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인물탐구 - 피아니스트 이성균 선생 / 음악춘추 2013년 10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11. 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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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춘추 기획대담 | 인물탐구 10월호

피아니스트 이성균 선생
온화한 성품과 음악성으로 한국 피아노계에 큰 업적 남긴

 

50여 년 간 교육 현장에서 열정을 바쳐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피아니스트로서 대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해 준 이성균 선생(2012. 9. 27. 향년 78세 별세)은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음대(기악과)와 동대학원(피아노 전공)을 졸업하고, 미국 뉴욕 맨해튼 스쿨 오브 뮤직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0년 서울대 음대 강사와 한양대 음대 조교수로 교단에 첫 발을 내디딘 후 30여 년 간 서울대 음대 기악과 교수로 재직한 바 있는 선생은 서울대 음대 학장과 제2대 한국피아노학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서울대 명예교수로 재임하며 2008년까지 국민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국내 음악계에 좋은 귀감이 되었다.
특히 1985년부터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곡을 초연하고, 반주자로서 다양한 무대를 선보인 이성균 선생은 2002년 오현명, 안형일 선생과 함께 한 ‘50년 우정 음악회’ 등의 연주로 화제가 되었다.
또한 지난 시간 동안 한국음악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9년 한국음악가협회 ‘올해의 음악상’, 200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음악부문을 수상했으며, 이 밖에도 번역서 『쇼팽의 꾸밈음』, 『모차르트 연주법과 해석』을 펴냈다.

 

일시: 2013년 8월 27일(화) 오전 10시 30분
장소: (주)코스모스악기 10층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패널: 안형일(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김효경(전 숙명여대 출강, 이성균 선생의 부인)
     장혜원(전 이화여대 음대 학장, 한국피아노학회 이사장)
     신수정(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이영민(성신여대 음대 교수)
     김석란(명지전문대 교수)
     엄의경(서울예술종합학교 교수)
     이형민(단국대 음대 교수)
     노경아(성신여대, 장신대 출강)

 

이성균 선생의 성장 과정 및 음악의 출발

 

이용일_ 이번 음악춘추 10월호 인물탐구에서는 피아니스트 이성균 선생님을 선정하였습니다. 이 자리는 선생님께서 생전에 일궈오신 업적을 함께 논하고, 후대 음악인들에게 이 선생님의 가르침이 기록되는 장이 되길 기대합니다.
그럼 먼저 부군의 음악이 어떠한 환경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김효경 선생님께서 전해 주시지요.

 

김효경_ 남편은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나 성장하시게 되면서 댁의 근처에 자리잡고 있던 연동교회에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특히 교회에 있던 오르간이나 피아노를 통해 연습을 하면서 예배반주를 몇십 년 동안 맡아서 해주셨지요. 그렇게 교회에서 음악을 접하시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피아노를 전공하게 되셨고요.

 

이용일_ 그럼 이성균 선생님께서 어느 선생님을 사사하셨는지 혹시 아시나요?

 

김효경_ 처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자 피아니스트이신 김영환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은 후 김원복 교수님을 쭉 사사하셨습니다.

 

이용일_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셨다고 들었는데, 부친과 형제분들은 어떠하셨나요?

 

김효경_ 저희 시아버지께서는 상업에 종사하셨습니다. 이 선생님의 형제로는 밑으로 남동생 과 누님이 두 분씩 계시는데, 둘째 누님이 노래를 잘하셔서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이성균 선생과의 첫 만남

 

이용일_ 생전의 이성균 선생님과 여기 계신 안형일 선생님의 사이가 아주 각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는 어떻게 처음 만나시게 되셨나요?

 

안형일_ 네. 이성균 선생님께서 서울대 음대에 재학 중일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그 때 저는 정신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서울대에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고, 제 노래의 반주를 거의 전담해 주시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한양대 음대가 창설되자 함께 학교를 끌어가면서 더욱 돈독해졌지요.

 

이용일_ 그렇다면 장혜원 선생님과 신수정 선생님께서는 이 선생님과 어떻게 첫 만남을 갖게 되셨나요?

