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성악가 권오혁 / 음악춘추 2014년 10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4. 12. 3. 12:51
300x250

스폐셜 인터뷰
성악가 권오혁

딱 한 곡만 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하고 싶다.

 

성악가 권오혁은 서울대 음대, 베르디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뒤, 이태리 ‘티토 곱비’ 아카데미아와 이태리 ‘오르페오’ 아카데미아를 마쳤다. 전문연주자로서 단단한 기반은 마련한 권오혁은 「사랑의 묘약」,「라 트라비아타」,「 안드레아 쉐니에」,「돈 파스콸레」등의 오페라를 하였고, 「크라스마스 가족음악회」,「발렌타인 콘서트」,「수원대 교수음악회」등 여러 연주회를 가졌다. 현재 국민대에 출강하고 있다.

성악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대구에서 다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른 반 친구가 쉬는 시간에 찾아와, 「Totus」라는 기독교 중창단을 하고 있는데 같이 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할머니께서 절에 제 이름을 올려놓았다며 교회에는 못 간다고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절 뒤에 무엇인가가 제 마음속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께서 노래를 잘하셔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노래라면 바로 나다」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스카웃 제의는 도저히 거부 할 수 없는 유혹 이였습니다. 부모님께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노래만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중창단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어느 순간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성악을 전공해야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님의 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거의 반년을 부모님 속을 썩여드린 후에야 조건부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부모님께서는 입시 때 까지 최대한의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덕분에 서울대에 합격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과 유학시절은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사실 저는 노는 것을 좋아하여 좁은 음대 앞마당에서 매일 족구, 야구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노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과 주변에서 ‘너 참 소리 좋다’라는 말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저에게 ‘내겐 잠재된 재능이 있다’라는 것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은사이신 박인수 교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제게는 한 번도 저에게 ‘그건 아니란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선택한 레퍼토리에 대해 언제나 ‘그래 좋아, 한번 해봐!’하고 격려하셨습니다.
 문제는 자신감에 걸 맞는 노력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기 시험, 학내 연주, 오페라 오디션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지 못하였고, 노력하지 않은 것에 그 이유 찾기보다는 언젠가 잠재력이 폭발할 것이라는 생각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주변에서 잘못된 결과에 대한 핑계거리를 찾았습니다.
 졸업 후 성악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태리로 유학을 1988년에 가서 11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하였습니다. 유학 생활은 ‘이태리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 로 정의하고 그들의 문화를 알지 못하면 그들의 노래를 할 수 없음을 기본 개념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유학기간 동안 크고 작은 콩쿨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입상도 하였습니다. 음악적 경력을 쌓고 또 유학생회장도 하였습니다. 저는 유학을 하면서 통역, 관광가이드도 하면서 두 아이의 아빠도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학생활을 11년을 하셨다고요?”라며 반문 합니다. 그 내면에 ‘그 긴 세월동안~’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그 기간도 짧다고 이야기 합니다. 유학기간 동안 공부한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큰 재산은 전설로만 여기던 Nicolai Gedda, Gianni Raimodi, Franco Corelli, Carlo Bergonzi, 등 테너 대가들을 만나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 생활태도, 음악적인 면을 같이 지내며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제 생에 다시는 없을 기회이고 제 음악세계의 보물창고 역할을 할 것입니다.


사사한 선생님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다면요.
여러 선생님이 저를 가르쳐 주셨지만 저는 2명의 선생님이 기억이 납니다. Nicolai Gedda 선생님은 내가 노래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이태리에서 있었던 마스터 클래스 후 선발된 학생들이 음악회를 마치고 선생님은 나의 발성에서 문제점이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내심 호흡이나 소리공명의 포인트에 대한 족집게 처방을 기대했던 저는 순간 할 말을 잃었습니다. 머뭇거리는 저에게 선생님은 “평생을 문제점만 찾아 다닐거니? 네 노래의 아름다운 부분을 더 찾아내고 더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생을 보낸다면 행복하게 노래할 수 있지 않겠니? 이 말은 지금의 나를 있게 했습니다. 두 번째로 기억이 남는 선생님은 신동호 교수님이십니다. 유학을 갔다 온 후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나를 가르칠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 자존심을 내려놓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때 나타난 선생님이 신동호 교수님입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보헤미안 싱어즈’  매주 3시간씩 연습을 합니다. 5년이 넘은 시간 동안 선생님은 제 노래의 ‘위조지폐 감별기’ 같은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스승의 역할은 분명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도 필요하지만 언제나 나의 모습을 비춰 볼 때 한결 같은 거울의 역할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에게 그러한 스승이 있음은 큰 행복입니다.

 

출연한 연주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연주회가 있다면요.
저는 2002년 예술의 전당과 영국 로열오페라 하우스 공동제작인 오텔로(연출- 엘리아 모진스키)에서 카시오 역을 맡았습니다. 영국 로열오페라 하우스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그대로 옮겨 놓았고 모진스키의 연출을 그대로 세세하게 재현한 무대였습니다. 이 공연을 마치고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권오혁 이라는 테너를 조금이나마 알릴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 더 이야기 하자면, 현재 제가 활동하고 있는 남성 성악가 앙상블팀, 보헤미안 싱어즈가 거제도에 있는 애강원 이란 정신지체장애인 복지시절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노래를 하던 박수를 쳐주고 아무 거리낌 없이 무대 위를 올라와 춤추고 놀아주었습니다. 그분들의 박수소리에 저도 한바탕 신나게 놀았습니다. 요즘, ‘그 때 그 기분으로 노래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추구하는 교육자상이 있다면요.
저는 가르침에 취미가 있습니다. 선생님으로서의 모습이 인간적인 사제관계로 남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악을 하는 동안 그 사람의 노래 속에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서 언제나 마음이 맞을 수는 없습니다. 학생과 선생 또한 그렇고요. 그래서 제가 무작정 학생에게 선생님 위치를 강요 할 수 없지만, 학생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이라면 인간관계를 희생하더라도 그의 앞날을 위해 이야기해주는 것이 선생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훗날 권오혁이라는 사람을 잊는다고 해도 그의 노래 속에서 나의 가르침이 도움이 되고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선생님을 평가한다면 어떤 연주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제 자신을 열심히 준비하는 연주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두 가지 타입의 연주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박수를 끝어내는 법을 아는 연주자, 두 번째는 자신이 공부한 것을 관객에게 이해시키길 원하는 연주가입니다. 전자는 자신이 실수를 하더라고 그것에 개의치 않고 연주를 완성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자신이 실수를 하거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음악이 흘러갈 때 자신을 자책하게 되어 평소의 기량을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저도 후자의 경우 같습니다. 연주 중에 저는 제 자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제게 지금 남은 연주자로서의 숙제라면 이러한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글_구수진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4년 10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김문기의 포토랜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