에 갖다 드리고, 이것은 박민종 선생님께 갖다 드려라.라고 하시더군요. 당시 김성태 선생님은 음악계의 거두이시고, 박민종 선생님은 당시 장관하고 친구사이였기 때문이지요. 내가 자네를 추천할 테니까 이렇게 해봐.라고 말씀하셨던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그후 선생님께서는 여러 번 불러주셨는데 선생님의 뜻에 따르지 못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또한 ISME(국제음악교육협회)에 관련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은데요. 정 선생님께서 음악교육학회 일에 계속 관여하셨더라면 그래도 오숙경 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을 텐데, 오숙경 선생님이 중간에 타계하시는 바람에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았고, 선생님이 마지막 인생설계를 하는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홍수_ 정세문 선생님께서 제일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신 부분이 ISME 관계인데요. 1970년대에 외국 출입국이 자유롭지 않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당하게 해외에 나가는 방법은 국제회의 참가였지요. 한번은 조상현 선생님이 정세문 선생님을 찾아와서 ISME 한국대표를 본인에게 맡겨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정 선생님은 음악교육학회(당시 음악교육연구회)가 ISME의 한국대표기관이니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조상현 선생님이 계속 부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친구 사이에 거절하시기가 어려워 이사회를 열고 상의하셨습니다. ?친구가 그렇게 부탁하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우니 ISME에 대한 문제는 조상현 선생에게 맡기자.?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렇게 정세문 선생님의 양해아래 조상현 선생님께서 한국음악교육협회를 조직하시고, ISME 한국대표를 맡게 되신 것입니다.
이용일_ 쉽게 말해서 일본이 하고 있는 것을 정세문 선생님도 보시고 조상현 선생님도 보셨는데, 정세문 선생님은 아무래도 외국에 나가지 못하시니까 적극적이지 않으셨고, 조상현 선생님은 자주 해외를 오가셨으니 적극적일 수 있었던 그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일본이 전일본음악교육연구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러한 연구회를 만들기 위해서 조상현 선생님께서 애를 많이 쓰셨지요. 그렇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무리 요청해도 대학에서도, 고등학교에서도 협력을 안 해 주었고, 또 하나는 조직을 인계받을 때 음악교육연구회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인계받아야 했는데 이름만 가져왔기 때문에 밑에 사람들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상현 선생님이 활동하실 때는 각 시도에서 지원을 해줘서 각각의 도시에 연구회가 독립을 시작할 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지를 않았지요. 하지만 만약에 정세문 선생님께서 모임을 주도하셨다면 흩어진 사람들을 모두 끌어당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조상현 선생님께서도 굉장히 능력있는 활동가이셨지만 당시의 상황이 뒷받침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홍수_ 한국에서 ISME 회의를 유치했던 1992년에는 음악교육협회의 회원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일단 회의를 유치해 버렸습니다. 유치해놓고 보니 일 할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음악교육학회에 도와달라는 연락이 와서 고민을 하다가 정세문 선생님께 여쭈어 봤더니 가서 도와주라고 하시더군요. 세계의 음악교육자 2,000여명이 오는데, 사람이 없으면 행사를 제대로 치를 수 없을 테니 도와주라고 하셔서 학회 임원과 회원들이 가서 약 두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정세문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정 선생님께서는 많은 동요도 작곡하셨지요. 선생님의 동요 작품은 어떤가요.
이동훈_ 요즘에는 아이들이 동요는 멀리하고 다른 음악만을 좋아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한데요. 정세문 선생님의 아름다운 동요가 많이 불려졌으면 합니다. 저는 특별히 동요보다 선생님의 가곡집에 수록된 31곡을 이번 기회에 처음부터 끝까지 피아노를 치며 다 불러보았는데요.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지, 일단 형식이 간결하고 ABA와 같은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있으며, 시가 가지고 있는 흐름 그대로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작곡가들이 형식을 따르며 반복을 통해 수다를 떨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생님의 곡은 남을 의식하지 않은 본인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또한 선율이 매우 아름다운데요. 장, 단음계에 기초한 서양적 이디엄을 바탕으로 하지만 5음음계에 의한 한국적 맛을 잘 가미하고 있어 서양과 한국의 오묘한 만남이 선율에서 보여집니다. 화성의 색깔 또한 다양합니다. 국악적인 것을 요할 때는 부가음들을 잘 쓰고 있으며, 3화음의 3음을 생략한 열린화음 등을 절묘하게 쓴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3화음과 부3화음을 쓰되 필요에 따라 부속7화음, 감7화음, 증6화음 등을 적절히 사용해 색채의 다양성을 추고하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반주 음형이 흥미롭습니다. 시의 의미에 따라 때로는 분산화음으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고, 노래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대선율들이 간간이 삽입되고 있지요. 작곡과 학생들이 꼭 한 번씩은 쳐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보면 꽃, 산과 같은 자연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은데요. 이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쭉 치다 보니 모든 노래에서 선생님이 웃으시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이용일_ 그렇다면 이 선생님이 보시기에 이 곡의 흐름에서 김순남 선생님을 모습을 연상할 수는 없으셨나요?