 

장혜원_ 이성균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이 벌써 40년이 넘었네요. 이 선생님과 저는 KBS 가곡의 밤에 반주자로서 순회공연을 함께 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면서 친목을 다졌었지만, 좀 더 가까운 동료로 발전된 계기는 25년 전 한국피아노학회가 태동하고 시작할 무렵, 처음으로 뜻을 같이 해주시면서입니다. 당시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저를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학회를 이끌어감에 있어 많은 힘을 실어 주신 분이시지요.

 

신수정_ 저는 무엇보다 이성균 선생님께서 졸업하신 1956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 해 제가 명동 시공관(국립극장의 전신)에 매일 찾아가 여러 선배 음악인들의 연주를 관람했었기 때문이지요. 그 무대에서 이 선생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되었고, 솔로 연주와 더불어 반주, 특히 안형일 선생님의 무대에서는 피아노 반주를 늘 도맡아 하셨습니다.
또한 제일 친한 친구가 이관옥 선생님의 따님이었기 때문에 이 선생님을 떠올리면 이관옥 선생님 댁에서 딸처럼 아끼신 제자인 김효경 선생님과의 결혼에 대한 허락을 받으려 하셨던 모습이 강하게 기억에 남고(웃음), 제가 서울대에서 종종 이성균 선생님을 만나 뵙노라면 그분의 얼굴에서는 선한 미소가 항상 함께 해 찌푸린 얼굴이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이 선생님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그 밝은 표정이 생각납니다.

 

이용일_ 사실 오늘은 다른 인물탐구 때에 비해 참가 인원이 최고로 많은데요. 이것은 결국 이성균 선생님의 인간미에서 온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분의 얼굴에서 찌푸리는 표정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을 만큼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이셨기에 제자 분들이 그러한 그늘 아래에서 얼마나 행복했을지 짐작되어집니다. 그럼 이어서 제자 분들께서 스승과의 첫 만남을 떠올려 주시지요.

 

이영민_ 저는 지금은 음악학으로 전공을 바꿔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대학 시절에는 이성균 선생님의 울타리 안에서 피아노를 공부했었습니다.
처음 제가 이 선생님을 뵙게 된 계기는 대학 합격 후 친구의 소개로 인사를 드리게 된 것인데, 티칭과 더불어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신 분이십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전공을 바꾸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음에도 용기를 주셨기에 미국에서 남편과 일시 귀국을 하노라면 꼭 선생님 내외분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께서는 음악적으로도 훌륭하시지만 인자하심이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사모님께서 인간적으로 이끌어 주시고 모범을 보여 주셔서 저희 제자들이 지금까지 선생님을 추억하며 행복한 것 같습니다.

 

김석란_ 제가 이성균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인데요. 그 전부터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께서 제자를 받지 않게 되시면서 갑작스레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다행히 저를 받아주셔서 그 후부터 선생님의 곁에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처음 레슨을 받으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웃음이 만연한 모습으로 저를 맞아주셔서 예전에는 레슨 시간이 다가오면 떨리고 무서웠었는데, 이성균 선생님과 함께 할 때에는 마음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엄의경_ 선생님의 제자가 되기 이전부터 학교에서 이 선생님과 마주칠 때면 항상 인사한 모습과 함께 반갑게 웃으시면서 “열심히 잘하고 있지?”라고 말씀하시며 보듬어 주셨고, 특히 편안했던 선생님의 품이 어린 마음에 너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성균 선생님을 찾아뵙게 된 이유는 오정주 선생님께서 돌아가시면서인데요. 아무래도 가르침을 얻던 스승께서 갑자기 작고하시게 되니 그 따뜻함이 그리웠습니다.
또한 이 선생님은 연주장에서 자주 뵐 수 있었던 분으로, 제자들의 연주 때는 꼭 객석에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무대를 앞두고 있노라면 선생님께 찾아가서 피아노를 한 번 쳐 보지 않으면 괜시리 불안해지는데, 이성균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 어디에 가서 피아노를 쳐 보지?”라는 생각에 먹먹해지면서 꼭 부모님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노경아_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청운동의 선생님 댁으로 찾아간 저를 제자로 받아주셨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학을 다녀온 후 1995년부터 선생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동문회를 만들어 총무 직을 현재까지 맡고 있는데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버지처럼 너무나 잘 대해 주셔서 부족하지만 선생님의 뜻을 이어나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형민_ 우선 이렇게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이성균 선생님을 추억할 수 있는 자리에 함께 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예원·예고 재학시절에는 고 권기택 교수님을 사사하였는데, 서울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이성균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다른 선생님들께서 말씀을 하신 것처럼 이 선생님이라 하면 아버지처럼 항상 미소지으셨던 모습, 사모님과 다정하신 모범적인 부부로서의 두 가지 모습이 항상 떠오릅니다.
 
