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공연사진/지휘자 지휘모습

합창 지휘자 나영수의 지휘 제스추어 / 2014년 12월 30일

언제나 푸른바다~ 2015. 5. 29. 14:46

합창 지휘자 나영수의 지휘 제스추어

 

학력 / 서울대학교 성악학과 
경력 / 2008.06 ~ 2011.06 제7대 국립합창단 단장, 예술감독
-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명예교수
- 대한민국창작합창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 울산대학교 음악대학 석좌교수
- 성남시립합창단 음악감독
- 울산시립합창단 지휘자
- 서울시립합창단 단장
- 제3대 국립합창단 단장, 예술감독
- 제1대 국립합창단 단장, 예술감독
1973 ~ 1982 효시인 국립합창단 초대 단장 및 상임지휘자
1962 서울민속가무단 지휘자
 
수상
2014.10 보관 문화훈장
2002 제16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대상
1999 백남 학술상
1995 한국 뮤지컬협회 한국 뮤지컬 대상

 

음악춘추 2012년 4월호에서 발췌(커버스토리 인물)

 

국립합창단과 함께 걸어 길
1973년 국립합창단 창단의 주역인 나영수 선생은 초대 단장(1973년∼1982년)으로 9년 8개월, 제3대 단장(1985년∼1992년)으로 7년 11개월, 제7대 예술감독(2008년∼2011년)으로 3년, 총 21년의 세월을 국립합창단과 함께 했다.
“2008년 세 번째로 국립합창단의 단장 직을 맡게 될 당시 제가 다시 이 단체를 이끌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후배 지휘자들의 길을 열어주진 못할 망정 가로막으면 안 되기에 여러 번 사양하기도 했고요. 단장이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이면서도 국립합창단을 떠난 지 15년이 되었고, 나이 많은 저에게 또 다시 맡긴다는 것에 ‘국내에 합창 지휘자가 이렇게 부족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제7대 단장이 되었을 때 ‘국립합창단은 지휘자 양성의 도장, 창작 합창곡의 산실’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선 가능한 자신의 지휘 무대는 줄이고, 해외유학파인 총 10명의 부지휘자를 영입, 6개월씩 국립합창단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데뷔시키고 5명의 중견 지휘자도 초청해 객원지휘의 기회를 주었다. 또한 평생 주력해 온 일인 한국 창작 합창곡 개발을 위해 3년 동안 3개의 대작 칸타타, 그리고 100곡의 소품을 만들었고, 5권의 악보를 출판해 전국에 배포했다. 이에 더해 선생의 임기 동안 국립합창단은 합창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의 여러 도시를 방문, 네 번의 해외 순회 연주를 통해 합창으로 국위 선양을 하기도 했다.


현재 국내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전문합창단인 시립합창단이 전국에 60개 있다. 최초의 시립합창단인 부산시립합창단이 1972년에 아마추어로 시작되었고, 1973년 국내 최초의 전문 직업합창단인 국립합창단이 창단된 이후 시마다 시립합창단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 합창계의 이러한 상황에 서양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과 미국의 합창음악계도 부러워한다. 하지만 지금의 영광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초라했던 과거 합창단의 모습 역시 존재한다. 합창이 음악 예술 분야의 중요한 한 부분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그저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라 생각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나영수 선생은 사실 국립합창단도 오늘날과 같이 콘서트 위주의 공연을 하고 한국 합창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창단된 것이 아니라며 국립합창단의 창단 비화(秘話)에 대해 들려주기도 했다. 1973년 창단된 국립합창단은 1974년 사라질 위기에 처해 국립가무단의 소속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그해 7월 창단 연주회를 가졌고, 1975년 1월 1일 문화공보부 소속 국립극장 산하의 8번째 정식 단체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창단 연주회를 갖게 되었지만 국립합창단이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합창단인 만큼 어떤 레퍼토리를 선보이면 좋을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립합창단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초의 전문 합창단이므로 한국 작곡가의 합창곡만으로 레퍼토리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당시 창작 합창곡이 많지 않았고 예술성도 부족했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구성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당시 국립극장에서 이틀간 공연했는데 객석은 만석이었고, 많은 관객들이 표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작곡가들의 응원은 물론, 평론가들의 호평도 받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다
그러나 나영수 선생은 국립합창단이 정식으로 창단되었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국립합창단도 그랬지만 당시 많은 합창단들이 필요에 의해 창단되었다가 해체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은 합창단 역시 음악계에 필요한 존재이고, 교향악단, 발레단처럼 직업 전문 예술 단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애썼는데, 그 과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국립합창단은 국립가무단, 국립오페라단, 국립교향악단, 등의 합창을 도맡아 참여해도 공연 횟수가 많지 않아 지방 순회 연주를 비롯해 찾아가는 음악회 등을 개최하며 국립합창단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나갔다.
“전문 합창단을 운영해 본 경험이 저는 물론 국내 음악계의 그 누구도 없었고, 공무원들 역시 없었기 때문에 국립합창단의 기틀을 다져나가는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합창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란 대중들의 인식이었습니다. 합창을 하는데 왜 월급을 주느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초대 단장일 당시에는 어떻게든 국립합창단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프로 합창단으로 활동하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 선생은 국립합창단과 전국 순회 연주를 다닐 때 그 곳의 시장 또는 공무원을 만나면 합창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고, 선생의 바람처럼 전국 곳곳에서 시립합창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생이 국립합창단에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전국에 시립합창단이 열 개 넘게 활동하고 있었던 터라 경쟁 체제가 되었다. 시립합창단은 ‘시민’을 위한 것이지만 국립합창단은 국가에 소속된 유일한 합창단으로서 ‘국적’있는 합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영수 선생은 창작 합창곡의 발굴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학생 작품 발표회를 비롯해 크고 작은 창작곡만 500여 곡 발표했으며, 네 개의 창작 칸타타를 무대에 올렸다. 이 때 선보인 칸타타는 우리 역사의 아픔에서 억울했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백제 최후의 명장을 노래한 「계백」, 외적에게 포로로 잡혀가 몸 버리고 돌아온 여인네들의 애환을 그린 「환향녀」, 6·25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남북의 두 젊은 남녀의 영혼결혼을 통해 그 넋을 위로하고자 한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위한 진혼곡」, 동학 100주년을 기념해 억울했던 민초들을 위로하는 「들의 노래」이다.
그리고 2008년 생각지도 못하게 국립합창단을 세 번째로 이끌게 된 것은 선생에게도 좀 어이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국내에 유능한 합창 지휘자가 부족하다는 것은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15명의 지휘자를 무대에 세웠고, 2008년∼2011년 임기 동안에는 100곡의 합창 소곡과 세 편의 대작 칸타타를 발표했다. 이 3년 동안에는 호걸도 영웅도 아니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주위에 밝은 등불이 된 이들의 이야기를 칸타타로 만들기로 하여, 장애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동시를 썼던 서덕출을 노래한 「푸른 편지」, 제주의 기근에서 많은 생명을 구해냈던 만덕할망을 주인공으로 한 「만덕할망」, 오늘 그 마지막으로 평생을 나환우들을 위해 헌신했던 이경재 신부를 기리기 위한 「라자로의 노래」를 선보였다.
그 밖에도 선생은 성남시립합창단을 1년 반 동안 이끌면서 대학생 작품 발표회를 개최하고 「유민의 노래」라는 칸타타를 발표했으며,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울산시립합창단의 지휘자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지역의 특색을 담은 칸타타 「울산 내 사랑」, 「외솔의 노래」와 울산의 노래 64곡 등 악보집을 제작, 보급했다. 

 

사진_ 김문기<김문기의 포토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