이동훈_ 네. 그런 느낌도 있더라고요. 김순남 선생님의 곡이 현대적인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정세문 선생님은 그러한 현대적인 면에 더하여 역시 교육자이기 때문에 복잡하지 않은 동요를 마음에 철학으로 두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이용일_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이 작곡을 하면 형식 진행에 따르다 보니 흐름이 좋지 않기도 한데, 정세문 선생님의 곡은 멜로디가 자연스레 넘어가지요. 그러한 작업들의 배경에는 가장 존경하고 열심히 가르침 받았던 김순남 선생님의 음악세계와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대에서는 김성태 선생님의 제자이셨지만, 김순남 선생님께 가장 기초적인 것을 배우셨으니까요. 그리고 정 선생님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가 건국대에 가셔서 학교를 발전시켜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선생님이 아주 짧은 재직 기간 동안 엄청난 발전을 시키셨지요. 그리고 교육부에서 편수국장을 했다는 것도 음악계의 엄청난 경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편수관들 사이에서 음악교육자가 국장까지 했다는 것은 음악의 위상을 올려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동훈_ 이홍수 선생님 같은 분들은 너무 현장의 음악교육에만 매달리셨는데, 정세문 선생님처럼 음악행정 쪽에도 진출하셨으면 우리나라 음악교육도 좀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_ 계속해서 음악 행정가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정 선생님이 편수관을 하실 때의 위치와 그 이후 편수관의 위치가 너무 격하되어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현재 제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걱정은 현재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행정 쪽에는 거의 국악을 전공하신 분들이 자리잡고 계신데요. 양악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행정직을 기피하는 동안에 국악하는 분들이 많이 들어가셔서인지 지금 음악교과서를 보면 국악가를 양성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가르치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음악교육이 편협된 상태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런 상태에서 국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것은 음악이 세계화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융합이 잘못되면 독선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정세문 선생님께서 생전에도 문제를 인식하시고 계셨던 부분이, 예를 들어 정악을 초등학교 때 가르치고 민속악을 중학교 때 가르치고, 이러한 체계가 잡혀있어야 하는데 정악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내내 나오는 질서 없는 모습이었지요. 정 선생님이 지금 계시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홍수_ 앞서 김순남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저도 정 선생님에게서 김순남 선생님의 이야기와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그럴 때 가락을 들으면서 한국적이면서도 새로운 노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미국 유학 중에 미시간대학교 음악대학 도서관에서 우연히 김순남 선생님의 가곡집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그런 노래를 보고 들을 때면 정세문 선생님이 김순남 선생님의 음악에 대해 가지셨던 열망감이 전해져 왔고, 제 마음속에도 ?현대화된 한국의 음악?에 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곡을 많이 쓰시지 않으셨지요. 평소 선생님께서는 한국음악에 대해서 항상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쓰신「비로봉」에서는 한국적인 정서를 충실하게 표현하셨는데요. 이런 곡을 쓰시고 싶은 마음이 선생님의 가슴 속에는 항상 있었지만 당시 사회상 때문에 교육이나 본인의 작품 속에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 것이지요.