이성균 선생의 음악세계

 

이용일_ 선생님들께서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이성균 선생님의 화사한 얼굴과 선한 마음씨가 우리의 마음을 정화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고, 지인 분들과 가족 분들께는 조심스런 말씀이지만, 그러한 성품 때문에서인지 선생님께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성격 그대로 깨끗하고 고결하게 하늘나라에 가시지 않으셨나 생각해 봅니다. 저희 원로 음악인들의 소망도 후대 음악인들에게 이 선생님처럼 존경받는 삶을 사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다음으로 이성균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형민_ 물론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피아노를 전공하셨지만 사모님도 성악가이셨고, 성악반주를 많이 하셔서인지 레슨 시간이면 항상 옆에서 노래를 많이 불러주셨습니다.
사실 피아노가 노래로 표현하기는 힘든 악기인데, 노래로써 음악을 표현해 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이란 것이 무조건적인 테크니션이 아니라 어떤 성격이나 성품들이 묻어 나오잖아요. 그러한 의미에서 이 선생님께서는 워낙에 성품이 좋으셔서 그것이 음악에 묻어 나왔던 것 같고, 그러한 부분이 제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모이면 다들 선생님의 제자인 것이 자랑스럽다며 이야기를 합니다.

 

이영민_ 네, 맞습니다. 저는 지금은 피아니스트의 길은 걷고 있지 않지만, 선생님께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선생님의 성품처럼 둥글고 아름다운 음악을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되고, 노래를 불러주시면서 “이렇게 해보아라”라고 인도해 주셨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용일_ 처음 좌담회를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제자 중 두 분 정도 참석하시도록 계획하려 했었습니다. 워낙 이성균 선생님께서 주위 분들에게 잘하셨기에 당대의 여러 음악가 분들께 부탁을 드리면 흔쾌히 참석하실 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동창회의 스승에 대한 사랑이 워낙 강한지라 참석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개인적으로 아쉽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이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대해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경아_ 이성균 선생님의 피아노 소리는 음악적으로 너무나 예쁜 소리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제자들이 “나도 저런 소리를 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해주셨고,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구나”라는 마음이 들게끔 하는 연주자이셨습니다.

 

엄의경_ 이성균 선생님의 음악이라 하면 아름다운 음색이나 색채를 들 수 있지만, 선생님께서 이렇게 강한 면이 있었나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울대 음대 학장을 맡고 계셨을 때 KBS의 열린 음악회에서 섭외가 들어왔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모든 학교가 참여하기를 바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도 이 선생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클래식과 다른 음악이 혼합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시며 전통 클래식 음악을 주장하셔서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 “우리 선생님이 외유내강(外柔內剛) 한 분이시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또 사모님께서 전에 해주셨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연주가 하나라도 잡히면 밤을 새워서 완벽하게 연습하는 노력파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다듬어져 나온 음악을 구사하실 수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장혜원_ 네, 그렇습니다. 일단 인간적인 면모로 봤을 때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남과의 유한 관계형성과 온화한 성격으로 편안한 앙상블을 가능케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생동안 많은 사람들을 잘 이끌어 주셔서인지 선생님의 음악세계도 전쟁을 치르듯 함이 아니라 화합을 제일 우선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온화하고 부드러우신 것만이 아니라 정의롭고 올바른 일에는 누구보다도 단호하셨어요.

