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음악춘추

바이올리니스트 김 민 / 음악춘추 2013년 3월호

언제나 푸른바다~ 2013. 3. 18. 08:34

박경우가 만난 이 달의 아티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김 민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일궈 온 음악 인생

사회의 각 조직이나 단체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은 두 타입으로 대별된다. 보스 형과 리더 형이 그것이다. 전자는 실권을 쥐고 있는 최고 책임자, 두목, 우두머리로, 후자는 전체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 지도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구태여 왕에 비유한다면 전자는 폭군(暴君), 후자는 성군(聖君)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공연 팜플렛을 보면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을 지칭할 때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음악감독 겸 리더라고 적혀 있다. 이는 비단 그 같은 표기 때문이 아니라, 세 시간 반 동안 다각적인 대화를 나누며 필자가 김민에게서 느껴지는 인상 그 자체를 표현하기에 ‘리더’라는 표현이 적합한 단어로 마음에 다가섰기 때문이다.
김민은 지난 수십 여 성상(星霜)을 국내 및 해외 무대에서 솔리스트, 교향악단 악장, 챔버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과 리더 그리고 교수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그는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사명의식을 소유한 반면, 내면은 온화한 인간적 품성이 느껴지는 외유내강형의 진솔한 예술가란 생각을 갖게 된다.
그의 예술세계를 단순히 출중(出衆)하다는 표현보다, 자신이 선택한 길과 목표를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감으로써 오늘에 이른 극고난, 도환희(克苦難, 到歡喜:고통을 이겨내어 환희에 이르러라)라는 문구를 떠오르게 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음악적 행보는 매우 척박한 시기적 및 환경적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모친은 이화여전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고, 부친은 음악을 좋아하고 플루트 연주를 취미로 하며 수많은 레코드를 수집했던 교육자였다.
김민은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국립교향악단에서 부악장으로 재직하다 1969년 독일 국비 장학생(DAAD)으로 선발되어 함부르크 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1979년까지 함부르크의 NDR 라디오 오케스트라, 그리고 지휘자 로린 마젤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로 이적(移籍)하기 전까지 십여 년 간 지휘봉을 잡았던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쾰른 실내악단의 악장 겸 솔로이스트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연주회를 개최하다가 1979년 국립교향악단의 악장으로 초청되어 귀국하였다. 이후 국립교향악단에서 1981년 개칭(改稱)된 KBS교향악단에서 1993년까지 악장으로 재임하였다. 김민의 다양한 활동이 한국음악계에서 인정되어 1984년부터 십여 개에 달하는 각종 수상은 물론,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 국내 및 세계적 명성과 권위를 갖는 각종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해 왔다. 이후 그가 창단 때부터 악장을 담당했던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재조직하여 활발한 연주 및 교육 활동을 펼치기 위해 KBS교향악단 악장을 사임하고 서울대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며 서울바로크합주단이 오늘에 이르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박경우_ 서울바로크합주단에 이어 국내 및 해외에서 오랜 세월 동안 앙상블 활동(챔버와 오케스트라)에 주력하셨는데, 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느낀 솔로가 아닌 앙상블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와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민_ 앙상블은 솔로와 달리 연주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심적 교류로써 서로 간 소통이 되고 조화를 이뤄야 하며, 그 다음에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고 일체화를 이뤄 나가야 합니다. 이는 비단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기업경영 등 사회 전반에도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많은 앙상블 단체들이 생성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해체되는 이유가 바로 서로 간 마음이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인간적 교류와 마음의 소통, 다음으로 음악적인 관건 순으로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박경우_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여타 합주단들과 다른 특징이 많은데, 민간단체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을 함께 해 온 단원들이 많다는 것을 대표적인 예로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시지요.


김민_저와 함께 20년 이상 활동해 온 단원이 20명이 넘습니다. 전용우 악장은 30년이 넘게 동고동락해 왔습니다. 바로크합주단의 에너지가 바로 이 같은 응집력에 있습니다. 과거처럼 선배나 선생님이 하라고 권유해서 마지못해 참여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저희는 절대적으로 개개인을 존중하고 아울러 진정성을 갖고 대합니다. 바로크합주단은 오디션제도가 없습니다. 함께 하고 싶은 의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동참하여 활동하고 생활하면서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그만둘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같이 모여서 활동해 나가면서 단원들이 많이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보면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로 동반성장의 기회인 것입니다.

 

박경우_ 수십여 명에 달하는 단체의 운영을 책임 맡는 음악감독으로서 고민거리가 많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단 현재뿐만 아니라 단체의 미래를 위한 방향 모색 등이 그것의 일부겠지요. 음악감독으로서 임하는 의지 및 어떤 방향성을 추구하십니까?


김민_ 저는 곧 다가올 바로크합주단 창단 50주년이 우리 단체의 큰 전환기가 될 수 있도록 기획해 나갈 생각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후에도 꾸준히 음악계에서 바로크합주단의 역할을 해 나가야 하겠지만, 점차 글로벌화되는 시기를 맞이하여 세계 어느 무대든지 설 수 있는 준비된 공연단체로서 자리매김해 나가도록 이끌 생각입니다. 클래식의 근본이 변할 수는 없지만, 공연의 트랜드가 바뀌어 가는 현실에 부응할 방안 모색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난 창단 35주년과 40주년에도 본 단체의 명칭을 바꾸려했으나, 주변의 여론이 분분하여 시도하지 못했습니다만, 50주년에는 서울바로크합주단에서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로 개칭할 수 있도록 추진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연주하는 레퍼토리가 비단 바로크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 곡까지 폭넓은 곡들을 연주하는데, 단체 명칭이 ‘서울바로크합주단’이기 때문에 일반에게 혼선을 주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해외공연은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향후 십년 이십 년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구조부터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의 출발은 음악감독 제도의 정비이고, 다음으로 혁신적 변화를 시도할 미래지향적 시스템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느껴집니다.

 

글_박경우 사진_김문기 부장

 

- 기사의 일부만 수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음악춘추 2013년 3월호의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