사실 1980년대부터 정세문 선생님과 이성천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국악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고, 교재악곡 중에서 국악곡의 비중이 점차 높아져 왔지만, 국악 지도의 질적 수준의 향상이라는 면에서 보면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특히정통의 전통음악에 기초를 둔 현대화된 오늘의 한국음악?을 주된 교재악곡으로 삼아 지도하려 하지 않고, 주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온 옛 음악을, 그 방식대로 가르치려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교육을 하면 국악교육도, 음악교육도 발전하기 어렵고, '한국음악'도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의 학생들이 전래동요와 민요, 시조, 가곡을 친근하게 느끼면서 부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앞서 이용일 선생님께서 걱정하신 것처럼 어제와 오늘의 삶과 생각, 말, 정서가 다름을 인정하고, 우리 민족이 오랜 동안 사용해온 음악요소들을 발전된 양식 속에 담아 새로운 방식으로 융합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정세문 선생님의 정신이 발전적으로 키워졌으면 지금보다는 나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_ 네. 또한 정 선생님이 생각하셨던 프로그램들도 교육에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요. 어떤 것이었는지 정준수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김준수_ 네. 독일의 칼 오르프가 음악의 조기교육을 주장하였듯이, 정 선생님께서도 독일의 칼 오르프 메소드를 도입하여 음악의 조기교육과 창의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창단한 합창단 이름도 칼 오르프 소녀합창단일 정도였지요(웃음). 칼 오르프 메소드는 어린이교육에서 특히 리듬교육을 중요시하였는데 당시 우리나라 초등교육에서는 리듬교육을 도입하여 그 중심을 두었지만 유치원 교육 또한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고, 많은 유아교육과 교수들과도 연계하여 활동하셨으며 한국음악교육의 초석을 다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직접적으로 선생님의 일을 도와드리며 함께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선생님이 국내 음악 교육계에 끼친 영향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고 지대한 것이며,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용일_ 더 추가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이홍수_ 정 선생님께서 1999년 1월에 돌아가신 후에 여러 사람들이 선생님을 기념하는 노래비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어서 음악교육학회가 주관을 하고, 문교부 편수관 모임의 대표님께도 동참을 부탁했어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러 사람들에게 알렸는데, 선생님의 후배들과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어서 ?겨울나무?를 새긴 노래비를 만들었습니다. 장소를 정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장소를 찾다가 서울 어린이 대공원이 생각나서 서울시청에 알아보니 국가유공자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거절했어요. 선생님께서 분당에 오래 사셨으니 성남시청에 알아보았습니다. 공문을 성남시에 보냈더니 안 된다는 답장이 왔어요. 성남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시장님에게 분당공원에 노래비를 세울 계획을 설명했더니 배석했던 담당자는 여전히 안 된다고 하더군요. 담당자가 나간 후에 제가 계속 떼를 썼습니다(웃음). 정세문 선생님의 노래비를 세우는 것은 성남시를 위해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한참 후에 시장님이 "사실 제 아버님이 교장선생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교육자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고려를 해보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며칠 후에 연락이 와서 갔더니 시장님이 분당 중앙공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자리를 골라 둔 상태였어요. 그분이 교육자의 아들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분당 중앙공원의 음악당 앞마당 제일 꼭대기에 노래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용일_ 정말 불가능한 일을 해내셨군요. 이는 정 선생님이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는 생각이 듭니다.
김준수_ 네. 정 선생님은 인간미가 풍부하셨던 분이고, 때로 회의나 세미나가 끝나 뒤풀이를 하면 손님들을 다 이끌고 댁으로 몰고 가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같이 술 마시거나 잡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 음악교육의 발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교환했습니다. 그러다가 흥이 나면 같이 합창을 하거나 음악도 듣곤 했었지요. 이렇게 선생님 주변에 사람들이 늘 따르게 하는 리더십을 가진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용일_ 선생님 곁에 항상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선생님이 좋은 사람을 고르시는 눈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했고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가장 밑바탕에 둔 것은 언제나 사랑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고, 역경에 처하더라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지요.
정미령_ 네. 그렇게 항시 웃으시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하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집에서 작곡을 하시려고 흥얼거리실 때 보면 서정적인 멜로디가 대부분이었지요. 마음에는 많은 슬픔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과서에 실린 곡들은 밝고 명랑한 멜로디가 많았는데 그 이전에 작곡하신 「산길」이나 「은구슬」등의 곡을 들어보면 슬픈 감성들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아버님말씀이 초창기 교과서를 집필하려고 보니 학년, 또는 교과과정에 맞는 노래가 많지 않아서 거의 직접 가사를 만드시고 작곡하셨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작사 정세문도 있고 한석이라는 예명도 쓰시고 저의 어머니 길묘순 작사, 작곡도 있지요(웃음).
이용일_ 네. 오늘 이렇게 정세문 선생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정세문 선생님께서 많은 모임을 이끄시며 우리 음악계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의 유지가 계속 이어져 우리나라 음악교육계가 바르게 정립되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이 다시 하나로 뭉쳐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쁜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 / 박진하 기자 . 사진/ / 김문기 부장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이홍수(한국교원대학교 명예교수)
이동훈(단국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김준수(전 여의도고 음악교사)
정미령(전 성신여대, 상명여대 작곡과, 서울예대 국악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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