김석란_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기교적이면서 아티스틱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격하지 않으면서 물 흐르듯이 순화되는 그러한 음악을 추구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 때 그러한 선생님의 음악세계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데요. 실기 시험이 막 끝나고 친구들과 모여 “그 아이 너무 잘 치지 않았니?”라며 서로의 음악을 평가하자 그 이야기를 들은 이 선생님께서 “나는 너무 시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은 포르테였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용일_ 그렇다면 이성균 선생님과 많은 연주를 함께 해오신 안형일 선생님께서는 이성균 선생님의 음악세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안형일_ 이성균 선생님과 저는 50년간 같이 연주생활을 함께 한 벗으로 지내왔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바른 인품과 더불어 음악성이 굉장히 좋았고, 노래 자체를 즐겨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이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웠지요. 또한 제게는 없는 훌륭한 음악성을 지니고 있으셨기에 그분께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많은 무대를 함께 했지만 방송사의 가곡의 밤 출연을 위해 연주자들이 다 같이 봉고차를 빌려 전국을 돌면서 제 모든 연주의 반주를 해주신 기억이 이 자리에 있자니 새록새록 납니다.
그리고 이성균 선생님의 반주자로서 큰 장점이, 악보가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청중의 앙코르 요청에도 흔들림 없이 어떠한 키(key)에도 모두 맞춰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악가에게 그러한 부분은 매우 중요하거든요.
이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 한 것은 물론 그분의 이러한 음악적인 노련함이 필요해서이기도 했지만, 성격 자체가 너무나 좋아서 성악가이자 동료로서 가장 편안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온화한 성격 뒤에 화가 나시면 흥분도 하시고, 격한 감정도 많이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무조건 온화하다고 만은 볼 수 없지요(웃음).

 

김석란_ 안형일 선생님 말씀에 덧붙여 제가 이 선생님과 음악 여행을 갔던 일화를 말씀드릴게요. 제가 대학원에 들어 간 후 잘츠부르크 뮤직캠프를 갔었는데, 그 때 이성균 선생님의 인솔하에 2주 동안 유럽 전체를 돌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여행에서 선생님을 좀 더 가깝게 알게 된 것 같네요. 한 번은 여행 중에 하이델베르크에 들른 적이 었었는데, 그 곳에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을 찍은 장소였던 한 카페를 가게 되었고, 정말 영화에서처럼 피아노가 비치되어 있어 손님들도 직접 피아노를 칠 수 있었는데, 마침 저희들 전부가 음악가들이었고, 실력을 보여주자는 마음에 이성균, 김성길 선생님께서 같이 연주를 시작하셨는데, 악보도 없는 상황에서 무한대로 주크박스와 같이 이 선생님 반주에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니 나중에는 그 곳을 저희들이 완전히 접수했었던 추억이 있습니다(웃음).

 

노경아_ 한 번은 ‘큰 사랑 큰 스승 음악회’무대에서 이성균 선생님께서 악보를 안 보고 반주를 하시자 한 선생님께서 지금도 악보를 다 외워서 하시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랬더니 이 선생님께서는 “당연하지. 무대에서 악보는 펴놓은 것뿐이지 다 외워서 해야 해. 아직도 나는 매일 연습을 한다니까.”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저희 제자들이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쉬엄쉬엄 하게 되기 마련인데,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철두철미한 분이셨습니다.

 

김효경_ 네,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성균 선생님께서 초견이 좋아서 금방 연주하시는 줄 알고 계시는데, 평소에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매일 피아노에 앉으셨던 것은 기본이었고, 만약 이틀 전에 갑자기 연주를 부탁받게 되면 밤을 새서 연습하셨습니다. 조그마한 가곡 하나라도 외울 때까지 연습하셨으니 어떤 연주든지 쉽게 되는 것은 없지요.

 

이용일_ 반주를 외워서 하셨다는 것 자체로도 참 얼마나 부지런하신 분이십니까.

