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의 고국 무대는 뜨거웠다. 1980년 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국립오페라단의 '삼손과 데릴라' 오페라가 공연 중이다. 무대 위 서른네살 패기만만한 메조소프라노는 요염한 자태로 '그대 음성에 내마음 열리고'를 열창한다. 이 선 굵은 여가수의 음성은 청중을 단숨에 홀렸다. 메조소프라노가 주역인 작품이 흔치 않았고 이 음역대의 가수층도 얇았던 시절이다. 공연이 끝난 뒤 서울 주요 대학 음대는 앞다퉈 스카우트 경쟁에 나섰다. 그는 연세대 성악과 교수로 임용돼 2000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오페라 무대는 그의 인생 그 자체다. 숙명여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197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려진 김자경오페라단의 '아이다' 암네리스역으로 데뷔를 했다. 그후 2년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돌아와 처음 가진 무대가 '삼손과 데릴라'였다. 국내 오페라 여성 연출가 1호라는 화려한 타이틀의 주인공도 그다. 1983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던 서울오페라단의 '마술피리'가 첫 연출작이다. 연출과 가수로 무대 위와 아래를 종횡무진 오가다 자신만의 오페라단을 만든 게 1996년. 이 단체가 바로 베세토오페라단이다. "베이징, 서울, 도쿄의 영문 이니셜 앞글자 Be, Se, To를 따서 만든 이름이에요. 한·중·일 아시아의 문화사절단이 되겠다는 포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도시 이름을 바꿀 생각이에요. 베를린, 서울, 토론토로요. 그게 맞겠죠? 하하."
지난 17일 서울 방배동 베세토오페라단 사무실에서 만난 강화자 단장(66)은 한바탕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꿈을 꾸고 있으면 어디선가 수호천사가 '짠'하고 나타나 어려운 문제를 척척 해결해준다고"고 말하는 낙천주의자. 다음달엔 그의 오랜 꿈 하나가 또 이뤄진다. 그를 스타덤으로 올려놨던 '삼손과 데릴라'가 그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무대가 열린다. 이 작품은 기원 전 1150년께 괴력의 힘을 가진 유대인 삼손과 그를 유혹하는 블레셋 여인 데릴라의 성서 속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베세토오페라단은 다음달 22일부터 2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파이낸셜뉴스 공동주최)에서 이 작품을 선보인다. "프랑스 낭만 오페라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출연진만 100명이 넘어요. 연기자가 20∼30명, 합창 70∼80명, 무용단도 30명 이상이 나오는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입니다. 볼륨이 워낙 크다 보니 국내서 공연한 횟수는 손에 꼽힙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이 작품을 올린 것도 15년 만이에요. 흔치 않은 대작을 선보일 수 있게 돼 가슴 뭉클합니다." 강 단장은 이 작품의 공동 연출이자 예술감독이다.
이번 무대의 빅뉴스는 단연 출연진이다. 한때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잇는 세계 4대 테너로 불렸지만, 이젠 세계 최고 테너로 꼽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강렬한 목소리 호세 쿠라가 삼손역을 맡는다. 그는 1년에 이 작품으로 수차례 무대에 오르는 삼손 단골맨이다. 호세 쿠라는 4년전 국내 야외 극장에서 무대를 한 차례 가진 적이 있고 지난해 단독 리사이틀로 국내 관객과 만났다. 하지만 정식 실내 오페라 무대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와 강 단장의 첫 만남은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세토오페라단의 '카르멘' 체코 공연차 유럽에 들렀던 강 단장은 호세 쿠라를 직접 만나기 위해 그가 공연 중이던 독일 칼스루헤 극장을 찾았다. 공연이 끝난 뒤 극장앞 한 레스토랑에서 얼굴을 마주한 호세 쿠라에게 강 단장은 자신의 프로필과 베세토오페라단의 자료를 한 뭉치 내밀며 브리핑을 했다. 쿠라는 말이 없었다. 꼼꼼히 자료를 다 읽은 뒤 한마디 던졌다. "한국 관객이 얼마나 나를 원합니까?" "엄청나게 원하고 있습니다." 강 단장의 이 짧은 대답이 끝나자 헝크러진 머리에 분장을 채 지우지도 않은 얼굴의 쿠라는 빙긋이 웃으며 화답했다."좋습니다.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강 단장은 '삼손과 데릴라'의 명장면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자신이 분신처럼 여기는 데릴라의 기막힌 세 가지 아리아가 첫번째다. "1막의 '봄이오면', 2막 '사랑의 신이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3막 '그대 음성에 내마음 열리고'는 저음 여가수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게 해줄 겁니다." 포로가 된 삼손을 앉혀놓고 뱃노래를 부르며 펼치는 3막 광란의 파티 장면은 이 작품의 스케일을 보여준다. 군인들과 여자무용수들의 화려한 발레신이 압권이다. 강 단장이 뽑은 마지막 명장면은 삼손의 엔딩신이다. 머리털이 뽑혀 힘을 잃은 삼손은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부른 뒤 온 힘을 다해 성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그곳의 팔레스타인들과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데릴라역은 폴란드 출신 자비나 빌라이트, 프랑스 출신 제랄디네 쇼베가 번갈아 맡는다. 삼손역은 호세 쿠라와 이탈리아 출신 루벤스 펠리차리 더블 캐스팅이다.
오페라는 일상에선 꿈꿀 수 없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며 하얀 도화지 위에 상상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게 매력이라고 강 단장은 말한다. 자신이 만든 무대로 행복감을 느끼는 관객을 만날 땐 뿌듯함이 하늘을 찌른다. 고교 시절 성악 콩쿠르에 입상하면서 이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엔 작가를 꿈꾼 문학소녀였다. 대학 시절 학보에 기고한 글을 본 군인들로부터 수백통 팬레터를 받은 적도 있다. "언젠가 제 이야기를 담은 책 한 권 쓰고 싶어요. 남색과 보라색을 좋아하는데 이 색들로 멋진 그림도 하나 그리고 싶구요." 꿈 많고 웃음 많은 강 단장은 하루하루 바쁜 걸음을 하고 있다.
파이낸셜뉴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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