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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이안삼 별세…‘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명품 한국가곡 남기고 떠나다 / 유투브 영상

언제나 푸른바다~ 2020. 8. 27. 11:41

https://youtu.be/8QICuRBxrVU

작곡가 이안삼 별세…‘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명품 한국가곡 남기고 떠나다

향년 77세…클래팝 장르 개척·인터넷 가곡카페 운영 등 한국가곡 부흥 앞장

입력 2020.08.19 08:22 | 수정 2020.08.19 09:12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그대가 꽃이라면’ 등의 명품 한국가곡을 만든 작곡가 이안삼이 18일 오후 5시께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고인은 아름다운 우리 시에 선율을 붙인 한국가곡의 르네상스를 위해 앞장섰다. 한국가곡 전성기(1970~1980년대)를 되살리려 ‘클래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고, 인터넷 가곡 카페를 운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다.

‘내 마음 그 깊은 곳에’을 만든 작곡가 이안삼이 18일 오후 5시께 숙환으로 별세했다.

1943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난 고인은 여섯 살 때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김천으로 돌아왔다. 트럼펫을 잘 불렀던 그는 1961년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라벌예대(후에 중앙대에 인수) 기악과에 입학했다.

이때 작곡의 길로 이끈 평생의 스승 김동진 선생을 만난다. ‘가고파’ 등의 명곡을 쓴 선생이 어느날 작곡과로 전과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악기를 다루는 재능보다 오히려 곡을 쓰는 실력이 더 뛰어남을 알아본 것이다. 이 한마디에 트럼펫 대신 오선지를 들었다. 스승이 경희대 음대로 자리를 옮기자 그도 스승을 따라 경희대 작곡과로 옮겼다.

1964년 대학 4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 전역 후 1967년부터 2006년 정년 퇴임 때까지 39년간 마산중학교와 김천중·고교에서 음악 교사를 지냈다. 그 사이 1980년부터 1982년까지 2년간 미국에 건너가 브루클린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줄리어도 음악원 지휘과를 수료했다.

작곡가 이안삼(왼쪽에서 두번째)이 2017년 9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한 콘서트에서 동료작곡가들과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작곡가 신귀복, 이안삼, 이수인, 최영섭.

2003년은 그에게 뜻깊은 해다. ‘그리운 금강산’의 최영섭, ‘내 맘의 강물’의 이수인, ‘강 건너 봄이 오듯’의 임긍수와 함께 ‘4인 작곡가회’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한국가곡 부흥에 나섰다. 네 사람은 꾸준한 작품 발표와 함께 전국을 돌며 크고 작은 음악회를 개최했다.

정년 퇴직을 전후한 시기부터 더욱 활발하게 대외 활동을 전개했다. 경북대 예술대 음대 강사, 한국작곡가회 부회장, 한국예술가곡 연합회 초대회장을 비롯해 '포럼 ‘우리 시, 우리 음악’(이안삼·문효치·박세원 공동대표)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4개의 음반과 4인 예술가곡집을 출판하는 등 한국가곡에 활기를 불어 넣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가곡제, 서울가곡제, 국민가곡제 등도 잇따라 출범시켰다.

고인의 인생 터닝 포인트는 63세로 정년퇴임을 한 이후다. 그냥 김천에 머물며 따박따박 나오는 연금으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가 고민했다. 그는 결국 나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새로운 세계로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었다. 광화문 근처 조그만 오피스텔에 거처를 마련한 뒤 ‘한국가곡 살리기’에 올인했다. 음악인생에 멋진 승부를 걸었다.

이안삼 이름 석자는 전국구가 됐다. 2008년 인터넷에 ‘이안삼 카페’를 오픈해 한국가곡 애호가를 한 명 두 명씩 끌어 모았다. 우리가곡 활성화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던 끝에 내린 절묘한 선택이었다.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한 방법이었고 예상은 적중했다.

생각했던 이상으로 많은 회원이 들어왔고, 인터넷 공간의 소통은 오프라인 공간으로 확장됐다. 직접 노래하기를 희망하는 회원이 있어 가곡교실을 열었고, 실력이 향상된 뒤에는 프로 성악가들을 초청해 아마추어와 프로와 함께하는 음악회를 여는 등 가곡동호회 모임을 크게 확장했다. 아마추어 동호모임을 중심으로 한 가곡음악회가 활성화됐다.

그는 늘 청춘이었다. 공연장에 가보면 삼각대에 휴대폰을 걸어놓고 공연장면을 페이스북 라이브 생중계 하곤 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시인과 성악가들과 교류했다.

인터넷 카페 개설과 더불어 음악 자체에도 더 큰 공을 들여 ‘클래팝’ 장르를 선보였다. 클래식(Classic)과 팝(Pop)의 장점을 합친 클래팝은 순수 예술가곡의 틀을 유지하면서 대중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음악이다. 2009년 ‘금빛날개(전경애 시)’를 시작으로 ‘어느날 내게 사랑이(다빈 시)’ ‘연리지 사랑(서영순 시)’ 등이 이 범주에 속하는 곡들이다.

 

[아이뉴스24 민병무 기자]