 

김효경_ 당신께서 그렇게 음악을 만들고 연주를 준비하시는 것을 즐기셨지요. 또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회가 열렸었는데, 철통같은 보완으로 경비가 삼엄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만 한 성악가가 미용실에 실수로 악보를 두고 입장을 한 것이에요. 출구가 다 막혀서 나갈 수도 없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텔레비전 생중계가 되고 있는데다가 전날에 키(key)를 바꿨었습니다.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무대로 올랐고, 다행히도 연주를 무사히 마쳐 이 선생님께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갑자기 키(key)를 바꿔서 전날에 열심히 연습을 해서 악보가 필요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이용일_ 제가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이성균 선생님께서 졸업 연주 때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무대에 올려 아주 신선한 연주를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김효경_ 졸업 연주가 아닌 이 선생님의 대학교 2학년 때의 연주였습니다. 김원복 선생님의 권유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 세간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 곡으로 대외적으로도 많은 연주를 가지셨고, 졸업 연주 때는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치셨습니다.

 

이용일_ 제 기억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군요(웃음).

 

이성균 선생의 교육관

 

이용일_ 이번에는 이성균 선생님의 교육관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볼까 하는데요. 제자 분들이 전하실 말씀이 아주 많으실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영민_ 한 번은 동문회에서 제자들이 만나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일을 이야기해 보자 했는데 정말 거의 없더라고요. 연습을 진짜 안 했을 때에는 기껏해야 “너, 너!”라고 하시는 것이 최대의 꾸지람이었으니 말 다했지요(웃음).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인자하시면서 제자들을 항상 격려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는 최고의 조력자로서 본 받을 만한 분이셨습니다.

 

김석란_ 네, 맞습니다.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정말로 야단을 치신 적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어떨 때에는 제가 양심에 찔려 죄송한 마음에 연습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한 번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스스로 양심에 가책을 느껴 연습을 하도록 하지 않으셨나 싶었을 정도로 음악에서 강요를 하신 법이 없으셨습니다.
항상 제가 연습해 간 그대로 놔두셔서 여쭤봤더니, 당신은 자기 뜻대로 음악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음악은 답이 없는 분야이고, 본인이 원하는대로 이끌어가야 진정한 음악이 나오기 때문에 자신의 음악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레슨 때 불러주신 선생님의 노래를 통해 음악적인 틀이 잡히는 것을 느꼈기에 제가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 가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일_ 저는 개인적으로 교육적인 면에서 ‘가르친다’라기보다는 제안해 주고 추천해 주는 suggest 교육관을 지지하는 쪽인데요. 그러한 최상의 방법을 이성균 선생님께서 고수하셨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제자 분들은 이 선생님에 대해서 인자함을 가장 많이 떠올리시는데, 선생님의 젊은 시절은 다르지 않으셨을까요?

 

이영민_ 아닙니다. 항상 그러하셨어요. 얼마나 점잖게 학생들을 대하셨는지 저희가 나이가 들고 보니 젊은 나이에도 아버지와 같이 인자하게 대해 주시고 정말 조금의 화도 내지를 않으셨다는 점에 새삼 고개가 숙여집니다.

 

엄의경_ 그런데 한참 뒤에 깨달은 사실인데, 선생님의 “좋아!”의 톤이 다 다르더라고요(웃음). 무대를 앞두고는 선생님께 찾아가 종종 검사를 받았었고, 그럴 때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듯 잘 한다는 그 말씀 한 마디에 신이 나서 연주를 마쳤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선생님께서 음악적으로 많은 것을 주신 것도 맞지만, 말씀이 아닌 행동으로서 모범적인 부부의 표본과 한 사람의 교수로서 주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몸소 보여주셔서 정말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성균 선생님의 여생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도 꼭 저렇게 살아가야지”하는 제 거울로 삼았다고 할 수 있지요.
한 번은 대학 때 저희 친구들끼리 모여 “이성균 선생님은 아직도 사모님과 손을 잡고 산책을 하신다니까. 너무나 부럽지 않니?”라면서 우리도 꼭 그렇게 살자고 다짐했었습니다.

