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이만방 작곡가-숙명여대 음대명예교수 / 음악춘추 2011년 2월호 표지인물

언제나 푸른바다~ 2011. 7. 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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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방 작곡가-전 숙명여대  음대교수


 1945년 경남 거창해서 태어난 이만방은 1964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나운영, 이영자교수 밑에서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군복무기간(1970-1973년)을 지나 연세대학교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는데 이런 그의 성장과 학창시절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해방 이후의 우리 역사는 남북분단, 남한단독정부수립, 민족대참사인 6.25전쟁,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한 4.19의거와 5.18군사쿠테타 등 숨 가쁘게 이어져 왔고 해방둥이인 이만방은 이런 역사의 물결을 전방에서 부딪치며 헤쳐 나온 현 대한민국 기성세대 중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더불어 같이 달려온 이만방에게 빈곤과 기근, 그리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추진된 개발독재, 민주화의 거센 물결 등의 격동의 시간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건 현재 60세 이후의 대한민국의 아버지세대들과 공통점일 것이다

 

 그럼으로 이만방은 이런 우리 사회에서 급속하게 추진되었던 서구화, 산업화 정책으로 생긴 이중적인 문화헤게모니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시대에 대한 자아성찰과 고민, 역사인식 등에 산 증인이요 대변자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서양의 음악이 국내로 유입되면서 현제명, 홍난파 등의 1대 선구자 시대를 지나 해방 이후 세대 한국작곡가들 가운데서 특히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한 작곡가들 중 한 명이 이만방이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거창이라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이만방에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학교수업 외에는 없었다. 거기서 듣고 접한 서양의 고전, 낭만음악에 심취하여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만방이 서울로 상경하였지만 1950, 60년대의 한국 실정에 비추어 서울이라고 현대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창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이만방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음악적 근원을 선사하는데 그건 일상적인 삶을 통해 배운 어른들이 부르는 우리의 민속음악과 “굿, 민요선율, 아악” 등의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한 것이다. 이만방이 그 어느 다른 한국작곡가들보다도 우리의 전통음악과 문화에 매진하고 자신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소중한 경험이 밑받침 되었을 것이다.

 

 이만방은 대학시절 작곡이란 사양 조성음악의 화성, 형식의 틀에 곡을 쓰는 모방의 단계를 뜻하는 “화성을 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만방은 이런 기존의 틀에 짜인 작곡으로는 자신이 생각하고 표현하자고 하는 이상을 창출해내는데 한계를 느꼈고 조성음악의 규칙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고자 노력한다. 또한 슈토크하우젠, 루토슬라브스키, 리게티 같은 작곡가의 당시 유럽의 최첨단현대음악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그들의 현대적 어휘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 유럽 현대음악 작곡기법 탐구에 열중한다. 이만방은 이 시절 자신이 작곡한 작품들을 “마치 어휘는 있으되 문장이 되지 않는 글”이라고 토로했다. 이 말인즉슨 구조성의 결여로 해석할 수 있다. 구조라는 것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요, 건물을 설계하기 위한 설계도요, 글을 쓰고 말을 하며 그 언어가 서로 소통되고 이해될 수 있게 해주는 문법인데 문법 없이 그저 단어만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를 가지고 “문장”을 만드는 기술에 대한 고민을 한 그는 현대작품들을 접하면서 전체적인 작품을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배운 “화성을 푸는 작곡”공부로서는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음악과 이상을 표현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을 실현하기위한 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로 과감하게 독일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클라우스 후버(Klaus Huber)교수에게 작곡을 수학하면서 자신의 표현방법과 주제의식에 적합한 매개변수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논리적인 작업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동시에 고국을 떠나 전혀 다른 문화권의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유럽의 작곡 조건과 상황 속에서 더욱 더 철저히 자신의 문화권에 대한 강한 반성으로부터 형성된 새로운 음악관에 기초한 새로운 작품들을 쓰기 시작하는데 독일유학시절 동안 대한민국의 전통은 서구적인 음악관과 음악양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음악적 실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이다. (그럼으로 해서 이만방은 그 전까지 한국에서 작곡한 작품들은 그는 자신의 작품목록에 집어넣지 않고 “모작기” 또는 “습작기”라고 명칭하고 있다.)

 

  이만방의 작품은 1980년대 초엽까지는 한국 전통문화의 관념적인 것들과 외형적인 구조물의 구성체와 사변적인 것들을 음악 속에 형식화 하거나 구성화 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면 1980년 중엽이후 외형적인 사실, 즉 음악의 형식이나 형태를 통해서 전통적 사실이 내재할 수 있다는 형식론적인 관념론에서 벗어나있다. 그의 작품 속에 실재하는 전통음악의 선율적 요인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그 외 선법, 화음 및 화성, 선율 구성의 형태, 구조와 길이, 음악의 진행과 전체적 구성, 악기의 선택과 조합, 속도와 강약 등과 같은 음악을 이루는 모든 제반적 요인들이 실제적으로 전통음악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 이만방 음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어떠한 외형적 양식을 선택하여 표현하더라도 그의 음악은 매우 서정적이며 또한 회화적인 것이다. 이에 덧붙여 매우 토속적인 정서를 갖고 있는 것이 그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이만방은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작곡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창작음악계와 젊은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도움과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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