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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릉과 유릉(南楊州 洪陵과 裕陵).1 / 2015년 3월 19일

언제나 푸른바다~ 2015. 3. 19. 22:39

남양주 홍릉과 유릉(南楊州 洪陵과 裕陵)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에 위치한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와 그 비를 모신 이곳은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 207호로 지정되있다.
홍릉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와, (明成皇后) 민씨(閔氏)의 능이고, 유릉은 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황후 민씨 및 계비 순정황후 윤씨를 모신 능이다.홍릉은 명성황후 민씨의 능으로서 원래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의 승하로 국장할 때 이곳에 옮기어 함께 모셨다.

유릉은 원래 순명황후 민씨의 능으로 양주 용마산에 있었으나 순종 인산 때 이곳에 이장하였고, 1966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를 또한 이곳에 함께 모셨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 1월 13일 72세로 죽어 이곳에 묻혔다. 능의 상설로 홍살문과 석물 침전은 일직선상이나 능침은 옆으로 비꼈으며, 현대 감각을 주는 문인석과 무인석은 사실적으로 입체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홍릉과 유릉은 종래의 왕릉과 형식이 다르며 모두 광무 이후 황제라 칭하던 왕이었던 만큼 명태조의 효릉을 본따서 조영하였다.
종래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고 그 앞쪽으로 문무석을 세우고,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석수를
세워 놓고 있다. 홍릉 석물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만들어진데 대하여 유릉 석물은 사실적이고 개성적이며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다.
홍유릉의 상설 규모로는 각기 곡장(曲墻) 3면, 연화(蓮花)와 모란문(牡丹文)이 조각된 병풍석 12면, 난간석 12칸, 혼유석 1, 망주석 2, 명등석 1, 침
전 1, 비각 1, 표석 1, 망료위(望燎位) 1, 문인석 2, 무인석 2, 기린석 2, 상석(象石) 2, 사자석 2, 해태석(??石) 2, 낙타석 2, 마석 4, 홍살문 1,

재실 1, 수라간·수복방·금천교 등이 있어 전통적인 제도를 따르고 있다. 유물로는 제기류(祭器類) 7점이 있다.
청량리에서 경춘가도를 가다 도농동 삼거리에서 춘천쪽으로 약4km 지점 오른편에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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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고종(高宗) 홍릉

 

능의구성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다.


능의역사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아래 새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27대 순종(純宗) 유릉

 

능의구성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겉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하여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석인을 비롯하여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특히 문석인은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홍릉의 문석인과 같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능의역사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경운궁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다. 오늘날의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같은 달 29일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 해 6월 11일 순종을 홍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효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 합장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월 13일 춘추 71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geumgok.cha.go.kr/

사진_김문기<김문기의 포토랜드>

 

 

유릉(裕陵)의 재실 /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유릉(裕陵)의 재실 /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유릉(裕陵)의 재실 /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유릉(裕陵)의 재실

 

유릉(裕陵)의 재실 /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유릉(裕陵)의 석수

유릉(裕陵)의 문인석

유릉(裕陵)의 석수

유릉(裕陵)의 석수

유릉(裕陵)의 석수

유릉(裕陵)의 문인석, 무인석, 석수

 

 

유릉(裕陵)의 문인석, 무인석

 

유릉(裕陵)의 문인석, 무인석, 석수

 

 

 

 

유릉(裕陵)의 문인석

유릉(裕陵)의 문인석

유릉(裕陵)의 무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