 

노경아_ 저희들이 이제는 커서 제자들을 가르치게 되다보니 어렸을 때는 몰랐었는데, 이성균 선생님께서 우리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막말이나 고성은 전혀 없었고, 학생들 자신이 배울 곡을 선택하게 해주시거나, 레슨 때에도 “이렇게 해”가 아닌 학생의 선택과 결정에 함께 고민하면서 공부하는 입장에서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선생님의 마음 씀씀이에 너무나 감사드리고, 그러한 하나 하나가 이렇게 동문들이 교수가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형민_ 앞에서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저 역시 선생님께서 호통 치시는 모습을 뵌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자라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고 자녀를 기르는 입장이 되고 보니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더라고요.
그러한 면에서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항상 학생들을 기다려주셨고, “좋아”라는 한 마디와 함께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라고 조언을 곁들여 주시는 참된 교육관으로 학생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하게 하셔서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용일_ 정말 대단한 스승이셨네요. 그렇다면 댁에서의 이성균 선생님은 어떠하셨나요?

 

김효경_ 집 밖에서는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 하실 만큼 온화한 분이셨지만 사실 댁에서는 그렇지 않으셨어요. 언젠가 김원복 선생님께서 제게 “나는 너의 마음을 잘 안다. 이성균 선생 같이 까다롭고 힘든 사람이 없는데, 네가 잘 화합하고 도와줘서 고맙구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고, 집에 있는 물건 하나도 제자리에 정돈되어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성격이 꼭 무엇이든지 당신께서 생각한 것대로 정리가 되어야 만족해 하셨지요.

 

이성균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 끼친 영향

 

이용일_ 마지막으로 이성균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음악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어 볼까 합니다. 먼저 이영민 선생님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이영민_ 우선 서울대 음대 학장으로 재직하시면서 학교를 굳건히 지키시고, 발전시키심과 더불어 따뜻한 마음으로 베푸시며 여러 행적을 남기셨습니다.

 

엄의경_ 피아니스트들이 대부분 솔로 활동을 많이 하잖아요. 하지만 이성균 선생님은 여러 분야에서 협력하는 작업을 통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많이 보여 주셨고, 음악은 혼자서 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많이 보여 주셨기 때문에 저희들도 당연히 실내악과 반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음악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많이 보여 주셨기에 틀에 박힌 음악을 하지 않게 되었고요.
그래서 많은 제자들에게 세상을 떠나셨어도 큰 영향을 끼치셔서 이렇게 저희가 국내 음악계에서 하나의 조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 이 선생님의 가장 뚜렷한 업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용일_ 네, 그렇습니다. 바람직한 교육법으로 여러분들을 이렇게 훌륭히 키워내신 것이 이성균 선생님의 가장 큰 업적이겠지요.
오늘의 좌담은 참 보람있는 자리인 것 같고, 후학들이 참고했으면 하는 사항들이 많이 나왔네요. 장혜원 선생님께서 이 자리를 빌어 꼭 전하고픈 말씀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장혜원_ 네. 사모님이신 김효경 선생님께서 저희 한국피아노학회를 위해, 또 국내 피아니스트들을 위해 이 선생님께서 아끼시던 야마하 피아노와 쓰시던 악보들을 모두 학회에 기증해주셨습니다. 이는 이성균 선생님께서 생전에 학회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던 것으로 느껴지며, 사모님께서 기꺼이 그 뜻을 이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피아노 같은 경우, 아직도 소리가 너무나 예쁘게 나며, 악보들도 소장가치가 높은 귀한 것들이 많은데,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함께 하고 있는 한국피아노학회에 모두 기증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뜻깊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희 학회에서는 이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나가고자 피아노 음악 연구와 발전에 최선을 다 할 것이며, 곧 학회사무실로 선생님의 피아노를 옮겨오고 악보들을 정리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정식으로 외부에 공표할 예정에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많은 분들이 학회에 기증의 뜻을 밝히게 될 좋은 시초라 여겨지며, 무엇보다 김효경 선생님의 훌륭한 선택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김효경_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저 역시 이성균 선생님의 뜻을 이어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이용일_ 다른 분들께서는 이성균 선생님에 대해 남기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신수정_ 지금은 오히려 남자 연주자들이 많아 졌지만, 그 시절만 하더라도 남자 피아니스트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아주 귀한 존재이셨지요.

 

안형일_ 제가 느끼기에 피아노 솔로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셨지만, 이성균 선생님은 반주계에서 선구자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요. 특히 우리나라에 반주과가 생기고 반주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져 나가는 데에 많은 도움과 큰 영향을 주셨고, 반주 전공 분야가 보다 넓어지게 된 데에 이성균 선생님께서 씨를 뿌려 놓으셨다고 봅니다.

 

장혜원_ 네, 맞습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의 사랑은 학연, 지연과 같은 것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이화여대 사람으로 몇십 년간 지냈던 사람인데, 남들이 보면 서울대 출신이라고 볼 정도로 학교라는 울타리의 벽을 음악 자체로만 가지고서 다 허무신 분이세요.

 

신수정_ 장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도 이성균 선생님의 제자도 아니었는데, 시간이 허락하시면 최대한 많은 연주에 참석해 주시려 하셨고, 진심 어린 칭찬으로 누구든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은 분이 없으셨습니다.

 

김석란_ 흔히 옛말에 안 보이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제자들이 모이면 선생님의 흠을 잡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영민_ 다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분의 훌륭한 성품에 감탄하는 것이지요.

 

김석란_ 저는 개인적으로 사모님이 더 훌륭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균 선생님이 이렇게 대외적으로 무리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옆에서 내조를 잘해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경아_ 네, 맞습니다. 사모님께서는 댁에 가면 항상 주방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주신 것도 모자라 이성균 선생님과 함께 저희들 음악을 경청해 주시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셔서 두 분께 레슨을 받는 기분이었고, 제자들의 인적사항까지 모두 꿰고 있으실 정도로 섬세하세요.
그리고 선생님 당신께서 직접 권태기가 없으시다 말씀하실 만큼 두 분의 사이가 돈독하셔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셨습니다.

 

장혜원_ 이성균 선생님의 뜻이 담긴 생전 물건들을 오랫동안 자리하신 서울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 학회에 기증해 주셨다는 것을 보더라도 김효경 선생님께서 우리나라의 피아니스트들을 사랑하신 이 선생님의 마음을 읽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효경 선생님의 뜻이 곧 이성균 선생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이용일_ 여담이긴 하지만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김효경 선생님께서 이성균 선생님과의 연애시절 이야기를 혹시 전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김효경_ 이성균 선생님과 처음 만난 것은 제 졸업 연주의 반주를 맡아주시면서부터였습니다. 그 때 이성균 선생님께서는 누가 반주를 해달라 부탁이라도 하려하면 도망가기 바빴다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그야말로 반주가 봉사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공부만 해도 벅찬 선생님은 성악 하는 친구들을 피해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관옥 선생님께서 제 졸업 연주의 반주를 부탁했을 때는 흔쾌히 허락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너무 바쁘신 분이라 거절당하기 싫어 직접 여쭤보지도 않았는데 바로 승낙해 주신 것으로 보아 저를 이전부터 잘 봐 주셨었나봐요(웃음).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되어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자주 보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부부의 연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결심하였을 때 저희 집안에서 반대가 아주 심해 고모님들께서 현제명 선생님을 찾아 뵙고 저를 미국으로 보내야겠다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 때 현재명 선생님께서 저희 고모님들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든지 가장으로서 책임질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시며, 이 선생님을 한양대 음대가 생기면서 교수로 부임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주위의 반대가 심해 결혼을 결심할 때까지도 많이 망설였었는데, 현제명 선생님께서 이렇듯 적극적으로 나서주셔서 주위에서도 걱정을 접고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정리_이은정영 기자 /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10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안형일(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진행: 이용일(한국음악교육협회 명예회장)

김효경(전 숙명여대 출강, 이성균 선생의 부인)

신수정(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장혜원(전 이화여대 음대 학장, 한국피아노학회 이사장)

이영민(성신여대 음대 교수)

엄의경(서울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석란(명지전문대 교수)

  노경아(성신여대, 장신대 출강)

 

이형민(단국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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